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8회) - 첫 접촉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3. 08:21

4장. 첫 접촉

1.

틀못 삼일장이 열렸다. 이창구는 공주 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것이 도씨 부인에게 못내 미안해 이른 아침부터 포목점에 나와 물건을 정리했다. 도씨 부인은 동학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도 비단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비단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여인들은 포목전에 들어서면 비단부터 만졌다. 그들은 비단이 부드러워서 좋다고 했다. 비단처럼 삶이 유연할 수 있다면!

지난 공주 모임에서 손천민은 유연했던 반면 본인은 고집스러웠다. 자신의 외길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창구는 이 비단 저 비단을 만져 보았다. 비단이란 자고로 걸림이 없었다. 걸림이 없는 삶이라! 그는 혼잣말을 하면서 자신의 손길을 연둣빛 비단과 꽃분홍 비단으로 옮겼다. 연둣빛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 이창구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그는 순섬이와의 혼사가 깨지고 나서 삼년 동안을 같은 꿈에 시달렸다. 연둣빛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를 입은 순섬이가 그의 앞에 나타나 따라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 정신없이 쫒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녀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떠보면 꿈이었다. 온몸은 축 처지고 형언할 수 없는 허망함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었다.

“여보,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도씨 부인은 한참 전부터 이창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도씨 부인인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주에 가신 일은 어찌 되셨어요?”

도씨 부인은 언짢은 투로 퉁명하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남편이 포목 일을 제쳐두고 동학에 몰두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시아버지도 사도라며 한사코 말렸으나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직 시어머니 당산댁만 아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최근 들어 도씨부인은 불안했다. 순섬인가 뭔가 하는 여자 때문이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 주었던 땅 일부분을 거둬들여 순섬이 오빠에게 결세 없이 토지를 빌려 주자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거절하기는 했으나 남편의 심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정원갑을 불러 순섬이란 여자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그는 창구 형님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쌀랑하게 돌아섰다. 그녀는 안 되겠다 싶어 이창구가 공주 일로 가게를 비운 사이 편중삼을 불렀다.

편중삼은 마침 공주 모임에 참석을 못해 이창구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일을 그르칠 만한 도인들은 공주에 참석케 말라는 해월 선생의 지시에 이창구는 편중삼을 배제시켰던 것이다. 편중삼은 본인 스스로가 말이 많아 때론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일로 중요한 자리에서 밀려난 듯하여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도씨부인에게 이창구와 순섬이의 관계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요즘 들어 창구 형님이 순섬이에게 마음이 많이 빼앗긴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소.”

이창구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퉁명하게 내뱉었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들 부러워할 만큼 재산을 모은 당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고 다니세요? 찬고를 생각해서라도 자중하세요.”

“찬고 때문이오. 그 애가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그러오.”

“세상이 달라질 것 같으면 우리 같은 사람이 나서지 않아도 달라질 겁니다. 그 반대라면, 아무리 애쓴다 한들 달라질게 없고요.”

“달라질 거요. 달라지도록 하는 게 사람이 할 도리요. 나는 다만, 도리를 다하며 살고자 하는 게요.”

“… 순섬인가 하는 그 여자 말예요….”

이창구는 아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제발 손을 떼세요. 중삼이한테 다 들었어요. 동학 경전에 자신의 부인을 이렇게 홀대해도 된다고 나와 있던가요?”

도씨 부인은 점점 어투가 격양되고 있었다.

“당신을 홀대하다니요? 왜 그런 말을….”

말은 그리 하면서도 이창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씨 부인의 절망감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간 너무 내 생각만 하였던 게 아닌가.’

자책감이 밀려 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려지지는 않았다.

순섬이의 그간의 고통은 누가 무엇으로 보상해 준단 말인가? 나라가? 유학이? 자신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다시 비단을 둘러보았다. 연둣빛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를 입은 순섬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주고 싶었다.

“내가 할 말이 있소.”

이창구는 무언가 작정을 한 듯 담담하게 부인을 쳐다보았다. 도씨부인은 이창구의 단호함에 놀라 좀 전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이창구는 아들을 불러 일을 잠시 맡기고 도씨부인을 가게 한쪽에 붙어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거요.”

