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유이혜경

섬진강은 흐른다(6회) - 4장 개벽운수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18. 08:15

 

4장 개벽운수(開闢運數) 

동학 공부를 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양계환은 동학 공부 모임이 구례에서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례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봄바람은 가지 끝에 잔설처럼 남은 매화 꽃잎을 날려 행인들의 코끝을 간질였다. 산에는 흐드러지게 핀 왕벚꽃이 온통 세상을 환하게 만들었다. 청년들은 별 일이 없어도 가슴이 설렜다. 해가 중천에 닿으려면 아직 시각이 좀 남았는가 싶은데 구례 임정연의 집에는 젊은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흔 아홉 칸은 아니어도 그 근동에서 제법 크고 넓은 집이건만 청년들 여남은 명이 들어서자 집이 꽉 찬 듯했다.

그 집 아들 임봉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했다. 광양의 양계환, 유석훈, 조두환, 서윤약, 한군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문간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광양의 젊은 청년 도인들은 다 모여서 오시구만요. 보기 좋수다. 하여간에 오시느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겄소. 저쪽 사랑채에 다 모여 기시오. 어서들 듭시다.”

월포 양계환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남원 류태홍 접주도 오싰소? 오늘 강론이 궁금해서 며칠 전부터 오늘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지달맀당깨요.”

허허. 양 접주만 그런 것이 아니오. 오늘 오는 사람들 다 그런다오. 어서 갑시다.”

인사가 끝나자 임봉춘은 사랑채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방문을 열자 방안에도 이미 사람들이 가득해서 어찌 들어갈까 싶었다. 바깥 쪽 사람들이 쭈뼛거리고 방안 눈치만 살피고 있자 이 집 주인이자 방 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임정연이 말을 내었다.

허허. 남원의 류태홍 접주님 강론이 사람들 마음을 다 끌어 댕긴갑소. 오늘은 지난 번 보다 더 많이 모였습니다 그려. 좀 좁지만 바짝 다가앉아서 오늘 강론을 들어보께라. 자자, 이짝으로 어서들 올라와 앉으시구랴. 멀리서들 오싰는디 다 같이 들어보십시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방 밖에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자리를 만들고 인사들을 나누었다. 자리가 정돈되자 얼굴이 환하고 인상 좋은 임정연이 모임 시작을 알렸다.

오늘 강론을 해 주실 분은 지난번과 똑같이 남원의 류태홍 접주요. 오늘 말씀도 기대되지요. 먼저 심고합시다.”

방 가운데 상 밑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청수를 상 위에 올리고 임정연은 심고를 하였다.

한울님, 임진년(1892) 삼월 초이튿날 남원 류태홍 접주님을 모셔 동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도인들 가슴에 파고들어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여 동학하는 삶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심고를 마치자 류태홍 접주는 방안에 도인들과 한 명 한 명 눈인사를 나누었다. 나이는 젊지만 류태홍 접주는 언제 봐도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강론을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인지 궁금하시지요? 이 시기에 대해 일찍이 최제우 대선생께서 말씀하셨고 그것을 최시형 선생이 다시 정리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살펴보고 이야기들을 나눠보지요.”

자리가 비좁아 바싹 붙어 앉은 봉강 유석훈과 월포 양계환은 눈빛을 반짝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류태홍 접주를 바라보았다.

지금 운수는 개벽운수(開闢運數)라고 우리 대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운수는 천지가 개벽하던 처음의 큰 운수로 돌아가세계 만물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크게 바뀔 운수가 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새 한울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봉춘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면 지금 시기가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양반도 천민도 없고, 니 땅 내 땅도 없고, 오로지 새 한울 새 땅에 모든 것이 새로워질 개벽의 시기가 가까웠다는 말씀인가요?”

류태홍이 천천히 대답했다.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이어서 말씀을 살펴보고 생각들을 나누시지요.”

옥룡의 서윤약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류태홍 접주를 독촉했다.

참말로 그런 세상이 언능 오면 좋겄소. 류 접주, 계속 해월 선생 말씀을 이어보시지요.”

세상 만물이 나타나는 때가 있고 쓰는 때가 있으니, 달밤 삼경에는 만물이 다 고요하고, 해가 동쪽에 솟으면 모든 생령이 다 움직이고, 새 것과 낡은 것이 변천함에 천하가 다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변하여 화하고, 화하여 나고, 나서 성하고, 성하였다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나니, 움직이면 사는 것이요 고요하면 죽는 것이라고 다시 새겨 주셨습니다.”

이맛살에 주름을 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봉강 유석훈이 물었다.

그럼 지금 시기가 움직여야 살고 가만 있으면 죽음에 드는 시기라는 말씀인가요? 만약 그런 말씀이라면 우리가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요?

한군협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썩어빠진 세상을 확 뒤집어엎어 삐리야 된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탐관오리 한두 놈 징치헌다고 해서 바로 잡아질 일도 아니고, 서양에서 헌다는 민회처럼 왕이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맹그라야 쓴다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그만요. 글고 양반이니 쌍놈이니 허는 것도 싹 다 없어지고 이 세상 사람이면 모두가 한울로 대접받는 세상을 맹그라야 쓴게 우리가 싸게싸게 움직이야 되지 않겄냐 이말이지다. 여러분, 지 말이 틀렸습니까?”

맞소.”

아고, 시원허니 말 잘했소.”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치는데 월포 양계환이 나서며 말했다.

