작품 [님, 모심] - 6회 장일순, 지학순 주교를 만나다
<지학순 주교 모습>
장일순, 지학순 주교를 만나다
어느 날 장일순의 봉산동 집으로 한 신부가 찾아왔다. 지학순(池學淳) 주교라고 했다.
“함께 일할 신도를 찾았더니 누가 ‘저기 빨갱이로 몰려서 농사짓고 있는 사람 있으니 만나 봐라.’ 해서 왔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장일순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저는 로마 교황청에서 주교로 임명받아 원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황님의 뜻을 함께 실천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교는 좀 더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장일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꿈은 종교적인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지하게 묻는 지학순 주교의 눈빛이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맑았다.
“저는 사람들이 누구나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주교는 만면에 화색을 띠며 맞장구를 쳤다.
“그거야말로 제가 해야 하는 일이고 교황님의 뜻입니다.”
장일순은 그제야 주교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은 아무런 거짓도 없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교황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비로소 장일순은 주교의 말에 관심을 두고 물었다.
“성 바오로 교황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가 문 닫고 담 쌓으면 안 된다. 사회와 소통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데 천주교의 의미가 있다’고요. 이런 뜻을 실천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만들었지요. 저는 이 정신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실질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든 절이든 구분하지 말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일했으면 합니다.”
장일순은 가슴속이 탁 트임을 느꼈다. 지금까지 교회의 형식과 내용에 답답함을 느껴 오던 참이었다.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주교의 말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 어쩌면 정치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종교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장일순이 긍정적으로 나오자 지 주교가 반색하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셨군요. 저는 먼저 사회의 희망인 교회 청년들을 교육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교회를 쇄신하고 싶습니다. 활짝 문을 열고 다른 종교들과 협력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그가 사회에서 실천하고 싶었던 것을 지학순 주교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전부터 그는 유영모, 함석헌 선생이 주장한 종교 다원주의에 동감하고 있었다. 38세에 장일순은 교구사도회 회장이 되어 학교에서 못다 한 교육을 성당에서 실행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김찬국 등 기독교 진보 인사들은 물론 농업 전문 교수, 노동문제연구소 사회학자 등 각계 지식인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자연스럽게 원주에 지식인 그룹인 ‘원주 캠프’가 구성되었다.
<삥땅 심포지엄> 1970년대 버스 안내양의 모습
1970년 봄, 서울 YMCA 강당에서 ‘삥땅 심포지엄’이 열렸다. 버스 안내양이 노동문제연구소에 편지를 보낸 것이 발단이 됐다. 노동문제연구소에서 그 안내양 고민을 해결할 수가 없어 장일순에게 상담이 들어왔다. 장일순은 여러 번 편지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지학순 주교밖에 없습니다.”
아내의 조언에 장일순은 지 주교를 찾아갔다. 지 주교는 웃으면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 없으면 나라도 하지 뭐!”
장일순은 관련 기관의 사람들, 학자들, 종교계 인물들, 정치가들을 모아 놓고 ‘삥땅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회자는 지학순 주교였다. 그는 먼저 버스 안내양이 보낸 편지를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저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버스 차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루 16시간 차장 노릇을 하면서 사는데, 차장 월급만으로는 살기가 힘들어 날마다 돈 가방에서 300환씩 삥땅하며 살았습니다. 그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고, 시골에 사는 어머니 아버지 생활비를 보내고, 동생 중학교 학비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돈 가방에서 돈을 삥땅하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 같아서 양심에 찔리고 괴로워서 못 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²⁾
편지를 다 읽고 나서도 회의장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침묵을 깨고 지학순 주교는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에게 물었다. 아무도 나서서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든지 대답하기가 껄끄러운 문제였다. 잘했다고 칭찬할 수도 없고,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지 주교는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그 처녀에게 ‘네가 잘못했다. 죄인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거꾸로 물어보겠습니다. 버스 회사 박상구 사장님!”
뚱뚱한 박 사장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움찔 했다.
“당신, 월급 얼마나 탑니까? 다른 선진국에서는 8시간만 일해도 자기 행복을 다 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이 처녀는 그 곱절인 16시간 일해도 제 입에 풀칠을 못할 정도요. 당신은 얼마나 받소?”
박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윤준영 구청장님, 물어봅시다.”
구청장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당신네 구 소속 버스 회사에서 이렇게 딱하게 일하고 있는 처녀가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신은 월급 얼마나 받소?”
역시 윤 구청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번에는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을 돌아보았다. 부르기도 전에 그들은 숨기라도 하듯이 몸을 낮췄다.
