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김현옥

작품 [님, 모심] - 9회 해월, 자살을 시도하다(김현옥)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7. 07:00

 

                                   영월 선바위산에 있는 선바위(소원바위)

 

 

 

해월, 자살을 시도하다

   

 

 

음력 9월 초 태백 산중에는 단풍이 한창이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낙엽송이며, 참나무가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졌다. 벌써 떨어진 진갈색 나뭇잎은 산길마다 수북했다. 밟을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낙엽 소리는 마치 말을 거는 듯도 하고, 해월의 마음을 알고 함께 울어 주는 듯하였다. 좁은 산길로 오르고, 골짜기 암벽을 타면서 다시 태백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해월 일행은 수운 선생의 유족이 살고 있는 영월 소밀원 근처에 당도하였다. 황재민을 산에 머물게 하고 해월과 강수는 약초꾼처럼 약초 담는 바구니를 메고 찾아갔다. 마침 수운의 부인인 박 씨와 세정, 세청 형제가 있었다. 이들이 들어서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이필제가 다시 난을 일으켜서 잠시 피하려고 왔습니다.”

강수가 사정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우리는 지금 동생 혼인 때문에 양양에 갈 예정입니다. 군식구를 거둘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세청이 매정하게 거절했다.

외려 잘되었네! 선생님이 말고삐를 잡고, 내가 함을 지고 감세. 그러면 누가 의심하겠는가?”

세정이는 그도 좋은 방도라 여기며 응하였으나, 세청이 워낙 완강하였다.

안 될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우리가 두 분 때문에 위험해졌습니다. 얼른 속히 떠나 주시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하룻밤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해월이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밥상이 들어왔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장기서 어른이 두 분을 빨리 내보내는 것이 좋다고 해서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지만, 조반 드신 후 떠나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뭐라고? 세상에 이런 무례한 일이 다 있나? 장기서는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렇게 모질게 대한단 말인가?

강수가 밥상을 잡고 던지려고 했다.

참게나.”

해월이 강수를 붙들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만 동행하면 안 되겠는가?”

해월이 세청에게 물었다.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하고 세청은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해월이 한 숟갈의 밥을 떠서 입안에 넣는데 목이 막혀서 넘어가지 않았다. 강수는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소밀원에서 나와 다시 황재민이 머무는 산속으로 숨어들어 왔다.

 

 

 

9월이라고는 하나 강원도 산간의 밤은 어느새 겨울이었다. 큰 바위 틈새 바위굴에 의지하여 지내기로 하고 굵직한 나뭇가지들을 주워다가 바위 주변을 감싸듯 땅에 박았다. 억새꽃 줄기를 끊어다가 칡넝쿨로 이엉을 엮어 울타리 삼아 말뚝에 둘러쳤다. 나뭇가지들을 칡 줄기로 발을 엮어 지붕도 덮었다. 벽이나 지붕 공간마다 풀들을 듬뿍 쑤셔 넣어 바람이 새어들지 않게 했다. 바닥에는 낙엽을 두툼하게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안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훨씬 아늑해졌다. 찬바람과 서리를 피할 수 있는 키 작은 초막 한 채를 지은 것이다.

계속되는 굶주림으로 그들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산속에는 도토리, , 더덕 뿌리, 칡 뿌리 외에는 먹을거리가 없었다. 도토리 알맹이를 깨물면 떨떠름하고 쓴맛이 났지만, 먹고 난 혀끝에는 단맛의 여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것도 많지 않아서 하루 종일 산을 뒤져야 했다.

 

해월은 초막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지극한 기운이시여, 지금 여기 저와 함께하시는 숨결이시여, 바라건대 저에게 내리소서. 정성으로 마음에 모시오니, 바깥의 한울님과 소통하여 일치하소서. 순간마다 잊지 않고 있으니 저절로 한울님의 덕을 실천하게 하소서.’ 해월은 숨결을 들여다보았다. 들고 나는 숨결에 자신의 생명이 얹혀 있었다. 생명은 들숨과 날숨의 끊임없는 소통과 조화 속에 있었다. 순간마다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숨결에는 네 것 내 것이 없었다. 모든 생명이 나눠 갖는 우주의 샘물이었다. 그러다 언뜻 창과 칼에 피 흘리며 쓰러져 간 수많은 도인의 모습이 보였다.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에 통증이 일어났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한울님, 스승님. 앞길을 열어 주소서. 깜깜한 길을 헤매는 저를 인도하소서.’

