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한박준혜

은월이(8회) - 불난 집을 보고도 그냥 못 본 척 하자는 겁니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1. 21:58

득달같이 달려온 의원에게 윤지영을 맡기고 은월은 방에서 물러나왔다. 잠시 후 은월은 박영채가 내어준 옷을 입고, 박영채와 마주앉았다. 박영채는 차를 건네며 말했다.

윤지영 목숨을 구한 것으로 더 이상 인연을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슨 말인지요?”

지난 회합 때에도 은월 접장이 추천해서 참여시켰지만 접내에서 말이 많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박영채는 웃으면서 말을 했다.

은월 접장이 추천한 거 아닙니까?”

젊은 도인들이 뜻을 모아 추천한 것을, 무슨 연고로 제가 한 일이라고 넘겨짚어 말씀하십니까?”

젊은 도인들이 만든 충의가 바로 은월 접장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은월 접장이 추천한 거지요.”

박 접장도 참 딱하십니다. 그리 억지를 부리다니 말입니다.”

분위기가 매서워졌다.

우리 도문에 드는 것은 어떤 신분도 장애가 되지 않으나, 도인으로서 함께하자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도 또한 접에 정해진 강령입니다. 은월접장, 아시지 않습니까?”

형편이 어렵고 처지가 딱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 또한 우리 도인이 할 일이겠지요.”

문제를 자초하는 것을 두고 그리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문제에도 다 다 근원이 있는 법, 그 뿌리를 캐어 어긋나고 병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도인의 일이란 말씀입니다. 수운 대선생님도 굽어진 나무라 해서 내버리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윤지영 문제는 경고했으니, 이쯤 하겠습니다.”

은월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박영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고부 소식은 접했을 테고, 전봉준 접주가 대접주들의 도움을 받아서 일을 본격적으로 벌일 생각인 듯합니다.”

은월은 활짝 웃으면서 말을 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은월 접장, 기포하자는 요구에 우려가 많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은월은 박영채를 노려보았다.

불난 집을 보고도 그냥 못 본 척 하자는 겁니까?”

불이 났다고 해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다 죽습니다.”

삼정이 문란하고 탐관오리가 온나라에 퍼져 민초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도탄에서 허우적대고, 나라는 안팎으로 위태로운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봉기한 동도들을 두고 어찌 몸을 사린단 말입니까?”

박영채는 주먹을 꽉 쥐었다.

허허허, 몸을 사린다는 말을 과합니다. 우리 도가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않습니까? 지금 도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연유인지,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칫 세만 믿고 경거망동하지 말자는 겁니다. 접에 치명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말씀 잘 하셨습니다. 지금 몰려드는 민초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진정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셨습니까?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못하고, 죽지 못해 살다가 동학에서 살 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이들에게 살 방도를 마련하는 것, 아니 함께 그 길을 열어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은월은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접을 우선시 생각하여, 대의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를 세울 수 없습니다.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하지 않았습니까? 전봉준 접에서 든 보국(輔國) 안민(安民) 창의(倡義)가 곧 동학의 근본인 것을 박 접장도 알지 않습니까?”

박영채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은월 접장! 누구를 가르치려 하십니까?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하시렵니까? 접의 운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기포를 잘못했다가, 십 수 년 동안 만들어온 조직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조직이란 말입니까? 과일이 익었는데 제때에 따지 않으면 썩어 결국 떨어져 못 먹지요.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서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때 윤도인이 들어와 박영채에 귓속말을 하니 박영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인이 전주댁과 함께 들어왔다. 전주댁을 본 은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주댁은 은월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반쯤 돌린 채 앉았다. 은월은 전주댁을 향해 말을 했다.

전주댁이 여기 웬일입니까?”

전주댁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 말고, 짐짓 당당한 듯이 말했다.

여식 일로 왔다 은월 접장도 마침 와 있다기에 같이 있을 때 이야기하려고요.”

여식이라면 영옥이 말인가요?”

전주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인은 활짝 웃으면서 말을 했다.

박접장과 영옥이가 오늘 혼인을 약조하고, 하지와 소서 사이 농한기에 이 집으로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은월은 기가 막혀 치맛자락을 손으로 꽉 쥐었다.

영옥이도 좋다고 합니까?”

윤도인이 나서면서 말했다.

접에서 접주인 박영채 어른을 모시는 일이니 그분을 모시는 것이 바로 동학을 위하는 것이니. 은월 접장도 비뚤게 토 달지 말게나. 접보다 은월이를 위해 영옥이를 데리고 있을 마음이 아니라면 모를까...”

