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경상도편

경상도 동학(2회) - 정나구, 양반과 손을 잡고 거사를 준비하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7. 06:00

 

 

(처자식을 멀리 피난시킨 정나구는 본격적인 거사준비를 시작하는데, 장터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정나구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였지만 한 가지 생각은 버릴 수가 없었다.


 ‘도치하고 도치 오마이는 어데 깊은 데 산속에 드가서 죽음을 피해야 되여. 나는 죽어도 괘않치마 식구들은 살리야지.’


정나구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창고에 보관해 놓은 씨앗들을 꺼내서 도치에게 짐을 지워 주었다. 그리고 남은 보리쌀 두어 되를 보따리에서 싸서 아내에게 지워주고 마을을 떠나라고 했다. 부부는 이렇게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만나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졌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우리 식구 셋이 함께 사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듭니까. 어찌 우리 식구들을 이리 갈라놓습니까. 그러나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도치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부부가 다르지 않았다.


정나구는 울고불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도치를 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부지는 안 죽는대이. 꼭 살아서 니랑 니 어무이를 찾아 갈끼다. 지금 빨리 안 떠나마 모두 죽는대이. 도치야. 그 때까지 아부지 대신 니 어무이 잘 살펴주그래이. 알긋제? 아부지가 꼭 찾아갈끼다. 꼭! 뒤도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그라.”


혼자 남은 정나구가 뜨거운 눈물을 닦고 있는 동안 뒷마을에 사는 을식이가 밤새 걸어서 두 모자를 화전민촌에 데려다 주고 왔다.

정나구는 허리를 세울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되자마자 동네를 기어 다니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일 모레가 장날이라요. 장에 나가입시다.”


 “입에 풀칠도 모하는데 머 살끼 있다고.”


동네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말을 했다.


 “이르케 살아야 됩니까? 모이야 방법이 나옵니다. 온 백성들이 다 모인다캅니다. 장에 가입시다.”


오복이는 오가작통으로 세금을 걷어 들이는 관의 방법 그대로 다섯 가구 단위로 장날 모인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이번 장날 장터 포목전 감나무 아래에서 좋은 모임이 있다카네요. 모두 장에 가입시더.”


나구가 오가구의 대표들에게 은밀하게 소식을 띄우고 다니자 골목마다 사람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장에 먼 일이 있는가 함 나가볼라고. 진주서 민란이 나가 부사를 죽이가지고 뭐 어쨌다카던데 , 우리도 여게서 하루 걸러 매질을 해댕께, 그 놈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보라? 우리 상주 사람들도 부사를 죽일라 칼라나? 나는 그기 궁금해가지고 장에 가 볼라고.”


 “나도 그 소식이 디기 궁금하여. 근데 말이라. 우선 씨를 뿌리놔야 가을에 거둘 기 있지. 농사를 안짓고 어떻게 밖에 나가여?”


 “농사 지만 뭐하거러? 먹을 게 남아야지”



정나구는 힘이 났다. 일단 사람들이 장터로 몰려들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다니는데 몇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나? 왜 여기 모여들 있어?”


 “소식 안 들었나? 우리들이 결가랑 동포를 안냉께 세금 거둘라고 새로운 관리를 보낸대여. 그 사람이 오만, 일일이 다 찾아댕기미니서 세금을 거두고 만약 안내만, 안 낸사람은 잡아간다카네.”


이웃마을에 사는 늙수구레한 사내는 나구에게 격의 없이 이곳저곳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나구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우리도 진주처럼 무슨 수작이 나야지. 이러다간 집안에 남은 씨앗톨 하나도 다 빼앗기게 생깄어.”


나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들에게도 일렀다.


