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7회) - 공주취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17. 00:11

 

3장. 공주 취회

1.

이창구가 상주에 다녀온 지 두 달여가 지난 10월 17일, 해월은 마침내 충청감영에 의송(소장)을 내기로 결정했다. 서인주를 비롯한 대접주들의 권유가 있은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관의 탄압에 시달리는 도인들의 호소가 대도소로 빗발쳤다. 또 원평과 장내리 일대에는 관의 약탈에 집과 전답을 빼앗긴 동학도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어 이미 동학촌이 되어 가고, 그에 따라 관의 감시의 눈길도 심해지고 있었다. 언제 다시 장내리 대도소가 관의 기습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가시방석과도 같은 도의 형편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자면 대선생의 신원이 유일한 길이었다.

해월 선생의 통문이 내포 접에도 당도하였다. 각 접별로 덕이 있고 신의가 있고 사리를 아는 대표를 뽑아 사흘 뒤 의관을 정제하고 청주를 거쳐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로 모이라는 내용이었다. 각 접별로 노자를 모아 대표를 파송하되 대표되는 자는 위의를 갖추어 처신하라는 당부의 말도 덧붙였다.

이창구는 정원갑과 김복기를 대동하고 어둠속을 가로질러 오리정으로 향했다. 공주에서 등장을 감영에 제출하는 일에 참석할 도인들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머릿속으로 많은 사념이 오고갔다. 이번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오랫동안 지하로 숨어 다니던 동학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한다. 감영에서 소장을 접수해 주기나 할까? 만약 실패한다면? 생각은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오리정 느티나무에 세찬 바람이 일고 있었다. 잎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가지들만 남아 바람결에 흩날렸다. 나뭇가지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이창구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요동치는 자신이 나뭇가지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위이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움직이면 모든 일이 뜻과 같으리라 하지 않았던가! 욕망을 놓으면 두려움은 자연히 소멸할 것을!

오리정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등불도 환하게 켜져 있다. 서릿발이 담장 밑을 제집으로 삼은 지가 한참 된 듯 꽤나 두터웠다. 동백나무에 내린 새하얀 서리는 새벽 휴식을 취한 후 새벽별과 함께 떠날 것이다.

“어여들 오셔.”

노파가 오리정 마루 앞에 서서 이창구를 맞이했다. 이창구는 노파의 자랑이었다. 이창구를 입도시킨 것만으로도 자기 몫은 다했다고 그녀는 줄곧 말했다.

“우리 창구 도인은 영락없는 평양감사야.”

노파는 마치 자식 살피듯 이창구를 살폈다. 이창구는 참석한 도인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는 이번 공주 모임에 관한 내포접 책임을 맡았다. 박인호와 박덕칠은 임시 도소인 청주 손천민 집에 머물다 지금쯤은 공주에 가 있을 터였다. 삼십여 명의 인근 도인들이 행장을 차리고 모여 들었다.

“아전 말에 의하면 내포 지역의 수령들도 공주로 모인답니다. 조병식이가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 자기 지역 동학 도인들의 참석자 명단을 보고하라고 했답니다.”

이창구는 내포 동학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이번 일 대해서 낯설어하고 불안해하는 도인들을 보자 좀 전 느꼈던 어두움이 다시 밀려왔다. 왜 아니겠는가? 이제는 세력이 커졌다 하나 동학은 지금으로서는 어디까지나 국법으로 금하는 사학이 아닌가? 민소(民訴)라는 것도 그동안 기껏해야 현아에 우르르 몰려가 고함이나 치다가 현감의 호통 한마디에 물러나거나, 제법 힘께나 쓰는 사람이 앞장서면 현감의 눙치는 말에 감복하여 물러서는 게 고작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 이 충청도 최고의 관문인 공주 관아의 감사 앞에 당당히 의관을 정제하고, 양반들의 전유물이던 소장을 당당히 제출코자 한다. 이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누가 알 것인가. 모든 두려움의 첫 출발점은 그다음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둠이 두려운 까닭도 그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뭉치가 눈사람 되듯 사람이 궁색해지면 두려움도 커지는 법이었다. 그는 도인들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까칠하고, 몸은 겨울 울타리에 세워진 수수깽이 마냥 말랐으나 갓을 올린 정갈한 머리와 정성스럽게 다림질한 두루마기는 정겨웠다.

“심고를 올린 후에 서둘러 떠납시다.”

이창구는 노파를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노파가 청수를 상위에 준비해 들고 있었다. 노파 주위로 도인들이 몰려들었다.

