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한박준혜

은월이(6회) - <우수> 자주의 깃발은 함성이 되어(6)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5. 28. 21:06


우수 (1.14/2.19)

겨울이 지나고 눈은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은 녹아서 물이 된다는 우수가 왔지만 아직 쌀쌀한 바람 끝자락마다 얼음바늘이 꽂혀 있었다. 은월당 마당에 아낙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김석진과 젊은 도인들이 후방을 책임질 아낙들 잔치를 거들고 있었다. 김석진은 묵묵히 화로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가마를 걸어야할 아궁이도 마당에 여러 개 만들었다. 영옥은 은월이 옆으로 다가 자신 있게 말을 했다.

연습 삼아 노상에 부엌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거 보세요, 무거운 가마솥 대신 쇠가죽으로 했습니다.

잘했구나.”

지난 취회 때,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당에 펼쳐진 노상부엌을 보며, 은월은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금객주는 달구지에 잔뜩 음식을 실고 왔다. 영옥은 금객주 앞으로 뛰어갔다. 달구지에는 항아리가 실려 있었다.

어제 다 싣고 왔는데 이게 뭡니까, 금객주?”

잔칫집에 술이 빠져서 되겠느냐?”

영옥은 환히 웃었다.

금객주는 참별거 다 신경 써 주시고.”

영옥이가 알아주니 기분이 하늘을 나는구나. 얼씨구~.”

둘은 마당이 울리게 웃었다. 김석진은 아궁이에 피우다 말고 둘의 모습을 흘긋 바라보다 다시 화로에 불을 붙였다. 은월은 김석진에게 다가가 아궁이에 바람을 불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얼굴 상합니다.”

김접장이 저를 걱정해 주니 고맙습니다.”

김접장은 다시 묵묵하게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김접장, 도인들 사이에서 김접장 부부관계 때문에 걱정이 크던데. 지난 회합 때에 부인이 난동을 부렸다고 들었습니다.”

김석진은 불을 피우는 것을 멈췄다.

마음 상했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봅니다.”

아닙니다.”

김석진은 아궁이 근처에 있는 통나무에 걸터앉았다. 얼굴이 상해 거칠어진 김석진의 얼굴을 안쓰럽게 은월이가 바라봤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무기력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자신의 문제는 제대로 풀지 못하니 말입니다. 관습에 묶여 안과 밖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답답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누구나 다 사연이 있지요.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 저도 용기가 없어, 이리 비겁하게 기생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김석진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은월은 막걸리 한 사발을 내밀었다. 김석진은 단숨에 한 사발을 비워 내더니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릴 적 한 여인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저와 다른 신분이었고, 전 용기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모의 심정은 더욱 강열해졌습니다. 멀리서만 바라볼 뿐 세상과 맞서 그녀를 내 사람을 만들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마저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이 답답했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 감정이 두근거리는 여인의 손도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한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분노했지요. 그러다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존재이고, 타고난 신분이란 허울일 뿐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을 접하고 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미 가문의 굴레, 인습의 울타리 안에서 억지 혼례를 치른 지 오래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만큼이나 아내도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그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김석진은 다시 막걸리잔을 연거푸 비워냈다.

혼례를 치르고, 단 한 번도 합방을 한 적이 없으니. 가여운 사람이지요.”

…….”

허 이거, 민망한 이야기를…….”

털어 내십시오. 그래야만 풀릴 수도 있겠지요.”

은월 접장, 고맙습니다. 도인들은 제 눈치만 보고, 말도 못하는데 이리 물어봐 줘서.”

김석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은월은 막걸리를 따라주며 내쳐 물었다.

어찌할 생각인지요?”

모르겠습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움직이니 아직 수련이 덜 된 것 같아 괴롭습니다.”

은월은 하늘을 바라봤다. 바람에 구름이 찬찬히 움직였다.

바람 따라 가는 구름처럼,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미련이 없도록 말입니다.”

은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낙들이 왔습니다. , 귀한 손님맞이 할 준비를 해야지요.”

아낙들은 은월당 마당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저마다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소쿠리에 담아서 왔다. 어떤 이는 맷돌을 지고 왔다. 전유어나 빈대떡을 부쳐 내는 번철도 들고 왔다.

번철만 가져와서 어쩌나 했는데. 맷돌일세.”

아낙들을 크소리로 웃었다.

전 녹두를 가져왔지요.”

아주 손발이 척척 맞는구려. 얼씨구~”

감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온 이도 있었다.

동학군이 강경젓갈김치 먹다 죽었다는 소리 들어 봤소? 바로 그 젓갈김치요!”

그때 영옥이 끼어들며 자라병을 여러 개를 바닥에 펼쳐놓았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맛 나는 빈대떡에 젓갈김치라 한들 소용없지요.”

아니 그게 뭔데요?”

다들 궁금해서 자라병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영옥은 항아리 뚜껑을 열면서 큰소리를 쳤다.

술입니다!”

마당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낙들은 저마다 배를 잡고 웃었다. 이때 김석순은 개나리소반 여러 개를 지게에 지고 왔다. 그를 뒤따라 여러 명이 지게에 개나리소반을 지고 들어섰다.

바닥에 놓고, 음식을 먹을 수 없지요. 귀하신 분들이 오셨는데 은장식이 붙은 호족반은 아니어도 상은 있어야지요.”

저런 멋진 사내가 어디 또 있을까?”

김석순의 마음 씀씀이에 사람들은 저마다 아우성을 쳤다.

노상부엌의 의미를 김석준은 알고 있었다. 밥이 곧 생명이기에, 생명을 책임지는 아낙들을과 전방에서 싸우는 사내들과 한 호흡이 되어야 진정한 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김석진은 알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얼추 채비를 마치고 개나리소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영옥은 아낙들과 어울려 후방에서의 경험담을 무용담처럼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낙들은 제각기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논산평야와 금강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우린 복 받았지.”

아낙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맞아 맞아!”

옷과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길목마다 우물이 있는 마을 어귀에 노상부엌을 만들어야겠어요.”

떡을 만들면 어때요? 배도 채우고 간편하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루떡이 좋겠네요.”

사람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영옥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했다.

떡이면 정말 많은 수도 거뜬하겠어요. 간편히 만들 수 있는 떡에 무엇을 넣으면 좋을까요?”

이때, 사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주변에 쑥이나 약초들을 준비하겠습니다.”

영옥은 김석진을 바라봤다. 김석진도 영옥을 바라봤다.

아낙들은 김석진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인물도 훤칠한데, 아낙 일도 잘 알고. 까르르.”

아까 개나리소반 날랐던 양반 아니야?”

아이고, 누구랑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편네 복 터졌네!”

다시, 마당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마당에 가득했다. 다행히 아무도 영옥이와 김석진이 둘 다 붉어진 얼굴을 알아채지 못했다.

은월이는 대청마루에서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금객주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고부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답니다.”

어찌 되고 있답니까?”

만 명이 넘었고, 관아를 점령했는데 조병갑은 놓쳤지만 관군들은 죄 도망치고, 고부 일대는 농민군 천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은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불씨가 조만간 퍼지겠군요.”

고부로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서 동향을 파악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2015/05/27 - [소설/한박준혜] - 은월이 (7) - 한박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