 “그러지 말고 내일 모레가 장날인께 장터로 가 보입시대이. 그라만 소식을 잘 알게 될끼라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터로 사람을 모이게 하는 일은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나구는 종이를 가지고 다니며 슬슬 동네마다 대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았다. 오복이도 이름을 모아다 나구에 갖다 주었다. 나구는 힘을 얻었다. 이젠 앞에 나서서 함께 이 일을 해나갈 사람을 구할 참이었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 중에 일을 함께 할만한 사람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드디어 장날이 왔다. 한 무더기 사람들이 장터를 향해 걸어갔다. 정나구도 묵묵히 장터로 따라 걸어갔다. 들판에는 종달새가 지저귀고 온 산야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졌다. 길가에 널브러진 쑥과 미나리도 봄기운을 돋우었지만 누구 하나 신명이 나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걱정반 근심반 호기심반으로 사람들은 장터에 도착했다. 장터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장안의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다. 정나구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포목전으로 향했다. 포목전에는 상주에서 나온 면화와 무명이 반지르하게 진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이은 흉년으로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고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포목전 앞의 넓은 장터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모여서 소식을 전했다. 


 “선무사를 파견한대여. 그 사람이 와서 결가문제를 해결한다카는데 예천이나 성주에서도 우리고을처럼 결가를 가지고 말이 많다여.”


 “그키나 결가를 많이 내라카만, 몇 사람이 내겠어? 내빼라는 말하고 같지.”


정나구가 얼핏 살펴보아도 모인 사람들은 얼추 백여 명이 넘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분노에 차서 웅성거릴 뿐 조직적인 항의는 아니었다. 포졸들이 장터를 돌면서 농민들의 동정을 살폈다. 정나구는 입안이 바싹 탔다. 이럴 때 누군가 나타나서 한 마디면 하면 금방이라도 모두들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구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까웠다. 말도 잘 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선동을 해야 할 것이다. 분위기를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 분간이 서지 않아서 안절부절하며 눈에 띄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의 무더기 속을 어슬렁거리며 동정을 살폈다. 누군가 앞에 나설 사람이 보이면 추켜 세워주고 싶었다. 포목전 앞에 모여 있던 사람 중에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정나구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카고 있을기 아니라 우리도 모입시더. 누군가 중심이 되어야 일이 될 거라요. 한데 모이서 의견을 모으도록 하입시더.”


 그러자 사람들이 우시장으로 몰려갔다. 우시장은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다.





 “누가 앞에 나서서 일을 끌어가야 하는기 아니라요?”


구렛나루가 덥수룩한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정나구의 눈에 또다시 핏발이 섰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다.


 “우리 이래 당하고 있지 말고 대책을 맹가 봅시대이. 결가를 높이마 농사를 지어도 남아나는 것이 엄꼬, 지금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할 때지만도 도통 일할 기분이 나야 말이지. 어떻게 할 껀지 말들 좀 해바여. 여러분은 우예 생각하나요?”


정나구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이래가지고는 몬살아여. 뭔 수를 냅시다.”


 “모이서 관아로 가야지.”


정나구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충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그러나 관아로 들어가려면 오백 명 정도는 모여야 포졸들의 눈이 동그래질 것이다. 정나구는 사람들에게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태 세금때메 관아에 가서 곤장을 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요. 나도 며칠 전에 혼쭐이 났어요. 그런데 선무사가 파견이 되마 더 심해질 거라요. 죽어 나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수도 있다케요. 사람 목숨이 파리만도 못하게 되었다고요. 그러니 뭉쳐야 살 수 있을 거라요. 다음 장날에는 이웃들을 딜고 나오시봐요. 이 정도 갖고는 관아에 갈 수 없을기라요. 그라고 협상을 할 내용도 맹글라야 됩니대이.”


 “와아, 좋소.”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정나구는 대중들이 자기의 말을 들어준 것이 너무 기뻤다.  자가 스스로가 마치 중요한 사람이 되어 아주 큰 중대사를 처리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정도로는 안 되니 다음 장날에 여 모이 가지고 제대로 의논들을 해 보입시대이. 마캉 자기 궁리한 거를 갖고 나오시야 돼요.”