“가는 길이 길이니만큼 내가 청수를 모셨네. 이 청수 물처럼 밝고 밝은 지혜가 우리 감사님께 훤히 전달되어서, 우리가 하는 말을 죄다 잘 알아듣고 동학 대선생님 신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심고하세. 모두 심고. ‘하늘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공주에서 열리는 수운 대선생님의 신원 운동을 위해 여기 내포 도인들이 모였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도인들이 지극 정성을 다하여 이 일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도인들뿐만 아니라 만백성들이 스스로 한울임을 알아 서로 정성 되이 공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노파의 심고 소리가 어둠을 타고 먼 곳으로 퍼져 나갔다. 도인들은 다 같이 주문을 외웠다. 뒤이어 침묵이 있었다. 맑은 영혼들이 새벽 허공을 물들였다. 도인들은 두려움을 잊은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며칠 전부터 이 짚신을 삼았다네. 각자 자기 발에 맞는 것을 골라보게. 지난 번 해월 선생님이 월화 도인에게 짚신을 선물했다기에 나도 한번 준비해 보았네.”

노파는 도인들이 눈을 뜨자 짚신을 하나하나 챙겨주었다. 짚신은 아랫목에서 방금 가져온 듯 온기가 있었다. 이창구는 짚신을 신으면서 어른이라는 존재감을 느꼈다. 지켜보고 있으니 소신껏 할 일을 해보라는 무언의 지지가 짚신 안에 녹아 있었다.

“월화 도인은 뭣하고 있는겨?”

노파는 월화가 보이지를 않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저 여기 있어유. 혹시나 일이 길어질까 하여 백설기하고 고구마를 준비했어유.”

월화는 커다란 보따리 두개를 가지고 나와 일행들의 짐 보따리에 넣어 주었다.

이창구 일행은 공주 의송소에 도착했다. 태안 서산 덕산 도인들이 먼저 와 있었다. 박인호와 박덕칠 역시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창구 일행을 맞이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도인들은 대략 천여 명 정도 되었다. 그들은 모두 깨끗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그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관아로 들어갔다. 서인주와 서병학 손천민이 앞장을 섰다. 이창구는 내포 도인들과 함께 맨 뒤에 서서 박인호 박덕칠의 뒤를 따라갔다. 인근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신기해했다. 관졸들은 나와서 도인들의 행렬을 감시했다. 그들은 전날부터 꼬박 밤을 새운 탓인지 얼굴이 푸석거려 보였다. 관속들도 나와 있었다. 그저 무지렁이 백성으로만 알던 동학쟁이들이 유생들 못지않은 풍모를 자랑하며 당당히 활보하는 모습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동비들을 다시 봐야겠구먼?”

관속 하나가 자기로서도 난생처음의 대규모 행렬에 놀라면서도 기죽기 싫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지껄였다.

“머리에 쇠뿔이라도 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그려.”

이참에 아는 체를 하는 사람도 불쑥 말을 내뱉었다. 실은 그 자신이 동학도였으나, 공주성 안에서 관속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 처지다 보니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내색을 끝내 하지 않았다.

“과연 들은 대로 예의를 지키는 사람들이구먼.”

도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관속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난리라도 나는 줄 알았다가 차분차분 일이 진행되자 경계심을 늦추었다.

서인주와 서병학이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의송단자를 제출하였다. 의송 내용은 관에 제출되는 것인 만큼 수운 선생의 도학(道學)이 공맹을 비롯한 선성의 학문과 다르지 않는 인의예지의 도임을 밝히면서 이 도는 천지를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사람이 하늘의 덕을 알고 도리를 다하는 도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수운 큰 선생이 사도로 무고를 당하여 참형된 지 30년이 지나도록 그 원억을 풀어내지 못하여 세상에 떳떳이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니 한이 된다’면서 ‘감사께서 임금님에게 밝게 전달하여 스승님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의송은 동학의 숙원만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걱정도 함께하였다. 지금의 나라 형편에 외국 상인들이 항구마다 들어와 이익을 편취하여 나라 안에 돈과 곡식이 메마르며 산도적들이 날뛰는 형편이니 동학도들이 모두 보국안민의 기원과 더불어 나라에 보탬에 될 일을 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히며, 동학도들의 충정이 이러함에도 무고한 동학도들이 엄동설한에 집과 고향을 떠나 산야를 헤매며, 남편과 자식을 감옥에 가두어 보내어 어버이를 이별하고 길가에서 울부짖게 하는 것은 나라의 크나큰 손실이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외읍에 수감되어 있는 여러 동학 도인들을 모두 석방하여 줄 것과 무고한 동학 도인과 힘없는 백성들을 구박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는 탐학한 관리들을 징벌하라 요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오랑캐와 밀통하여 나라의 부를 유출하는 자를 처벌하고 왜놈 우두머리의 독이 외진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도록 함께 힘써 지키자고 천만번 바란다고 강조하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 소장 내용을 듣고 있던 이창구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행태에 치가 떨렸다. 요순 이래로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땅을 딛고 선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인 경천지 효부모 충군주를 동학만큼 강조하는 도가 없으며, 나라를 위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백성의 안녕을 도모코자 탐관의 횡포를 징치하기를 요구하는 동학의 도를 위법이라고 단죄하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소장을 다 읽었는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쥐죽은 듯한 고요를 깨는 웅성거림은 동학도들이 아니라 구경 나온 인파들 속에서 시작되어 점점 커져 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대놓고 커지기 시작한 것은 왜놈들을 쫒아내야 한다는 대목에서였다. 눈치만 보던 사람들도 그에 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감영의 관속이 의송단자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2

