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월이(7회) -<경칩> 제삿날 윤지영은 살을 깎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경칩 (음2.8/양3.5)
언땅을 비집고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싹을 틔웠다. 그들의 생명력으로, 날이 따뜻해지고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먹이를 찾아 나서는 산짐승들도 완연 생기가 돌았다. 어느새 겨울잠을 끝낸 동물들도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은월당도 분주해졌다. 봄볕이 따사롭게 마당을 내리쬐었다. 대청마루에는 붉은 천이 곱게 펼쳐져 있었다. 영옥은 붉은 천에 금색실로 수를 놓고 있었다. 은월이는 마당을 항상 종종 걸음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전주댁을 눈으로 찾았다.
“영옥아. 어머니가 보이 않는구나. 어디 아픈 거냐?”
“볼일이 있다며 일찍 나가셨습니다.”
“무슨 일?”
“글쎄요….”
영옥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자주색 깃발을 들며, 들뜬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은월 접장! 이 깃발에 수놓은 것 어때요? 힘차게 쭉 뻗어 보이나요? 김석진 접장이 맘에 들어 해야 하는데….”
영옥은 무심코 김석진 이름을 말해 놓고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충의접을 말한다는 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은월은 영옥을 바라봤다. 전주댁이 어디 갔는지 관심 없는 채 깃발에 정신이 팔린 천진난만한 영옥이었다. 대문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때에야 비로소 영옥은 수놓는 일을 멈추고 은월을 바라봤다.
“어디 가시게요? 참, 오늘 연산에 중요한 언약이 있으셨다고 하셨지요?”
은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가 기다리는 대문 밖까지 영옥은 따라 나섰다. 흰말에 올라탄 은월은 모습은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장군처럼 늠름했다.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은월은 고삐를 힘껏 잡아 당겼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자신에 넘친 영옥을 보면서 은월도 웃음으로 답했다. 은월은 백마를 타고 연산으로 떠났다. 연산으로 가는 내내 은월은 집밖을 잘 나가지 않는 전주댁이 아침부터 말도 없이 일 보러 나간 것이 신경이 쓰였다. 전주댁 생각에 몰두하다 노성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
“아차, 내가 정신을 놓았구나!”
노성현에 막 들어서는데 주막에서 술을 잔뜩 먹은 윤지영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일어서는 모습이 은월이 눈에 들어왔다. 윤지영은 비틀거리며 몹시 화난 얼굴로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윤지영을 유심히 보던 은월은 눈이 커졌다. 윤지영 한손에 식칼을 들려 있었다. 은월은 말에서 급히 내렸다. 은월은 윤지영을 따라갔다. 윤지영의 씩씩거리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서 도끼눈을 하고 있었다. 윤지영은 눈을 부릅뜨면 흰자위가 검은 눈동자를 덮는 특이한 눈을 가졌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가 그런 눈을 했다고 하니 눈만으로도 웬만한 상대는 제압할 수 있었다. 눈썹도 진하고 버들잎처럼 가늘고 길게 생겼는데 눈을 지나 위엄 있게 뻗어있었다. 코도 쓸개주머니를 들고 있는 것처럼 끝이 뭉툭하고 콧구멍도 덮여 보이지 않는 묵중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런 코는 재상들이 이런 코가 많다고 했다. 이를테면 윤지영은 당상관 벼슬아치가 될 관상을 가졌다. 윤지영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간 곳은 바로 윤씨 종가집 사당이었다. 윤지영은 홍문 앞에 멈춰 섰다. 은월은 사당 앞에 아름드리 소나무 둥치에 몸을 의지해 숨기고 윤지영을 지켜봤다.
“쾅! 쾅!”
윤지영은 식칼로 홍문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를 쳤다.
“이 가문의 씨 윤지영이입니다!”
제사를 지내던 윤씨 가문 어른 십수 명이 일제히 소리나는 곳을 바라봤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저, 저런 것이 어찌….”
“쯧쯧….”
“저, 저 근본도 없는 것이….”
윤지영은 히죽 웃으면서 성큼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종친 어르신 윤지영 절 좀 받으십시오.”
제사를 지내려는 종친들 앞에서 덥석 큰절을 하고 엎드렸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윤지영이 때문에 조용했던 사당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험한 말들이 터져 나왔다. 윤씨 종손은 윤지영을 날카롭게 바보며 호통을 쳤다. 윤지영은 눈꼬리를 치켜들면서 식칼을 번쩍 하늘로 높이 쳐들었다. 욕하던 종친들이 화들짝 놀라 순간 숨을 죽이며 윤지영을 바라봤다. 윤지영은 더 큰 소리를 쳤다.
“살은 남의 살이지만 뼈는 윤씨네 뼈이니 살을 깎겠습니다! 이놈의 살을 다 베어낼 테니, 저도 제사에 참여하게 해 주십시오! 하늘같으신 윤씨 양반님들!”
윤지영은 팔을 걷어붙이고, 재빠르게 식칼로 자신의 팔뚝 살에 칼을 밀어 넣었다. 땅바닥에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팔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면서 굵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종친들은 귀신을 본 듯 뒷걸음질을 하더니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나 종손 윤대감이 매서운 눈으로 윤지영을 쏘아 보았다. 윤대감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걸어와 윤지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근본도 없는 것이! 족보에 올린 것으로 만족할 것이지 천출 서자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놈을 밖으로 내쳐라!”
피범벅이 된, 윤지영은 윤대감 다리를 휘어잡고 통곡하였다.
윤지영은 사당 밖으로 내쳐졌다. 홍문 앞에서 윤지영은 울부짖으며 괴성을 질렀다.
“악-악- 난, 태어난 죄밖에 없단 말이야! 악-악”
윤지영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은월은 윤지영한테 달려갔다. 그리고 속치마를 찢어 살점이 베어진 팔을 동여맸다. 사당 뒤편으로 간 은월은 엽전을 건네며 윤대감 하인에게 부탁을 했다. 난감해하면서도 엽전을 받아 든 하인 둘이 은월을 도와 윤지영을 말에 태웠다. 은월은 박영채 집으로 향했다. 박영채 집에 있던 도인들은한바탕 난리가 났다. 은월이도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사람은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서 방으로 옮겨주십시오. 어서 의원을 불러 주세요.”
2015/05/28 - [소설/한박준혜] - 은월 (8) - 한박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