은월은 눈을 크게 뜨고, 윤도인을 노려봤다.

윤도인!”

아니.”

윤도인이 머뭇거리는 틈으로 전주댁이 끼어 들었.

그래도 영옥이를 보살펴 준 은월이에게 미리 상의 못해 걸렸는데, 이리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눠서 다행일세. 어미로서 딸년 하나 있는 거 좋은 곳으로 간다는데, 더욱이 도인으로 접주를 모시는 일이니, 영옥이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나? 그러니, 은월접장이.”

은월은 벌떡 일어섰다.

영옥이가 어떤 마음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사내 수발들라고 머리를 내린 줄 알았단 말입니까?”

윤도인은 은월이의 말에 발끈하며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쳤다.

어디서 경거망동인가? 사내라니? 재물이 있다 하여 거만함이 지나치지 않은가! 당장 박접주에게 사죄하!

윤도인이 작정을 한 듯이 은월을 몰아붙였다. 박영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은월을 바라봤다.

아무리 같은 접의 도인이라 하나 남의 혼사에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마음은 없습니다. 영옥이의 일이라면 저도 할 말은 있습니다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영옥이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자는 것이 우리 동학의 정도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도인이라면 누구든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전주댁은 고름을 매마지면서 말을 했다.

은월이, 우리같은 처지에 어떻게 양반댁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겠는가? 천한 신분에 기생까지 한 몸이네 내 여식은.... 이만한 자리도 없네. 박접장처럼 품이니 우리 영옥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걸세..... 부탁일세, 이번 혼사길을 막지말아주게, 이제 영옥이도 평범한 여인으로 살게 해주게나.”

윤도인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전주댁, 자네 여식은 복 받은 걸세. 모두 잘 될 테니 너무 염려치 말게.

은월은 부애 난 마음을 담아 , 문을 쾅 닫고 방을 나왔다. 난감한 전주댁이 따라나서려는데, 윤도인이 전주댁의 치마를 잡았다. 전주댁은 못 이기는 척 그 자리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은월은 심란한 심사를 눌러 앉히며 우선 윤지영이 있는 방으로 갔다. 은월은 윤지영을 한동안 바라봤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 그래도, 사람은 다 믿어야 한다.”

윤지영 얼굴 식은땀을 은월은 정성껏 닦아 주었다. 그녀가 신음하는 윤지영의 손을 꼭 잡아 쥐자, 윤지영은 숨을 고르며 다시 잠이 들었다. 은월은 노랑나비가 새겨진 자주색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를 보살피던 도인에게 내밀었다.

피를 많이 흘려 몸이 허할 텐데 몸에 좋은 것을 부탁합니다. 제가 강경에 가면 삼을 구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도인은 말없이 끄덕였다. 은월은 방을 나와 말에 올라탔다. 바람같이 말을 몰고, 강경으로 향했다.

강경읍을 끼고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훤히 보이자, 은월은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녀는 말을 타고 옥녀봉으로 내달렸다. 멀리서, 말을 탄 은월이를 본 금객주도 옥녀봉으로 향했다.

옥녀봉에서 강경 포구를 내려다보며 은월은 한껏 두 팔을 벌렸다.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지며 가슴이 시원해졌다. 굽이굽이 강줄기는 이제 곧 하염없이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거세차게 굽이치고 있었다.

강경은 강가에 서원이 있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불과 백여 년전만 해도 잡초가 무성하고 황망한 습지대였다. 하지만, 은월이의 발아래로 펼쳐진 강경은 수십 척의 배들이 떠 있는 거대한 항구로 변했다. 배들이 하도 촘촘히 떠 있어 강물은 보이지 않고 육지와 이어져 있었다. 포구 연안에는 여전히 지게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생기 찬 소리들이 강바람을 타고, 은월이 귓가를 맴돌았다. 은월은 강바람을 맞으면서 옥녀봉에 우뚝하니 섰다. 그리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은월 접장, 잘 다녀오셨습니까?”

금객주 목소리에 은월은 눈을 떴다.

북촌에 어느새 함석집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금객주는 은월이 얼굴색을 살피며 말했다.

조만간 강경도 왜놈들이 판치게 생겼습니다.”

은월은 방긋 미소를 머금고, 큰 바위에 걸터앉았다. 금객주가 두루마기를 벗어 은월에 어깨에 감싸듯이 걸쳐주었다.