의송단자를 받아 든 충청감사 조병식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동학도들이 뭔가 일을 꾸미는 듯하다는 첩보를 접하기는 했으나 설마 했던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일이 전라도도 경상도도 아닌 충청도에서 제일 먼저 개최되었는지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동비들이 요구하는 동학 두목 수운 최제우의 신원이라면 자기들의 의송에서도 밝혔듯이 나라의 임금이 직접 하는 일이니만큼 충청감영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사안은 아니라서 하등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문제는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 가두는 지방수령과 토호들의 죄상을 낱낱이 색출해서 처벌해 달라는 요구사항이었다.

이는 결국 감사인 자신에게 도정에 관한 책임을 추궁하는 셈이었다. 감히 이놈들이 나를 향해 칼을 들이 밀다니! 관하 여러 수령을 다그쳐서 동비는 물론 그 비슷한 혐의자들까지 잡아들이고, 그들로부터 속전을 받아 내거나 재산을 몰수하여 그동안 들인 비용을 충당해 온 저간의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물론 그중 많은 부분이 한양에 있는 고관대작들이나 궁중으로까지 들어간 것이고 보면 이들의 바람이 털끝만치라도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다. 문제는 버러지만도 못한 동비들이 아니라, 이런 일을 빌미로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한양의 경쟁자들이었다.

그는 태안군수, 서산군수, 면천군수, 당진현감 등 내포 수령들을 불러들여 의송을 제출하는 데 참석한 각 지역 동비들의 동태를 작성해서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어떻게든 이들을 일단은 해산시킨 다음 고을별로 우두머리들을 잡아들이면 후환을 막아 내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 줄거리가 잡혔다. 감사 자리를 얻기 위해 조정에 뿌린 돈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우선 동비들을 자극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 보기로 했다. 그냥 놔두면 제 풀에 꺾여서 해산하겠지! 그리만 되면 최선이 아닌가.

마음을 그렇게 먹자 조병식은 더욱 더 동비들의 동태가 궁금해졌다. 의송만 제출하면 금방 흩어져 갈 줄 알았던 동비들은 다음날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그 방자한 동비 놈들 꿈쩍도 안하고 있는 게냐?”

조병식은 시간이 지나도 동비들이 움직이지를 않자 짜증이 나서 애꿎은 이방과 관속들을 다그쳤다.

“그렇습니다.”

“정탐하러 간 자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워낙 동비들 입이 철통같아서 정보를 빼낼 수가 없답니다.”

이방도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동비들의 움직임을 알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병식은 초조했다. 그는 계책을 생각해 냈다. 다음과 같은 감결을 의송소 앞으로 보냈다.

“동학을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은 조정의 일이다. 감영은 단지 조정의 명령에 따를 뿐 감영에 와서 호소할 일이 아니다.”

조병식은 동비들을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본인 관할 지역에서 불미스런 일이 지속되면 조정의 감사 대상이 될게 뻔했다. 조병식은 의송소에 감결을 내려놓고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났건만 동학 도인들은 전혀 움직일 기세가 없었다. 조정에 이리저리 끈을 대어 빨리 해결책을 도모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소식 또한 두절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비들은 더욱 굳건해지는 기세가 역력했으나, 초조해지는 것은 감사 본인이었다. 어쩌다 관아 밖을 나갈 일이 있어 동비들과 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피하는 기색이 없어 모멸감을 느꼈다. 지위도 재물도 없는 한갓 천한 것들이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동비들이 영부를 태워 마시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더니 정말인가 싶었다.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오늘은 아예 관헌 밖을 나서지 않았다.