 사람들은 나구의 말에 또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구는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었다. 농민들의 가슴 속에 분노의 불씨가 댕겨지기 시작했다. 나구는 그 불씨를 어떻게 타오르게 할까 생각했다.


우선은 마을별로 대표가 있어야 했다. 정나구는 종이에 쓴 이름을 살펴보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기별을 하기로 했다. 다음 장날에는 최대한의 인원을 모아야 할 것이다.  나구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큰 목소리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상주 관아는 우리가 빌려다 쓰도 않은 환곡 사만 섬의 이자를 우리더라 내라캅니다. 거다가 지난해부터 결가가 터무니없이 높아졌습니대이. 가을에 곡식을 거다도 세금 띠고 나만 먹을 기 남지를 않고요. 우리는 죽을 일만 남은 깁니다.”


 “가입시대이, 모두 모이가 관아로 가입시대이!”


 누군가가 강단 있는 소리로 외쳐댔다.


 “사람이 이래 적어가지고는 택도 없습니대이. 사람들을 더 모이가이고 장날마다 여서 계획을 짜가 상주성으로 쳐들어 가입시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이래만 안 됩니다. 비밀로 모이야지 이래 모있다가는 당장 포졸들이 달려올 낍니다.”


 작은 눈을 반짝이며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군중 밖으로 나왔다. 


 “우리 농민들이 마이 모이만 문제가 될 끼 없습니다. 우선은 뜻을 모다야 됩니다. 오늘 동네 드가시만, 이 뜻을 사방에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대이.”


 정나구는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 사람을 잡아야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있었다. 평민은 아닌 듯싶었으나 양반이 왜 이런 일에 나서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나구는 잠자코 뒤에 서서 그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뭉치야 일을 할 수 있습니대이. 열심히 일한 대가를 말캉 관리들이 세금으로 빼사 가는데 앉아서 굶어 죽어서는 안될낍니다. 우리만 이러는 게 아니라 벌써 진주에서 단성에서, 그라고 전국에서 농민들이 인났다 캅니다. 우리 고을에서도 이제 인날 때가 됐습니대이.”


 “우우우!”


 분노에 찬 농민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었다. 이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금을 내지 못했다고 관에서 닦달을 당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었다. 닦달을 당하느니 차라리 관아에 쳐들어가서 모두 들러 엎고 백성들의 저항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일에 누군가 아주 강렬하게 자신들을 이끌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정나구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에 가서 섰다. 한참 핏대를 올리며 말을 하던 그가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정나구를 발견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데서 온 누구라요?


정나구는 자신을 소개했다.


 “공동면에서 온 정나구라고 합니대이. 이 많은 문제를 풀라마 누군가 앞장을 서야 할 거 아니라요?”


 “나는 김일복이라고 합니다. 결가를 과하게 거다가는 거는 나도 옳다고 생각 안 해요.”


정나구는 김일복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느리면서 힘이 있는 목소리가 예사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르신은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양반이 왜 이런 일에 나서는 거라요?”


정나구가 저돌적으로 김일복에게 물었다. 김일복은 당황한 표정으로 정나구를 바라보았다. 칼로 그은 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오똑 솟은 코, 얇은 입술을 가진 정나구는 날렵한 짐승처럼 위험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달아들어 물 것 같은 인상이었다. 김일복은 긴장을 풀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양반이라요. 몇 번 과거를 보러 갔어도 뜻을 이루지 몬하고 지금은 농사만 지요. 양반이라캐도 결가를 피해갈 순 없어요. 우리한테 부과된 세금은 모두 종들이나 소작을 주는 사람들한테 넴겨야 하니 이중으로 마음이 아플 뿐이라요. 오래 전부터도 이거는 양반이나 평민을 떠나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등요. 누군가는 바로 잡아야 할 일입니대이. 온 나라 농민들이 관리와 양반들이 부리는 횡포에 녹아나고 있어요. 여기에서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거라요.”


