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흐른다(7회) - 5장 봄날
5장 봄날
뜻이 통한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라도 석훈은 임봉춘의 집을 찾았지만 구례까지 친구 집을 쥐방구리 드나들 듯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석훈은 봉춘의 집에 드나들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갸름한 얼굴에 입술이 붉은 서엽이 때문이었다. 봉춘이 동생 임서엽이를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봉강에서 달덕이재를 넘어 구례까지 산길을 달리고 섬진강을 건너는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성불사를 지나 백운산 줄기로 이어진 높은 산을 넘을 때도 힘든 줄 모르고 달음박질로 산을 탔다. 그런데 봉춘의 집에 자주 들르는 사람은 자기만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은근히 자주 왔다. 석훈이 다섯 번 오면 계환과 두환이 중에 누군가를 한 번은 마주쳤다. 친구들은 봉춘과 시간을 보내면서 동학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서엽이 한 번씩 들러 새참을 가져다주고 가면 괜스레 총각들 얼굴이 붉어졌다. 석훈은 애가 달았다. 도통 서엽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석훈은 봉춘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월 어느 날 해가 다 저물어 가고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친구 조두환이 숨을 할딱거리면서 석훈의 방문을 열었다.
“뭔 일로 이리 숨넘어가게 왔당가?”
그때서야 숨을 한번 몰아쉬더니 두환은 능글능글 웃으면서 농을 걸었다.
“어이! 유접장! 유접장헌티 존 일이 있는디 이약을 허까마까?”
석훈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존 일?”
“그래! 이약해 주먼 술 한잔 살랑가?”
“그거이사 들어 봐야제 술을 내던가 말던가 허제!”
“오늘 구례 조삼도 아재네 갔다가 봉춘이를 만났네. 봉춘이가 내일 자네 보고 화엄사나 항꾸내 놀로 가자고 허더마. 자네헌티 존 일이람서 나보고는 알라 말고 빠지라던디 도대체 나 모르게 뭔 일들을 꾸미는 거여?”
그때서야 석훈은 얼굴빛이 붉어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참말로 수상허네! 봉춘이 그 사람도 절대 안 갤차 주던디, 대체 뭔 일이당가?”
“으응? 암것도 아니네!”
실눈을 뜨고 석훈의 얼굴을 살피던 두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시방 봉춘이 여동생 땜시 글제?”
그때서야 석훈은 안 되겠다 싶은지 실토했다.
“자네도 알았는가? 나 그 집서 첨으로 서엽이 처자를 봤을 때부터 좋았당깨.”
“우리도 진즉에 다 알고 있었네! 암튼 낼 잘해 보소~이!”
그날 저녁 석훈은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이면 서엽이와 가까이서 만난다. 좋다. 아니 두렵다. 만나면 뭘 할까?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였는데 먼동이 텄다. 석훈은 재빨리 행장을 차리고 성불사 뒷산으로 내달렸다. 그날은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달려 아침 해가 환하게 빛날 즈음 구만촌에 닿았다. 보통 날 같으면 바로 대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데 오늘따라 괜히 쭈뼛거리고 오금이 저렸다. 한참을 서성대고 있었더니 마침 봉춘이 나타났다. 봉춘은 석훈을 보고 웃었다.
“왜? 오늘은 들어오기가 좀 꺼끄라븐가?”
석훈은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그리 수줍어서 내가 멍석 깔아줘도 서엽이 마음을 잡을 수 있을랑가 모르겄네.”
“나중 일이사 어찌 되던 간에 우선 쩌그 화엄사 가는 쪽 성황당에 먼저 올라가 있소! 나가 서엽이랑 쫌 있다가 그리로 갈랑깨.”
석훈이 성황당에 와서 기다린지 한참 만에 서엽이와 봉춘이 나타났다. 서엽이 석훈이 쪽으로 다가와서 떡을 내밀었다.
“언능 드시이다! 아침도 안 드시고 오싯쓰껀디.”
봉춘이 끼어들었다.
“그래~! 언능 묵게~! 물도 마시 감서.”
석훈이 인절미를 두어 개 먹고 물도 한 모금 마시고 나자 봉춘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어이! 석훈이! 오늘 나는 남원에 류태홍 접주를 만나러 가야 헝깨 자네가 우리 서엽이 화엄사 구경 좀 시키 주소. 자가 가차이 삼서도 여지껏 화엄사 귀경을 한 본도 못했다고 하도 그래 싸서 나가 덱꼬 갈라고 했는디, 갑자기 일이 생기서 자네를 불렀응깨 잘 덱꼬 댕김서 귀경 잘 허고 오소~이!”
석훈은 당황했다.
“으응?”
“ 놀래기는. 왜~! 싫은가?”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암튼 우리 동생 잘 부탁허네.”