말을 타기엔 아직 바람이 찹니다. 그러다 천식이라도 돋으면 큰일입니다.”

은월은 금객주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활기에 넘치는 강경장 쪽으로 다시 눈을 주었다.

옥녀봉 동쪽 기슭 쪽이 상시장이다. 상시장에서 시작된 인파 행렬은 강물처럼 출렁거리며 하시장 쪽으로 이어져 갔다. 강경을 한 바퀴 둘러보다 다시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왜인들이 집인 함석집이 눈에 들어오자 은월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객주회와 상인회는 어찌 되어 갑니까?”

불만을 가진 상인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쉽게 조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지요, 부정과 긍정이 늘 함께 존재하지요.”

은월은 금객주를 바라봤다.

한 모임이 열 명을 넘기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모임의 바깥에서는 물론이고 모임과 모임 끼리도 서로 몰라야 합니다. 모임을 늘리는 것보다 더 우선할 것이 비밀을 지키는 일입니다. , 믿을 만한 도인 한 명은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실익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원칙만은 지켜주세요.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 자칫 화가 닥칠 수 있습니다.”

양보다 질이라. 하하하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셈이 빠른 자들이라 그들이 오히려 그리하고 있지요. 매우 철저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입니다. 생각보다!”

다행입니다.”

은월은 뭔가를 골몰이 생각하다 입을 뗐다.

대원군이 보부상들에게 관심이 많다 들었습니다.”

금객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지식한 영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 흐름을 참 빠르게 읽고 움직입니다.”

개항장이 급격히 커지고 물산 유통이 많아지면서, 천대받던 보부상의 세력이 급속하게 커지고 있지요. 또한 보부상의 조직은 팔도에 걸쳐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어 그들과의 관계는 권력을 쥔 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되었지요. 세상이 재밌습니다.”

은월은 눈에 힘을 주면서 말을 했다.

그뿐이겠습니다. 없는 민심을 만들어 내고, 우로 가는 민심을 외틀어 버릴 수도 있지요. 진실은 손톱만큼인데 거기에 거짓을 채우면 권력을 유지하는데 유리하게 민심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무능하고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거센 민심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심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지요. 그 늙은 영감이 그런 수완은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조씨, 민씨 일가에서 손을 대고 있는 터라 대원군이라고 해 쉽지는 않아 봅니다.”

민심의 흐름을 파악하고, 때로는 우리도 민심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부상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 주세요. 보부상이란 대체로 동학과는 맞서 있다고 하나 특히 금산의 보부상이 동학에 반감이 크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기포할 때 그들이 우리와 맞서기라도 한다면, 결국 민초들끼리의 싸움이 되어 곤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은월은 금객주 두루마기를 벗어 금객주에게 건네면서 말을 했다.

영옥이 일 솜씨는 어떻습니까?”

사람을 휘어잡는 데는 도통한 아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니, 일이 외로 가는 법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따듯하여 다들 좋아합니다. 앞으로 크게 기대해도 좋을 듯합다.”

은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 금객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러나, 처자의 몸이고 보니,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혼례를 하게 되면 그 능력이 쓸모가 없어지니참 아깝습니다.”

혼례를 하면 됩니다!”

은월은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 금객주는 웃으면 말을 했다.

세상에 어찌 일이 그리 쉽겠습니까? 전주댁은 진작부터 혼처를 알아보느라 분주하던데.”

은월이 얼굴이 점점 굳어지자 금객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은월 접장, 연산에 가신 일이 잘 안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 박 접장 집에 삼을 보내야겠습니다. 윤지영이 많이 다쳐서 박접장 집에 있습니다.”

윤지영이요? 알겠습니다.”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할 일이 태산입니다.”

금객주는 은월이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마주섰다.

평양에서 좋은 술이 들어 왔는데, 한잔 할까요?”

은월은 피식 웃었다.

,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

둘은 서로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까짓 술이라면 언제든지 좋습니다. 큰일이 끝나면 시간 만들어 보겠습니다.”

은월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말의 고삐를 잡고 내려가는 은월이의 뒷모습에서 금객주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은월은 애마 백설이 들으라고 말을 꺼내 놓았다.

백설아, 영옥이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지?”


 

2015/06/03 - [소설/한박준혜] - 은월이(7회) - 제삿날 윤지영은 살을 깎겠다고 난리를 피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