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꽃 - 머리말
연재를 시작하며
제가 ‘해남, 진도 지역’ 동학 소설을 쓴 것은 한 유골 때문입니다.
1995년 홋카이도 대학 강당 보관고에서 발견된 진도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
그 유골은 왜 일본으로 가게 됐는지, 채집해 간 사토 마사지로는 누구이고,
그는 왜 진도에서 유골을 채집했는지,
누구에게 전달했으며, 유골을 연구한 자는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지요.
홋카이도 대학의 이노우에 교수가 유골 속에 들어 있던 첨부문서의 내용을 조사해
유골 채집자 사토라는 사람의 이력을 결국 찾아냈습니다.
그는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 제19회 졸업생이었지요.
삿포로 농학교는 식민학과 인류학 연구가 왕성했고,
조선 침탈을 위한 제국주의 전사들을 양성하던 곳이었지요.
사토는 러일전쟁 참전 후에 일제 통감부가 운영한 면화재배 권업모범장 기사로 취직하여
해방 직후까지 조선에 살다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목포출장소의 관리 하에 진도에도 면화채종포가 있었고,
1906년 9월에 목포의 면화재배 권업 기사들이 ‘장려금 시상식’을 위해
진도에 출장 왔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유골에서 나온 흙과 진도 솔개재에서 채집한 흙의 성분이 일치한다는 결과도 나왔습니다.
한때 유골의 주인공으로 지목되었던, 진도 동학 접주 박중진의 자손이 하조도에 살고 있습니다.
후손의 머리카락과 유골의 DNA가 일치하는지 조사했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과학이 더 발달하면 밝혀낼 수 있겠지요. 그때까지 유골은 기다릴 것입니다.
소설을 쓰면서 제게 도움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자료를 찾아 주신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님,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 님, 해남 향토사학자 임상영 님,
광역신문 김형진 님의 기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해남 동학군 대장 백장안, 백동안의 후손을 만나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진도군지, 해남의 각 면지를 통해
반도의 서남해안 끝으로 몰려 학살당한 동학군들이 몇백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제게 자료를 주고, 증언을 해 주시는 분들의 염원을 접하면서
동학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것을 느꼈습니다.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어렵사리 시간을 내 팽목항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하조도에서 박중진 접주의 후손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무심한 눈길이 왜 그렇게 슬펐는지요.
이 소설을 쓰면서 고부, 부안, 전주가 아닌 해남, 진도에도 동학의 역사가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알고 나니 전에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두 갑자가 지나서야 알게 된 해남, 진도의 동학을 밝히는 데
이 소설이 조그마한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 진달래 지는 계절에
정이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