그리고 봉춘은 성황당을 벗어나서 저만큼 달아났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을 때 서엽은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봉춘이 떠나자 석훈은 그제서야 서엽을 봤다. 서엽은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무거운디 이리 주소! 도시락은 내가 들고 갈랑깨.”
서엽은 들고 있던 보자기를 내주었다. 석훈은 보자기를 받아들고 서엽의 차림새를 찬찬히 살폈다. 서엽은 짚신을 신고 있었다. 아마도 봉춘이 오늘은 많이 걸어야 하니 짚신을 신으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붉은 치맛단은 버선발 위에 있어 걷기에 편해 보였다. 노랑 저고리는 한껏 화사하였다. 길게 땋은 머리에 자줏빛 댕기를 매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어서 그런지 더 활달해 보였다. 석훈은 속으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을 하였다.
“저, 저, 서엽이!”
서엽이 석훈이 쪽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석훈이 또 침을 삼키는지 입술에 힘을 주더니 말을 건넸다.
“오늘 나랑 화엄사 가 볼랑가?”
의외로 서엽의 대답은 쉽게 나왔다.
“그래요.”
서엽의 눈에 비친 봄날의 산야는 아름다웠다. 산색은 더없이 푸르렀다. 두 사람 앞으로 난 산길도 시원했다. 산길은 초록빛 연한 잎들을 달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뻗어 있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얼마 만에 동네를 벗어난 나들인가? 도토리나무, 때죽나무, 소나무, 벚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여린 나뭇가지들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길가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많은 들꽃들은 모양도 향기도 다 달랐다. 세상엔 이렇게 다른 꽃들이 많았구나. 사람도 꽃도 모두가 다 다르다는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서엽은 살짝 앞서 걸어가는 유석훈을 봤다. 그는 처음 봤을 때보다 키가 더 커 보였다. 훌쭉한 키에 뚜렷한 얼굴 윤곽선을 지녔다. 오늘 그를 따라가라는 봉춘 오라버니 말이 싫지 않았다. 서엽은 동학하는 오라버니들은 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석훈과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더 좋았다.
산길 모퉁이를 돌자 꽃향기가 풍겼다. 조금 걸어 올라가자 푸른 잎사귀 아래로 하얀 꽃망울이 가득 달린 나무가 보였다. 앞서가던 석훈이 그 나무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서엽이에게 손짓을 했다. 서엽이 머뭇거리자, 자기가 선 자리를 비키며 어서 들어와보라고 했다.
서엽이 나무 아래로 오자 석훈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서엽이! 고개 좀 들어 보소.”
서엽이 목을 뒤로 젖히고 보니 눈앞이 온통 하얀 꽃 천지였다.
“꽃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것 같아요.”
“향기도 좋제?”
“아! 향기도 좋고 꽃도 참 예뻐요.”
“서엽이, 자네도 예쁘네.”
서엽은 잠시 어지러웠다. 꽃향기에 취했는지, 부끄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서엽이, 이 나무 이름이 뭔지 안가?”
“이름이 뭐예요?”
“때죽나무.”
“때죽나무. 꽃은 예쁜데 나무 이름이 이상하네요.”
석훈은 때죽나무 꽃가지를 꺾어서 서엽에게 건네주었다.
“이 꽃이 가을이 되면 땅을 향하여 수많은 열매로 열리는데 그 껍떼기가 중머리 맹키로 회색빛으로 빤질빤질허고 똥굴똥굴헝깨 마치 중들이 떼로 몰려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리 불렀다네. 떼중나무라고. 그 말이 때죽나무로 배낀 거지~!”
“이 꽃에 그런 이상한 이름이 붙었단 게 재미지네요.”
“시방 여그서는 우리가 떼죽꽃에 둘러쌓였는디 이따가 화엄사에 도착하면 거그서는 사람 떼중을 볼 꺼시네. 하하.”
서엽이 때죽나무 하얀 꽃가지를 자기 코에다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오라버니, 이렇게 예쁘고 향기도 좋은 꽃이 떼죽꽃, 떼중꽃이라 그런께 이상해요.”
두 사람은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화엄사가 눈앞에 보였다. 서엽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도시락을 먹고 절구경을 하자고 하였다. 도시락밥은 맛있었다. 화엄사 경내는 웅장했다. 조선 3대 사찰이라더니 절 집 규모가 놀랄 정도였다. 스님들도 많았다. 서엽이 웃었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떼중이네요.”
서엽이 그리 말해 주자 석훈도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었다.
“서엽이, 저기 각황전 앞에 석등이랑 석탑이 보이제? 둘 다 무작허니 오래 되고 엄청시리 신령스럽당깨 저그를 돔서 소원이나 빌어 볼랑가?”
