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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으로 살펴보는 백범 김구의 삶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5. 28. 10:19

동학으로 살펴보는 백범 김구의 삶

백범 김구, 대한민국 광복의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민족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백범 선생이 살아갈 당시 조선은 큰 변혁의 시기로 열강들의 조선침탈이 한창일 때 였다. 이러한 때에 백범 김구 선생은 동학에 심취하여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는데, 19세에 나이로 선봉장(접주)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에 비판을 받았던 동학을 사칭한 범죄를 엄격하게 다스리고, 군대와 자문받을 인원을 초빙하여 조직을 정비했다. 

<마곡사에 위치한 백범 김구선생 행적지>

백범일지에 따르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을미사변이 있던 1897년 그 해에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군 중위를 죽여버렸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사형집행 전에 고종황제의 명으로 사형집행이 정지되었으며, 이 명을 전한 것이 바로 당시 인천까지 연결되었던 전화였다는 사실(아래 동영상 참고)

참고(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itm3cCG4us

 

 <상해임시정부 시절>

<윤봉길 의시와 백범김구 선생>

하지만 아직까지 사형집행 정지라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백범김구 선생은 탈옥하여, 지금의 공주 마곡사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지금도 마곡사에 가면 백범 김구 선생이 머리를 깍은 자리와 기거했던 숙소가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생겨나자, 자신을 문지기로 써줄 것을 청원하며 임시정부에 합류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때 사람마저 부족했던 상해임시정부를 재건한 인물로, 대외적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진행했는데, 떠나기 전 웃으면서 사진찍자던 이봉창 의사, 백범 김구 선생의 시계가 낡았다며, 자신의 것이 더 좋은 시계이니 바꾸자고 했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 그리고 이들을 떠나보낸 백범 김구 선생, 조국이 광복된 뒤 타국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을 했다. 열악했던 임시정부에 대해 김준엽 선생이 쓴 장정을 보면 전쟁 중 임시정부를 몇 차례 옮기는 것은 기본이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파촉령을 넘어 임시정부까지 왔던 김준엽, 장준하 일행의 환영만찬이 검소했던 점 등을 묘사하는데, 임시정부가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게끔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임시정부를 이끌고, 국민당의 수반 장개석과 협상을 통해 장제스가 한반도의 완전한 독립을 의결하게끔 했다는데서 백범 김구 선생의 외교력은 빛을 발하게 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경교장>

<안두희가 쏜 총탄이 남겨진 창문>

이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맞서 한국광복군을 조직, 중국의 국민당 정부 장개석(장제스), 미국과의 군사협정을 통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진행하지만, 한반도로 군사작전을 진행하기 전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군사행동은 무산이 되었다. 이후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온뒤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조국의 분열을 막기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1949년 6월 26년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총탄에 서거하면서 전 국민의 슬픔 속에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한 생애 바쳤던 백범 김구 선생, 어린 나이에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고, 이후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던 일본군 중위를 처단했으며,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었던 삶,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시작으로 주석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 그 자체였던 백범 선생의 삶에서 사상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 가운데 동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