김일복은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정나구를 향해 자신의 뜻을 말했다. 정나구는 김일복에게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저는 별로 아는 게 없으니 어르신이 도와주시야 되겠습니대이. 우쨌든동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요?”


 김일복이 정나구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씨만 질러 놓고요, 일단 계획을 짜야 할 거라요. 이 불씨가 꺼지지 전에 일을 도모해야 하거등요.”


 김일복이 다시 굵은 목소리로 대중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모두 드가시고 다음 장날에는 사람들이 더 마이 나오시도록 해주세요. 그캐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대이.”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정나구는 김일복을 따라서 재빨리 무리를 빠져 나갔다. 김일복은 정나구를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마침 선무사 이참현이 온다카이 그 사람과 담판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요.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고서는 일을 망칠 수도 있어요.”


 김일복은 결가 열냥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했다. 정나구는 그가 양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입장의 차이가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결가만 해당되는 기 아이고 군포도 줄가야 되고 4만석 환곡 이자도 없애뿌리야 안 되까요?


 “그래요. 평민들에게는 군포도 징수하고 환곡의 이자도 내야 한다고 하니 마이 더 힘들겠네요. 그렇다고 양반이라고 부담이 적은 것은 아니라요. 나같이 농사만 짓는 양반에게도 결가는 거다가고 있어요”


 김일복이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정나구는 김일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번 참에 관리들에게 보복을 하고 싶었다. 진주 민란의 소식은 그에게 묵었던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에 몸을 떨게 한 것이다.


 “우리가 모이서 암만 항의를 해도 세금을 아주 없애진 못할 겁니대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요구를 하고 요구가 안 받아들여지면 조정을 해야 될끼라요.”


 김일복은 차분한 목소리로 정나구에게 선무사와 협상할 것을 만들자고 하였다. 정나구는 그가 몰락양반치고는 잘난 체를 하지 않는 게 맘에 들었지만 양반은 양반인지라 다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할 처지인지라 그의 뜻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어르신, 그럼 다음 번 장날엔 결가를 어떻게 정할지, 환곡의 이자는 어느 정도 갚아야 할지 우리가 먼저 정하는 게 어땔까요? 그리고 선무사를 만나도 될낀대요.”


 “그러지요, 우리들이 먼저 의견을 결정하고 나서 선무사와 담판을 져야지, 선무사가 한 대로 따라가서는 오히려 이용만 당할거라요.”


정나구의 눈빛이 다시 빛을 발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 솟아올랐다. 김일복이 함께 해주겠다고 하니 이제 동네마다 찾아다니며 뜻을 함께 해줄 사람을 설득해 가리라 다짐을 했다.


김일복은 잘 익은 농주를 내 왔다. 그리고 봄햇살이 기우는 마루에서 정나구에게 봄상추 겉절이를 안주로 술잔을 건넸다. 정나구는 김일복에게 감동해서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삼정의 문란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조정에서 제 역할을 몬하고 있으이 관리들은 마캉 백성의 고혈을 빨아 먹느라 혈안이 되가 있고. 죽어 나가는 거는 백성인데 이제 더 이상 참을 힘도 없는 것 같네요. 여기저기에서 몬살겠다고 아우성 치지만도 조정에서는 그거를 막을 방도도 없는 거 겉애요.”


김일복은 이글이글 눈빛이 타오르는 정나구를 바라보며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 역시 나구가 편하진 않았다. 천성적으로 반골기색을 타고난 외모였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찢어진 두 눈은 매우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백성들의 삶이 팍팍하여 분노가 이글거릴 때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강단 있는 사람이 더 귀하게 쓰일 수도 있는 법이다.


 “어르신은 부농이신데 머할라고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시나요? 다른 양반들은 먹고 살만하만 우리 같은 농군들을 무시하고 우째만 세금을 안 내고 피할까만 궁리하던데요.”