“참, 오라버니는 동학하는 사람이 무슨 말씀이단가요? 지는 한울님을 모시는 주문을 외울라요.”
“아, 그렇지. 서엽이 자네는 동학 낭자지!”
둘이는 함께 웃었다.
각황전을 지나 대웅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자탑이 있었다.
“사자탑도 멋지네요.”
“저 사자탑이랑 비슷한 것이 광양 옥룡사에도 있구마. 옥룡사는 울집서 산 고개 하나만 넘어가면 있는디 그 절도 도선국사가 세운 절이라네.”
“그래요?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네요.”
석훈이 장난끼가 발동하는지 서엽 얼굴 가까이로 바짝 다가왔다.
“서엽이 동학 낭자! 그러다가 떼중 되실라고요?”
서엽이 석훈을 향해 눈을 흘겼다.
“오라버니! 그리 놀릴 거예요?”
“아닌가? 하하”
두 사람은 화엄사 대웅전 뒤편에 있는 암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자로 가는 길옆으로 계곡물이 흘렀다. 청량한 물소리가 잦아드는가싶으니 대숲이 나타났다. 대숲을 지나 구층암에 다다랐다. 구층암 앞에 다 부서진 삼층석탑 하나가 비스듬하게 보였다. 거기를 돌아서니 안마당 쪽을 향해 승방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특이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모과나무였다. 나무 기둥 하나는 툇마루를 뚫고 하늘을 향해 솟아나는 듯하고, 바로 한 칸 옆에 기둥은 반대로 지붕을 뿌리로 받치고 땅 속으로 뻗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두 기둥 다 자연 상태 그대로 다듬지 않아 우둘투둘한 것이 살아있는 나무 같았다. 모과나무를 만져보던 서엽이 얼굴을 돌려 석훈을 봤다.
“오라버니, 이 기둥 좀 봐요? 이거 모과나무지요?”
“응, 맞구마.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여까지 들어와 불태운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받쳤구만. 이 기둥은 몇 백 년은 갈 것이여.”
“모과나무 기둥이 단단하게 보이긴 하네요.”
"비뚤비뚤 못 생긴 나무도 이래 쓰이니 참말로 보기 좋구마. 우리 사람들도 다 쓰임이 있고 귀헌 깨 우리 동학에서 누구나 다 한울님이라 하는 거겄제.“
“오라버니는 인자 모과나무 기둥을 봄서 도통하시는구마요. 하하”
“나는 안직 멀었구마.”
석훈은 서엽이 추켜세우자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덧 해도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석훈은 서둘렀다.
“인자 언능 돌아가세. 여그 오래 있다간 까까머리 중 되겄네.”
“그래요.”
두 사람은 발걸음을 빨리 하면서도 올 때보다 더 정겹게 대화를 나누었다.
“자네도 동학 경전 봤는가?”
“참 나. 오라버니보다 지가 더 많이 경전을 필사했다는 것을 모르시오?”
“아, 그랬는가? 앞으론 나가 자네헌티 동학을 배워야 쓰겄구마이.”
석훈의 말에 서엽은 웃었다.
“오라버니가 저에게 잘 보이면 필사본도 드릴 수 있지요.”
“동학 낭자, 아니 사부님. 오늘 화엄사 안내까지 해 드맀는데 지헌티도 필사본 한 부를 내라 주이다.”
서엽은 깔깔 웃었다.
“글까요. 앞으로 오라버니가 하는 것 봐서 더 많이 필사해 드릴 수도 있고요.”
“예이! 무엇이든 분부만 하옵소서.”
이번엔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두 사람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바쁘게 걸었다. 해는 어느새 제 집을 찾아가 버리고 어둠이 깔릴 즈음 구만촌에 당도하였다. 서엽이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석훈은 돌아섰다. 다시 봉강 석평까지 돌아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서엽의 마음을 얻은 석훈은 몸도 마음도 날아갈듯이 가벼웠다.
석훈과 서엽은 그해 가을 혼인 날짜를 잡았다. 서엽의 아버지 임정연은 석훈을 앞에 앉혀 놓고 당부하였다.
“자넹깨 나가 우리 서엽이를 맡기네. 자네도 한울, 서엽이도 한울잉깨 서로 위해 주고 서로 존중함서 살게나. 살다가 혹 어려븐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한울인 것만 명심허고 서로 애끼 주고 살먼 심든 시절도 지나가고 좋은 날이 올 걸세. 서엽이헌티도 동학을 제복 갤차 놨씅깨 자네 동네 부녀자들 포덕허는 일에도 큰 힘이 될 걸세.”
다음 주 목요일(7월 2일)에는 6장 삼례취회 편이 연재됩니다.
2015/06/18 - [소설/유이혜경] - 섬진강은 흐른다(6회) - 4장 개벽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