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5회) - 1장 1891년 공주(3)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5. 07:00

 

1장 1891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부인이 이불을 동이의 어깨까지 올려 덮으며 다독였다.

“오늘은 뭘 좀 먹었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주인어른의 목소리가 동이의 등 뒤에서 들렸다.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 쉬자 동이의 얼어붙었던 가슴에 조그만 균열이 생겼다.

“어서 기운을 차려서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곧 일어날 겁니다.”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말소리에 확신이 묻어났다.

“손님들은 가셨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안에서 소란스러웠겠군요. 이 아이가 놀라지 않았는지 걱정이네요.”

둘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해월 선생께 그리 호되게 꾸지람을 들으셨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니…. 영감이 난처 하셨겠어요.”

“태인의 접장들이 저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해월 선생님이 타이를 때는 그쯤에서 수긍할 줄 알았는데…. 태인 접장들의 서운한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아무리 양반이니 상것이니 하는 신분 차별을 없애는 것이 우리 도라고는 하나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고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변하겠습니까? 해월 선생께 한꺼번에 몰려가 항의를 하니 진노가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저렇게 크게 화를 내신 적이 없으시니 다들 당황했지요.”

영감은 법헌 어른의 결정에 서운하지 않으셨어요?”

부인의 넌지시 묻는 말에는 비난이나 의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사람인데 왜 서운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스승님의 큰 뜻을 아는데 어찌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스승님을 모신 지가 10년이 넘었어요.”

주인이 흔들림 없이 대답하자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동이는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답답하여 벌떡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의령이가 죽었는데 무슨 영화가 남았겠습니까? 자식이 죽었는데 그까짓 것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주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누워 있는 동이를 향해 신음처럼 내뱉었다.

“얘야, 이제 그만 일어 나거라. 산목숨을 억지로 끊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네가 억지로 끊으려는 목숨은 살고 싶어서 몸부림 쳤던 내 딸아이의 목숨과 같은 것이니까. 제발 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일어나서 뭣 좀 먹자꾸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동이는 한순간 서러움이 가슴속 밑바닥부터 차올랐다. 그녀의 온몸이 서서히 떨렸다. 그리고는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게다가 애지중지하던 딸을 잃어버린 분들의 보살핌을 받는 마음이 미안하면서도 따스해서 그녀는 더 이상 등을 돌릴 수가 없다.

부인이 울음을 터트리는 동이를 일으켜 가슴에 안았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따스한 품속을 파고들며 서럽고 외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동이는 한참동안 부인에게 안겨 서러운 울음을 토해낸 후 까무러치듯 정신을 잃었다.

 

이마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투박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에 기분이 좋아 잠에서 깨어났다.

“얘야, 잠시만 내 얘기 좀 들어주련?”

주인어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동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의령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 아이는 박꽃처럼 예뻤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늘 탕약을 달고 살았지만 걱정하는 아비 어미를 오히려 위로했다. 그 아이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러니 얘야, 살아다오. 부디 끝까지 살아다오. 더 이상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싶지 않구나. 의령이가 너를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러니 너는 살아야 한다.”

떨리는 주인어른의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동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뜨고 주인어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기가 가득한 그의 눈에서 동이의 죽은 아버지가 보였다.

“의령아, 내 딸 의령아. 너를 그리 허망하게 보내고도 아비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의령아, 보고 싶구나.”

동이를 향해 한탄처럼 중얼거린 주인어른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그 눈물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내밀었다.

서로 두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한없이 따스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