“여러 장관님, 국회의원님들! 당신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오? 어저께 신문을 보니까 대통령께서 우리나라 수출 많이 했다고 즐거워하는 사진이 크게 찍혀 있습디다. 대통령께도 묻겠습니다. 수출해서 잘살아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수출을 많이 해도 이렇게 딱한 처녀애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인도 아니고 아직 미성년자인데 하루에 16시간 일해도 제 입에 풀칠을 못하다니 이게 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이렇게 해서야 진정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요?”
지 주교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심포지엄이 끝나자마자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지 주교와 장일순을 에워쌌다. 검은 선글라스 쓴 한 명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거론된 말들은 밖에서 절대 하지 마시오. 만일 밖에서 말이 돌면 당신들 책임이오.”
“오늘 문제에 대한 당신 답은 무엇이오?”
오히려 장일순이 되묻자 그들은 얼른 자리를 피해 버렸다.
이 ‘삥땅 심포지엄’을 계기로 장일순은 지금까지 원주 캠프에서 추구해 온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지금까지는 주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내세운 게 ‘자유권’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권과 생존권이 같이 해결되어야 했다. 모든 존재의 생명의 존엄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자유는 허울 좋은 하눌타리인 것이다.
장일순은 민주화 운동, 노동 · 농민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호를 ‘무위당(无爲堂)’으로 바꿨다.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에서 따왔다. 남을 돕되 뒤에서 자연스럽게 하겠다는 자신의 삶의 철학을 ‘무위’에 담은 것이다. 지학순 주교 뒤에는 늘 장일순이 있었다. 겉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말없이 도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압살과 경제란으로 민심이 뒤숭숭하던 한여름이었다. 초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밤이 깊어지면서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마을 방송이 갑자기 울려 퍼졌다.
“원주 시민 여러분, 방송을 듣는 즉시 가마니와 삽, 괭이 등을 챙겨서 마을 회관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물살에 논밭이 다 떠내려가게 생겼습니다. 급하니 빨리빨리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장의 다급한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장일순은 빗소리에 깨어 있던 터라 즉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검은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손전등을 켜 들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들로 나갔다. 개천의 물이 금방 넘칠 것 같았다. 개천의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짚 가마니에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날이 밝아 오도록 빗줄기는 그칠 줄 몰랐다. 논밭이 물에 잠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안 가득 물살이 밀려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남한강 대홍수로 14만 5천 명의 수재민이 생겼다.³⁾ 이들에게 남은 건 수마(水魔)에 휩쓸린 황무지뿐이었다. 뿌리 뽑힌 어린 벼, 파묻힌 논밭과 허물어진 건물 잔해를 보면서 한숨만 나왔다. 물난리는 삶의 뿌리까지 쓸어가 버렸다. 논밭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장일순은 온몸이 젖은 채 성당으로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주교님. 수재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당장 굶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결책을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정부에서 지원을 못하면 해외에라도 손을 벌려야 될 것 같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재단에 편지를 보내 지원을 호소하면 어떨까요?”
장일순과 지학순 주교는 해외 여러 가톨릭 단체에 편지를 보냈다. 거절의 답장만 받는 날들이 이어졌다. 장일순은 안타까움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드디어 긍정적인 답장이 왔다. 그것도 두 곳이었다. 국제 가톨릭 재단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s)와 독일 미제레올(Misereor)에서 291만 마르크(한화 약 3억 6천만 원. 당시 원주시 땅값이 평당 200~300원.)의 지원금을 보내 주었다.
1973년 초 원주 교구가 주축이 되어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수해지원금을 놓고 고민했다. 사람들이 당장 원하는 쌀을 무상으로 지급할 것인가? 쌀을 통해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할 것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은 결과, 마을별로 자율적인 모임을 만들어 일한 뒤에 쌀을 지급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무너진 집터를 정리하고 쓰러진 벼들을 세웠다. 그리고 땀 흘린 대가로 쌀을 받았다.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일하면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차츰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아 갔다. 그러자 장일순은 협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강연을 하며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분, 브라보콘 값을 누가 정하죠? 그래요, 브라보콘을 만든 곳에서 정하죠. 그런데 쌀값은 누가 정해요? 농민이 정하나요? 세상에 농민이 길러낸 쌀로 지은 밥 안 먹고 사는 사람 있어요? 이렇게 중요한 쌀값을 농민들도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협동조합을 하자는 거예요. 농사지은 사람이 쌀값을 매기고 그걸 사 먹는 사람도 누가 만든 곡식인지 알고 먹게 하자는 거지요.”⁴⁾
장일순의 강연을 들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서서히 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은 힘들이 서로를 끌어들이며 점점 큰 힘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2015/05/27 - [소설/김현옥] - 작품 [모심] - 5회 장일순, 탄압 받다 (김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