정나구는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다 망한 집 양반이 무슨 권세가 있다고 백성들을 괴롭히겠어요? 선비란 자고로 책이나 읽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도리라고 알고 있을 뿐이지여. 나야 선비 축에도 몬 들어요. 머 책은 째매만치 읽었지만도...”


 김일복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향리에서는 공부깨나 한 사람이었지만 과거에 뽑히지 않는 한 쓸모가 없는 학문이었다. 유난히 드센 유학자들이 모여서 파를 형성하고 있는 상주의 분위기에서는 백성이 다 죽어나간다손 누구 한 사람 나설 양반은 없었다.


 “전답에 물린 세금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누가 가지고 간지도 모르는 환곡을 이자하고 원금까지 합해가지고 백성들한테 거다간다고 카니 이기 말이나 됩니까? 군포까지 겹쳐서 백성들은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고 삼베를 짜도 남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죽어라 일하고도 먹을 기 없어 굶어 죽을 판인 사람들이 천지삐깔잉께, 사람이 이래 죽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요.”


정나구는 말을 마치고 나서 농주 한 사발을 벌꺽 들이키고 턱에 묻은 술 찌꺼기를 한 손을 쓰윽 닦아 내렸다. 이어서 김일복에 물었다.


 “우째만 좋겠어요?”


 김일복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더니 수염을 쓸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새삼 결기가 서렸다.


 “우선은 사람들을 모다야죠. 장날 모이라 켔으이, 사람들을 모다 놓고 세금을 줄구거나 없애는 방법을 생각해야 될끼라요."


 정나구는 종이를 꺼내어 펴서 동네 대표자들의 이름을 보여 주었다.


 “이 사람들한테 모다 허락을 받았다고요? 언제 이런 거를...”


 동네마다 적힌 명단을 보며 김일복은 의심과 감탄이 섞인 눈길로 정나구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나선 사람들이라요. 제가 지난 장날 만나서 확실하니 답을 받았고 장에 안 왔던 사람은 여 저 찾아다니매 생각을 물었지요.”


 정나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표자가 데리올 사람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캐도 나중 일을 생각해서 그 명단은 비밀로 해야 합니대이. 남기지 말고 태워삐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라요.”


 김일복은 누가 보고 있는 듯 이리저리 살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건 아직 별 의미가 없는 이름인데요. 이 사람들이 관아로 쳐들어가자캐도 함께 나서 줄지는 모르는 일이고요. 단지 동네 사람들한테 이러이러하다고 연락을 해주겠다 카는 그런 깁니다.”


 김일복은 여전히 걱정이 많은 얼굴빛을 띠며 나구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마 누군가 대표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요, 농민들이 모여서 세금을 줄가달라고 요구할 때 앞에서 이끌 사람은 우리가 정해야 해요. 우왕좌왕했다가는 낭패가 될 거라요.”


 “그야 우선 어르신과 제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날이 되기 전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다시 모이가지고 의논을 해알 것 같습니대이.”


 정나구는 술잔을 내려놓고 주먹을 굳게 쥐고 있었다. 굳게 닫힌 그의 입술에서 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관에서 당한 수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제꼈다.


 “만일을 모르니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비밀로 하입시다.”


 김일복은 정나구에게 다짐을 받고자 했다. 그러자 정나구가 야무지게 대꾸를 했다.


 “사사로운 일로 큰일을 망쳐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만난 것은 숨소리 한나도 밖으로 내 보내지 않을끼라요. 다만 서로 뜻이 달라서 배반을 하게 된다카마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여 머. 그럴 일은 없어야 할 거라요.”


정나구와 김일복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실패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둘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나약하게 엎드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주 일요일에 3장, 타오르는 불이 계속됩니다.)

 

2015/05/31 - [소설/경상도편] - 경상도 동학(1회) - 정다구의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