“무슨 말씀이신데요?”

“순섬이란 여자 말이요. 내가 거두어 보살피고자 하오….”

“안 됩니다.”

도씨부인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단호하게 반대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요동칠 일이었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일이오. 나로 인해 그 여자는 가시밭길의 인생을 살아야 했소. 죄스런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소. 나를 이해해 주시오. 부인에게 폐를 끼칠 사람은 아니오.”

“폐를 끼치지 않다니요? 제가 죽을 것 같은데. 아니 죽어버릴 테요.”

도씨 부인은 말대로 죽고만 싶었다.

“부모님에게는 내가 말씀을 드리리다.”

이창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그는 부인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포목점을 나와 아미산 쪽을 바라보았다. 가오리 연 두 개가 날고 있었다. 두 연은 상대방의 연을 끊으려 물러섰다가 다가서고 위아래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두 연이 서로 평화롭게 날 수는 없을까? 순섬이와 도씨 부인의 관계가 평화로울 수는 없을까?

순섬이를 다시 보았을 때 간난신고한 흔적이 역력했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입도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틀간이나 몸살을 앓았다. 남들은 입도식을 치르느라 고생해서 그랬을 거라고 했지만 실은 순섬이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창구를 보고도 원망하거나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처럼 고고히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갔다.

이창구는 쇠학골로 향했다. 도씨 부인 생각에 마음은 무거웠지만 마음속에 있던 말을 해 놓고 나니 발걸음은 가벼웠다. 먹고 살 만한 재산은 모아 놨으니 이제는 이 세상에서 하고 가야 할 일에 열중하고 싶었다.

순섬이네 집에 도착했다. 산 그림자가 계곡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계시오?”

이창구는 사립문을 밀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데 다들 어디 갔을까? 이창구는 뒤꼍으로 발을 옮겼다. 장독대를 돌아 순섬이 방 앞에 이르렀다. 짚신이 놓여 있었다. 슬그머니 문고리를 잡아 당겨 방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이불 사이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나와 있었다. 사람이 왔는데도 반응이 없다니?

“누구 없소?”

이창구는 누워 있는 자가 순섬이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더 큰소리로 물었다.

이불이 걷혔다. 순섬이었다.“아니?”

이창구는 깜짝 놀라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방문에 순섬은 놀란 듯 일어나려 했다.

“애쓰지 말고 그냥 누워있구려. 어디가 아픈 거요?”

“몸살이 났는가 봐요. 죄송해요.”

“식구들은?”

“사돈 댁 혼사가 있어서 외출했습니다만 저는 몸이 여의치 않아서요.”

순섬은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돈했다. 두루마기를 말끔히 차려 입은 그는 기대고 싶을 정도로 듬직했다. 그녀는 둘이서만 있는 것이 쑥스럽고 당혹스러워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방안이 온통 그의 향기로 가득 찼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순섬은 온몸이 박하처럼 화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이 밀려왔다. 남자란 여자에게 이런 존재인가! 순섬은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싶었다. 땀이 비 오듯 다시 흘렀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삭신이 아파왔다.

“내 물수건을 준비해 오리다.”

이창구는 밖으로 나가 수건을 찬물에 적셔 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심한 듯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놓았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이마를 잠시 스쳤다. 첫 접촉! 순섬은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함을 느꼈다. 이창구는 놀란 듯 물러나 앉더니 어깨를 두어 번 들썩이고는 다시 다가와 앉았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의 부인이 되어 주시오.”

이창구는 몸을 숙여 순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순섬은 당혹스러운 듯 눈을 감아 버렸다. 눈물이 그녀의 눈 옆으로 흘러내렸다.

“빨리 털고 일어나시구려. 곧 삼례에서 동학 집회가 열릴 터이니 그때는 같이 갑시다. 내 나가는 길로 의원을 보내리다.”

이창구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순섬은 매몰차게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떼지 못하였다. 몸과 마음이 너무도 지쳐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다가, 설움이 터져 버렸다. 힘에 겨워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꺼억 꺼억 숨이 넘어가게 울음을 뱉어냈다.

<다음 호에 계속>

 

2015/06/17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7회) - 공주취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