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혁명을 공부하면서...(인터뷰)
Q. 동학과 혁명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동학의 동이 서에 대칭되는 동일뿐 아니라 빛, 광명, 생명을 뜻한다는 것.
해월이 38년을 도망 다니면서 조직사업을 한 것은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이루려고 했다는 것.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의 숫자는 인구 1/3~1/4가 될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는 것.
혁명 직전 그들은 2년여에 걸쳐 합법적 통로를 통해 정부에 하소연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것. 그러나 모두 무시당했다는 것.
남접과 북접이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으며 4월 이후 충청권에서도 계속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적과 싸우더라도 생명을 빼앗지는 말라는 등 동학농민군의 4대 명의, 12개조 기율에 대해서는 일본 지식인들조차 탄복했다는 것.
고부군수 조병갑과 그의 사돈 이조판서 심상훈은 동학혁명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명적으로 관련된 철저한 기득권지킴이였으며 민초들에게는 혁명의 걸림돌이었다는 것.
부와 권력을 가진 탐욕스러운 자들은 그것을 지키고 불리기 위해서 동족도 쉽게 죽이고 나라도 쉽게 팔아먹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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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에 스파이를 파견해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이미 파악해 놓고 있었다는 것.
이미 1888년 조선8도 전체를 정확하게 측량해 만든 전도(全圖)를 마련했으며 1889년 성능이 뛰어난 연발총을 자체생산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에는 조선과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서양의 다른 제국주의국가들처럼 눈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는 것.
동학 진압을 위해 파견된 19대대 대대장, 동학당정토대총지휘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메이지 유신에 반대한 일본 민중들을 살육했던 경험이 풍부했던 자라는 것.
일본 천황이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옮겨 군부와 정부의 직접지시로 조선 농민군을 탄압했다는 것.
그들은 동학관련 문서들을 악착같이 수집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것.
일본군 3천 명이 죽창을 든 농민군 200~300을 당할 수 있는 최신무기로 두 달간 3만~5만 가까운 농민군을 대량학살했다는 것.
살아남은 동학도들이 31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그때 각성한 젊은 사자들이 다시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을 위해 사투를 벌였다는 것.
동학의 2세 3세들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엄청난 일들을 꾸며나갔다는 것.
불행하게도 타력으로 얻게 된 해방 속에서 강대국의 야심 때문에 한민족은 치명적인 분단을 맞게 되고 그 골은 지금까지 점점 더 해져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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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여기저기서 어른들과 노인들이 ‘글 깨나 쓰고 말 깨나 하는 똘똘한 놈들은 모두 좌익이 되었다’는 말을 하며 쉬쉬했는지, 왜 똑똑한 젊은이들이 왜 월북, 납북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21세기에도 풀리지 않고 있는 한반도 분단의 시발점에는 19세기 말 손에 들고 있는 총에 의지한 일본의 탐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 역시 강대국의 무기산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 때문에 무기공장이 가동되는 것이 아니라 무기공장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 때문에 전쟁이 생긴다니...
이 우주에서 가장 어리석고 가장 부끄러운 짓이 인명살상용 무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