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5회) -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1. 11:29

 

 

어서 오시오. 접주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윤범식이 이인한의 짐보따리를 받아 들며 반가운 기색을 했다. 그의 곁에는 눈썹이 까만 소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범식이 소년에게 손짓을 했다. 소년이 나루터에서 큰 절을 올렸다.

성도라고 합니다. 멀리서 어르신을 자주 보았습니다.”

몇 살이냐?”

설을 쇠었으니 이제 열여섯이옵니다.”

이인한은 볼에 발그레한 빛이 흐르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강한 눈빛이 소년에게도 담겨 있었다.

집으로 드시지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윤범식이 이인한을 안내하며 총총히 마을 길로 들어갔다. 포구에는 풍어제를 준비하는 뱃전에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은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슬슬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고기잡이를 시작해야 하는 철이었다. 날씨가 온화한 탓에 먼 바다에 나가면 아직도 고기들이 그물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런 날엔 꼭 찾아오는 손님이 있답니다. 알고 계시죠?”

윤범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인한에게 물었다. 이인한이 포구를 둘러 보며 턱을 쓸었다. 섬은 얕으마한 구릉으로 이뤄져서 여기저기에 망아지들이 뛰어 다녔다. 반지르하게 빛을 내는 상록수 잎새들은 망아지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인한과 일행은 동백숲이 빽빽하게 들어찬 마을길로 걸어갔다.

아직 한겨울이나 빼앗아 갈 것도 없는데 이런 날에 뭘 얻겠다고 나타난단 말이오?”

이인한이 섬마을 곳곳에 메여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이야 먹을 것이 있건 말건 그게 상관이 아니죠. 우선 창칼을 들이밀며 죽이겠다고 윽박을 지르면 백성들이야 무엇이건 내 놓게 되어 있어요. 애써 숨겨 놓은 제수들을 꺼내서 풍어제를 지내려고 조심조심 벼르고 있건만 아마 풍어제가 시작되기도 전에 수군들이 나타나서 제상을 엎을 것입니다.”

윤범식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각오가 들어 있었다. 이인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윤범식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늘 밤에는 무슨 대책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이렇게 당할 수만 없다고 해서 이미 입교식을 마친 도인들을 중심으로 작전을 짜 놓았습니다.”

허어, 그거 아주 궁금한 일이구려. 살짝 귀뜸좀 해 주시구려.”

그러나 윤범식은 입가에 굵은 주름살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다만 커다란 눈망울에는 뭔가 특별한 각오가 들어 있었다. 바다는 아주 맑았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잔바람이 나무 가지들을 들썩이는 숲을 지나서 골목으로 들어서며 이인한이 성도에게 물었다.

글공부가 좋으냐 바닷일이 좋으냐?”

성도는 마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바람이 나서 대답을 했다.

저는 글공부 하는 것은 싫습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요. 대신 바다에 나가면 갯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으니 공부하는 것보다 재미가 넘칩니다. 고기도 잡고 고동도 잡고 미역도 따고 파래도 뜯고.”

성도는 손가락을 세며 바닷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접주님 저는 노도 잘 젓습니다. 웬만한 배는 혼자서도 거뜬히 먼 바다로 몰고 나갈 수 있답니다. 저는 뱃사공이 될 거에요.”

이인한은 윤성도의 이야기를 들으며 껄껄 웃었다.

아니, 왜 뱃사공이 되고 싶니?”

뱃사공은 오가는 사람들의 사연도 많이 들을 수 있으니 심심하진 않을 것 아니에요?”

윤범식이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뱃사람이 잡은 것은 모두 수군들 차지니 무엇을 한들 남아나는게 있겠소.”

성도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표정을 바꾸며 아버지와 이인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미 삼아 아들에게 노 젓는 법을 가르쳤더니 아예 바다에서 살려고 합니다.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는 모두 수군들에게 빼앗기면서도 성도는 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해서 탈이지요.”

윤성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바다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 저기 보세요. 수군들의 배가 오고 있어요.”

회진 포구 쪽에서 관군의 깃발을 달고 긴 돛을 풀어헤지고 덕도 쪽으로 물보라를 헤치며 다가오는 배들이 보였다.

오늘은 먹잇감이 많아서 한 척이 아니고 세 척이나 오는구나.”

윤범식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성도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수군들의 배를 향해 주먹질을 해댔다.

보름달이 떠오를 즈음엔 한바탕 진한 굿이 벌어질 것 같군요.”

윤범식이 싸늘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들려 주었다. 이인한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몹시 궁금했지만 왠지 석연치 않는 윤범식의 표정을 보며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저들은 함부로 건들었다가는 오히려 피해가 막심할 텐데 대책은 마련해 뒀나요?”

이인한이 조심스럽게 묻자 윤범식이 싸늘하게 웃었다. 윤성도도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 입을 꼭 다물고 두 사람의 표정만 살피었다.

쥐도새도 모르게 우리가 빼앗긴 것을 되찾아 올 겁니다. 미리 작전을 짜 두었지요. 저들이 빠져 나갈 즈음에 물살을 막고 배들이 포구로 들어서게 한 후 포위를 할 참입니다. 섬 구석구석에 배를 숨겨 놓았어요. 꽹과리 소리가 한번 들리면 그 배들이 저 수군들의 배를 포위하는 것이지요.”

이인한의 손에 땀이 배였다.

수군들은 서로 연락망이 잘 짜여져 있을텐데 구원을 요청하면 어떻게 할 테요?”

그럼 정면으로 한판 붙는거지요.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빼앗길 것은 모두 빼앗겼으니 이판사판이지요.”

윤범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만 윤성도의 눈썹이 꿈틀꿈틀 흔들거렸다. 이인한은 짧게 심고를 올린 다음에 짙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며 말꼬리를 돌렸다.

오늘 밤에 입교식을 치를 분들은 몇분이나 되나요? 노력도에서 오겠다고 기별을 보내왔던데.”

윤범식이 턱을 쓰며 가만히 읊조렸다.

명절 때 처가에 가서 포덕을 했습니다. 두 명이 배를 타고 넘어 온다고 했으니 풍어제가 끝날 즈음에 저희 집 마당에서 입교식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도 입교식을 치르겠습니다.”

성도가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을 잡으며 이인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도인이 되어서 더 이상 바다에서 수군들이 우리가 잡은 것을 빼앗아 가는 일이 없도록 싸우겠습니다. 하늘님이 주신 세상은 백성들이 제 먹을 것을 빼앗기지 않는 세상이옵니다.”

윤범식이 두루마기 자락을 잡고 있는 아들의 손을 빼내며 조용히 타일렀다.

넌 아직 어리니 어른들이 하는 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거라.”

그러나 윤성도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윤성도는 이인한을 바라보며 외쳤다.

 

 

2015/05/25 - [소설/명금혜정] -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5) -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