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에 부는 바람(4회) - 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4회)
“나으리, 지나간 일이지만 혼사 일로 저를 많이 원망하셨지유?”
“삶이 원망스러웠습니다만, 지나간 일입니다.”
“이제사 얘기인데 당시 순섬 아씨 아버지에게 나으리의 어머니 신분을 고자질한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유?”
월화는 우울한 얼굴로 이창구를 쳐다보았다.
“누구면 어떻습니까. 알고 싶지 않습니다.”
“덕산 수령이었어유.”
“예?”
이창구는 깜짝 놀랐다. 덕산 수령이 대체 내 혼사에 무슨 억하심장이 있단 말인가?
“그 당시 혼사를 훼방 놓은 자가 누구인지 사람을 시켜 알아 봤어유. 덕산 수령이더라구유. 관 창고에 쌓여 있는 곡식을 5할의 장리로 빌려주어 이문을 남기려는디 나으리가 2할의 단리를 받고 있으니 방해가 되었던 거지유. 너 좀 당해 봐라 한 거지유.”
“장리 문제는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혼사까지 끼어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역시도 덕산 수령이든 면천 수령이든 내포 수령들 눈에는 나으리가 눈에 가시일 거유.”
“조심하겠습니다.”
이창구는 월화가 고마웠다. 동학 도인들이 사람들을 입도시키려고 눈에 불을 켜는 마당에 자신을 생각해서 동학 입도를 권유하지 않는 월화의 마음씨가 가슴에 와 닿았다.
“땅다당당 땅다당당 땅땅땅땅 땅당당”
갑자기 아닌 대낮에 꽹맥이 소리가 오리정을 뒤흔들었다. 풍장을 치는 때도 아닌데 웬 꽹맥이 소리일까 싶어 이창구는 귀를 쫑긋 세웠다. 월화가 방문을 열자 마른 체구에 곰보 얼굴을 한 자가 어깨를 으쓱대며 들어오고 있었다.
“한양은 잘 다녀 오셨어유?”
“하 하 하. 꽹맥이 가지고 태안 일대를 돌아다녀도 괜찮겠나? 한양 가서 옹기장사 하는 법을 배워 왔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앉더니 한양에서 청국 상인한테 산 것이라며 짙은 갈색의 담배쌈지를 꺼냈다. 가죽 껍데기가 반들반들한 것으로 보아 이창구는 그가 골초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싯돌을 꺼내어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한양 분위기는 어떻던가유?”
박인호는 박덕칠의 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곰보 얼굴을 한 자는 흘낏 이창구를 쳐다보고 나더니 박인호에게 지청구를 했다.
“아무리 급해도 인사부터 시키게나.”
“제가 좀 흥분했나 봅니다.”
박인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창구가 스스로 나섰다.
“이창구입니다. 틀못 장터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학을 하고 싶어 왔습니다.”
이창구는 박인호가 성실해 보이기는 하나 민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이구 영광입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저 같은 장사치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거부시라구요. 박덕칠입니다.”
“거부라니요? 송구스럽습니다. 부자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제가 땅 파서 번 돈이 아니니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부자가 되는 법을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그래야 입도시켜 드립니다.”
박덕칠은 하하하 웃으면서 이창구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입도를 안 시켜 주겠다? 벌써부터 손해 나는 장사를 하시는군요.”
이창구는 박덕칠을 보고 눈을 찡긋했다.
“장사를 하신다고 하시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손님의 말과 손짓, 눈빛에 집중하십시오. 예를 들면 한 여인이 포목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무명을 사러 왔다고 말하면서도 손은 비단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무명에 가 있습니다. 그녀는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을 사겠습니까?”
이창구는 박덕칠과 박인호를 번갈아 보았다.
“비단입니다.”
“저는 무명에 걸겠습니다.”
박덕칠은 박인호의 대답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이창구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예?”
박덕칠과 박인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무명에 가 있었으니 무명 아닙니까?”
박덕칠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창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덕칠 나으리는 눈의 방향만 본 것이지요.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습니까? 사려는 사람은 어느 순간 눈빛이 반짝이기 마련인데 웬만한 장사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지요. 그렇다면 모든 장사꾼들이 왜 거부가 못되는 걸까요?”이창구가 박덕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박덕칠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개의 장사꾼들은 그녀가 사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본인 일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거부는 눈빛 너머에 있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 그녀와 사사로운 대화를 나눕니다. 포목을 사지 못하는 그녀의 처지에 대해 들어보는 거죠. 그러고 나면 그녀는 반드시 가게를 다시 찾아옵니다. 거부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가 보면 나으리가 말씀하시는 ‘마음 집중’이라는 게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님인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하늘님을 살펴라 이 말씀이지유?”
박인호는 이창구라는 자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다. 장사를 통해서 도를 터득하다니!
“이창구 나으리는 삶의 경륜이 이미 몸에 배어 있어서 여느 입도자들과는 다릅니다. 드디어 내포 동학에 우백호가 나타났군요. 좌청룡은 여기 박인호 접장이십니다.”
박덕칠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좌청룡이라니유? 형님이야말로 좌청룡이시지유. 덕칠 형님은 저보다 한 살 위시고 이창구 나으리는 저보다 두 살 아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이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요! 맞습니다.”
이창구는 박인호의 정확한 기억력에 감탄했다.
“이런 경사스런 일이 있나! 해월 선생님이 아시면 기뻐하시겠네. 이창구 씨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너도 나도 몰려들 텐데! 입도식 준비하려면 바빠지겠군.”
“과한 말씀이십니다. 허나 저로 인해 동학 도인들이 늘어날 거라고 하시니 기분은 좋습니다.”
“한양에 가 보니 사대부들은 사치품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고, 청나라 놈들과 왜놈들은 조선 땅을 가지고 지들 입맛대로 까불리고 있습디다. 지난 임오년에도 일본상인 놈들이 매점매석해서 쌀, 보리 가격을 두 배로 뛰게 하고, 일본 교관을 파견해서 지들 마음대로 신식 군대를 부리더니만 지금은 더 심해졌습니다. 조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참 한심합디다.”
박덕칠은 곰방대를 물은 채 한숨을 쉬었다.
“유학만을 정통이라 주장하며 차별을 당연시하는 유생들이 판치는 조정에 무엇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해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착하면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화하고자 하면 한 집안이 화해지고, 다시 나라가 화하고 궁극엔 천하가 화해진다.’ 했습니다. 동학이 나서서 반상제도나 서얼차별, 남녀차별을 타파해야 이 조선이란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겁니다.”
박인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굵은 목이 더욱 굵어 보였다.
“입도식은 언제로 하면 좋겠습니까?”
박덕칠은 이창구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조만간 사람을 모은 다음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창구는 혼자 입도식을 치르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정원갑과 편중삼을 비롯해 순섬이 오라버니와 함께 입도식을 하고 싶었다. 순섬이도 같이 할 수 있을까?
(다음 호에 계속)
2015/05/19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 (4)-박이용운
※ 삽입된 사진 출처 : 위키백과("Japanese tobacco-pouch" by Marie-Lan Nguyen, used under CC BY 3.0 / resized from orig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