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월이(5회) - 자주의 깃발은 함성이 되어(5)
은월은 연산회합을 다녀 온 후 더욱 분주해졌다. 늘 그랬듯이 금객주를 먼저 찾았다. 영옥은 금객주와 은월당으로 들어왔다. 은월이 앉은 채 두 사람을 맞았다.
“영옥이가 옆에 있어 든든하겠습니다.”
금객주는 은월 옆에 언젠가부터 늘 함께 있는 영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우리의 뜻을 펴 나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것이 보따리를 싸들고 삼십년 동안 만들려고 했던 해월 선생의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금객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습니까?”
은월은 방긋 웃었다.
“예, 마음에 맞는 객주와 상인들을 따로이 규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왜놈들 횡포에 큰 피해를 입은 자들, 관 것들에게 치를 떠는 사람들로…”
“규모는 어떻게 할까요?”
“대여섯 명씩 여러 개로 조직해 주십시오. 서로 모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 그 모임마다 한두 명씩 도인들이 들어가도록 해 주세요.”
“첫 모임 시기는 언제가 좋겠습니까?”
“빠를수록.”
“예.”
“객주회나 상인회는 금객주가 알아서 그들의 실익을 잘 살펴주십시오. 서로 돈벌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실익이 있어야 조직이 빠르게 새끼를 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쥐새끼 같은 놈들도 있을 수 있으니 그 점도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은월은 붓을 들고 종이에는 <무장기포 금산 3월 10일경> 이라고 썼다. 금객주 입꼬리가 올라갔다.
“때가 온 거군요.”
“그날을 위한 준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요.”
“무엇을 준비를 해야 할지요?”
은월은 서랍에서 서책을 꺼냈다.
“여기에 적었습니다. 비밀리에 준비해주십시오. 박접장 쪽에서 경계가 심합니다.”
“그럼, 아직 합의가 안 된 모양입니다.”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법이지요. 하지만, 눈에 보이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겁니다.”
“벌써 달라졌지요. 지금도 곳곳에서 동학에 들어오겠다는 백성들이 줄을 서고 있습니다. ”
금객주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을 했다.
“이런 날이 올 거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은월은 흐뭇하게 웃음을 띠며 말을 했다.
“시대가 만들기도 하지만 그 시대를 우리가 만들기도 하지지요. 물살이 거세지도록 물길을 더욱 넓히는 것이 우리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영옥이가 이번 일에 후방을 맡을 것입니다. 영옥아!”
“예!”
“필요한 것은 금객주와 상의하면 된다.”
영옥은 금객주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예, 금객주,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금객주는 큰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기다리던 일을 하는데 우리 힘껏 해보지요. 그러나저러나 영옥이도 좋은 짝을 주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넘보는 사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영옥아, 그래,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혹시 있느냐?”
영옥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자주색 댕기를 매만졌다.
은월은 영옥의 속을 들여아보기라도 한 듯 아금짓는 말을 했다.
“고목나무에 매미가 되어서는 안 되는 법! 누구를 위해, 누구를 바라보는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부라 하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영옥은 순간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했다. 금객주는 멋쩍어 화제를 돌렸다.
“아낙들이 모여 한판 잔치를 벌인다고 해서 그 준비를 마쳤습니다. 날을 잡아주십시오.”
은월은 영옥을 바라봤다. 영옥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우수(雨水)가 좋겠습니다.”
“그리 알고 진행하겠네.”
금객주가 자리를 떴다. 영옥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은월이가 말을 했다.
“연모하는 사내가 있느냐?”
“…….”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만큼 상처도 깊은 법이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소낙비처럼…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영옥은 끝말을 흐렸다.
“알았다. 돌아가거라.”
영옥이 일어서자, 은월은 무겁게 말을 했다.
“그렇다고, 나처럼 포기하지 말거라. 한평생 미련이 가슴 언저리에 남더라.”
방문을 열자, 전주댁이 서 있었다. 전주댁은 방을 나서는 영옥의 등을 철썩 내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딸년 팔자 어미 닮을려고 그러는겨? 머리는 왜 내려! 니 어미 잡아먹어야 정신 차릴겨?”
“어머닌, 알지도 모르면서 왜 그래요!”
영옥은 화를 내며 마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전주댁은 은월 앞에 주저앉아 넋두리를 쏟아냈다.
“은월아, 좋다, 기생은 없던 일로 하고, 그럼 혼례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거라.”
은월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은월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긴 숨과 함께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은월은 옥녀봉에서 전주댁과 윤도인이 만나는 것을 봤다는 금객주말이 신경이 쓰였다. 은월은 재떨이에 재를 신경질적으로 털면서 말을 했다.
“재처 자리는 안 됩니다.”
전주댁은 당황해하더니 갑자기 돌변해서 화를 냈다.
“내가 어미지 은월이가 어미여? 왜 남의 혼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겨? 아이고 되지도 않는 소리! 됐어!”
전주댁은 제 할 말만 쏟아 놓고는 마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은월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삽입그림 출처 : "대둔산" by barama1, used under CC BY 2.0 / Cropped from orig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