날이 가도 동비들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그는 해산을 시키기 위한 구실로 각 군 현에 감결을 하달했다.

“모든 수령들은 동학을 금한다는 핑계로 동학 도인들을 탐학하거나 돈이나 재물들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금하라.”

조병식은 감결을 하달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이 감결에도 동비들이 응대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본인으로서는 할 일을 다 했고 나머지는 조정의 몫이었다.

3.

감결을 받아 든 의송소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내심 결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수운 대선생의 신원에 대한 임금님의 조칙이 없는 한 도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의송소를 철수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한편에서는 관리들의 탐학을 금한다는 것만으로도 취회의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냐며 해산할 것을 주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체로 해산하는 분위기로 기울고 있었다.

이창구가 나섰다.

“조병식은 영악하고 기민한 놈입니다. 우리를 농락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도인들에 대한 관의 탄압만 거세질 것입니다. 수운 대선생의 신원한다는 조칙을 받아낼 때까지는 움직이지 맙시다. 우리가 세를 보여야만 조병식이 마지못해서라도 움직일 것입니다.”

이창구는 칼날 같은 눈빛으로 도인들을 쳐다보았다.

이 말을 두고 다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서인주가 말을 꺼냈다.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소. 비록 수운 대선생님의 억울한 누명을 완전히 벗겨 드리진 못했으나 군현 관속들의 토색을 금한다 하니 일단은 된 것이오. 우리로서도 큰 모험을 감수하고 처음으로 무리를 이루어 감영 앞에 당당히 나선 것으로 저들도 달리 생각하게 될 것이요. 또한 우리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백성들이 호의를 보내고 있다는 것도 성과라 할 것이오. 일단 철수하고 추이를 살핀 연후에 다음 행동을 어찌 할지 결정합시다.”

그는 감결 내용에 찜찜해하는 이창구 등을 무마하여 일단 의송소를 철수하자고 결론 아닌 결론을 지었다. 이번 일의 책임은 그에게 속하였다.

이창구는 동학이 공인받지 못하면 관속들의 탐학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죽음의 고개를 넘는 한이 있더라도 동학을 공인 받을 때까지는 의송소를 철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도인들의 안색을 살피던 이창구는 자신의 뜻을 더 강하게 밀고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미 얻은 것에 대한 만족감이 얼굴빛에 묻어났다.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다들 물러날 기미를 보이고 있건만 자신을 포함한 일부 도인들만 강경책을 주장하고 있었다. 타협하는 것이 필요했다. 굽어가는 물길처럼 삶도 굽어갈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서인주의 말대로 얻은 바가 적지 않았다. 태안 이외 지역의 동학 소식을 접하고, 각지에 동학도들의 세력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또한 도인들이 합심하고 합세하면 관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한 것은 더할 수 없는 성과라 할 만 했다. 이제 동학은 지하에서 꿈틀대는 무리가 아닌 것이다.

“충청감사 조병식을 믿을 수는 없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관속들이 탐학하거든 조병식이 내린 감결을 들이밀어 봅시다.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우리도 처음 벌이는 것입니다. 판이 어찌 흘러가는지 지켜본 후에 다음 행동을 취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손천민이 평소의 온유함으로 다시 한 번 도인들을 설득했다. 이창구는 손천민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손천민의 의견이 어쩌면 평화를 강조하는 해월 선생의 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 신원에 대해 머뭇거렸던 해월 선생을 생각하면 일거에 모든 것을 얻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요구 수준을 점점 높여 가면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었다.

“제 생각에는 추이가 우리의 뜻대로 되어 가지 않으면 다음번에는 전라완영에 의송단자를 올리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만…?”

손천민의 제안에 이창구는 무릎을 쳤다. 충청 감영이 안 되면 전라 감영이 있는 삼례에서,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한양으로…! 우물을 파듯이 이곳이 안 되면 저곳을, 저곳이 안 되면 다른 곳을 옮겨 다니며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도 한 방법일 터. 심사숙고해 보면 수많은 방법이 있을 터였다.

“제 생각도 손천민 도인과 같은 생각입니다. 전라 감영에도 올려 봅시다.”

강시원이 나서서 손천민을 거들었다. 모두들 동의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2015/06/10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6회) - 박이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