해월은 간절하게 심고(心告)했다. 칠흑의 어둠 너머에서 좀처럼 빛이 비춰오지 않았다.

 

산속에 들어온 지 1주일이 지나자, 황재민이 견디다 못해 해월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 먹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약간의 소금과 장만 남았습니다.”

…….”

초췌하게 여윈 황재민을 보고 해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배가 고플 때마다 소금 한 알 입에 넣고 침으로 녹이며 배고픔의 통증을 견뎠다. 황재민은 무슨 말을 더 할 듯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한 움큼의 소금도, 몇 숟가락의 장마저도 떨어졌다. 해월은 앞날이 깜깜하게 어두워짐을 느꼈다. 이제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13일째 되던 날 황재민은 영남 지방으로 간다며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해월에게 굶주림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등바등 목숨을 지키려고 구차하게 피해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위태롭게 하는 자신의 처지였다. 자신 때문에 죽은 수많은 도인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올 때도 끝내 살아남고자 했던 것은, 수운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고비원주(高飛遠走)의 가르침, 높이 뜻을 펼치고 멀리까지 동학의 가르침을 펴야 한다는 말씀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생각하면 함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스승님은 내 어떤 면을 보고 그 크나큰 일을 당부하신 것인가? 이제는 내려 놓을 때 되지 않았나?

 

해월은 강수와 더불어 선바위산으로 올라왔다. 산 중턱에 바위가 쇠뿔처럼 솟아 있다 해서 사람들은 선바위라고 불렀다. 선바위는 사면이 수직 절벽이었다. 산길은 절벽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었다. 위험하게 급경사로 난 옆길을 지나 더 올라가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바위가 나왔다.

해월은 깎아지른 절벽 끝으로 다가섰다. 언뜻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앉아 있던 수운이 보였다.

고비원주, 그 말씀은 멀리멀리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도 되었다. ‘스승님, 이제는 더 날 곳도 뛸 곳도 없습니다.’⁸⁾

 

해월의 몸이 벼랑 쪽으로 기우뚱했다. 옆에 있던 강수가 해월을 덮치듯 붙들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강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가까스로 해월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해월이 몸부림을 쳤다. 강수는 온몸으로 해월을 부둥켜안으며 울부짖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지금까지 잘 견뎌 오셨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네. 스승님도 더 이상 가르침을 들려 주시지 않아. 이제 내 운은 다한 것일세.

해월이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 많은 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네. 그 바람에 우리 도가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어.”

그것이 어찌 선생님 탓이겠습니까? 제가 선생님을 이필제에게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이필제의 생각이 그처럼 짧은 데서 끝날 줄은 그때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언변에 속아 마음이 어두워진 제 탓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직 저를 믿고 허락하신 게 아닙니까?”

결국 책임(責任)은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겠는가, 기도를 할 수가 없네. 한울님이, 스승님이 기도에 감응하지 않는 듯하이. 아니 그러겠는가. 내 죄가 한울님을 돌아서게 하였음이야.”

해월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큰 고통을 참고 있는 줄 몰랐다. 강수는 자신의 둔함을 자책하며 그저 해월을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었다.

 

강수로서도 감추어 온 속생각이 있었다. 강수는 한때 이필제가 수운을 이을 후계자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점점 그의 달변에 매료되었다. 이필제는 사서삼경에 능하였고, 동학의 교리에도 막힘이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해월보다 이필제가 후계자로 더 적임자라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해월이 옳았다. 자신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시면 수운 스승님의 도맥도 끊어지고 맙니다. 뉘라서 선생님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도를 살리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지켜낼 분은 선생님뿐입니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2015/06/20 - [소설/김현옥] - 작품 [모심] - 8회 영해 교조신원운동 (김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