누가 들을까니 무섭소마는 맞는 이야기지이다. 요새 왜놈들이 나 세상이다 허고 설치고 댕기 싼디 시방 이 모냥으로 살다가는 이 땅이 금새 왜놈 땅 돼 불겄소. 요새 광양 앞바다는 왜놈들 등쌀에 우리 어민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요. 관군 놈들은 왜놈덜헌티는 꼼짝도 못험시롱 광양 사람덜헌티만 험허게 뜯어 가부요. 그걸 보먼 가심에서 천불이 난당깨요.”

좌중에 올라오는 열기를 누르며 류태홍 접주가 강론을 이어 갔다.

천지일월은 예와 이제의 변함이 없으나 운수는 크게 변하나니, 새것과 낡은 것이 같지 아니 하고 새것과 낡은 것이 서로 갈아드는 때에, 낡은 정치는 이미 물러가고 새 정치는 아직 펴지 못하여 이치와 기운이 고르지 못할 즈음에 천하가 혼란스러울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사람 사는 세상에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사람은 다 금수의 무리에 가까워질 터이니 큰 난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속에 뭐가 올라오는지 유석훈은 목이 메었다.

어째 말씀 하나하나가 이러코롬 가심팍에 팍팍 꽂힌다요? 참말로 놀랍그만요. 시방 우리가 사는 꼴이 어디 사람 사는 꼴이다요? 껍딱만 사람이제 이거는 짐승만도 못헌 꼬라지랑깨요. 근디 썩어빠진 정치 땜시 골벵 드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닌갑더만요. 중국처럼 큰 나라도 백성들은 살기가 심들어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더랑깨요. 긍깨 우리나라도 사람을 한울처럼 소중히 여기는 우리 동학도인들이 나서야 희망이 생기는 거지다이~! 기왕에 개벽운수를 탄 김에, 이참에 확 바까 뿔먼 쓰겄당깨요.”

옥룡의 서윤약이 다시 말을 받았다.

참말로 글먼 좋겄지다이~. 류태홍 접주, 남은 말씀도 언능 이어 보시이다.”

류태홍 접주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말씀을 이어 갔다.

우리 도는 우리나라에서 나서 장차 우리나라 운수를 좋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안에 영웅호걸이 많이 날 것이니, 세계 각국에 파견하여 활동하면 형상 있는 한울님이요, 사람 살리는 부처라는 칭송을 얻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면 이마 주름은 펴지고 입 양쪽으로는 나잇살 주름이 깊게 잡히는 임정연이 말했다.

젊은 양반들은 부지런히 동학 포덕을 해야 쓰겄소. 나중에 개벽 세상이 되면 세계 각국에 나가 우리 도를 퍼뜨려서 이 세상이 다 천국이 되게 하먼 얼마나 좋겄소. 세상 만물을 다 한울로 모시고 특히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는 세상이 오먼 그 세상이 한울나라 다시 말하면 천국 세상이지라. ! 생각만 해도 좋소. 내가 그때까정 살아 있으먼 좋겄소. 우리 집 봉춘이 자식놈은 그런 천국에서 살겄지라. 그 나라를 위해 할애비가 힘 좀 써야겄구만이라.”

젊은이들은 다같이 환하게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양계환이 물었다.

어느 때에나 그리 될까요?”

류태홍 접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우리 대선생께서는 그것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 때가 있으니 마음을 급히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때가 올 것인데,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가 바로 그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사람 좋은 인상을 지닌 서윤약이 궁금증을 내었다.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라먼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덜이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될 거라는 말씀으로 들리구만요. 왜놈, 되놈,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들어오는 양놈들이 한바탕 우리 땅에서 난리를 치고 나가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감당허까~? 아고! 생각만 해도 난 무섭소.”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지자 방문 쪽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유석훈이 말했다.

꼭 그리 볼 일 만은 아니지다. 지금 이 나라 안은 탐관오리들 등쌀에 남아나는 것이 없소. 그런 판인깨 만국 교역을 헐라고 들어오든지 우리나라를 뺏어갈라고 들어오든지 간에 왜놈, 되놈, 양놈들이 설치고 댕겨 곧 한바탕 난리가 날 성도 싶소만, 나라 관리들은 그런 나라 정세는 신경도 안 쓰고 오히려 왜놈덜헌테 붙을까, 로서아놈덜헌테 붙을까, 되놈덜헌테 붙을까 그러고 자빠졌소. 그래서 우리 해월 선생이 요 사태를 미리 알고서 허신 말씀이지다. 긍깨 우리가 개벽운수를 제대로 맞이헐라먼 탐관오리 몇 놈은 목을 따 버리고 척양척왜 깃발을 들어야 겄소. 시방 개벽운수가 온다먼 운수는 이짝으로 굴러 온다 생각허고 한판 크게 움직일 채비를 해야겄구만요.

다들 표정은 심각하지만 대체로 유석훈의 말에 동의하는지 여기저기서 맞장구가 터졌다.

맞소.”

우리 손으로 개벽운수 맞을 채비헙시다.”

좌중의 분위기가 열을 띠어 가는 가운데 류태홍 접주가 심고로 마무리하였다.

한울님, 오늘은 개벽운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도인들의 가슴에 소중히 담은 말씀대로 용기를 내어 개벽 세상을 열어 갈 수 있도록 굽어 살피소서.”

주문을 외는 시간이 이어졌다. 모두 함께 주문 소리에 실어 개벽 세상을 열어 보려는지 딴 날보다 주문 소리가 크고 힘찼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한울을 모셔 우주 만물의 무궁한 조화를 이루고 이를 영원히 잊지 않아 만사가 다 이루어지고 저절로 알아진다.’는 뜻을 지닌 동학 본주문을 모두들 힘차게 외웠다.

다음 주 목요일(6월 25일)에 5장 봄날 편이 연재됩니다.


2015/06/11 - [소설/유이혜경] - 섬진강은 흐른다(5) 3장 청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