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변김경혜

꿈이 있더냐(7회)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3. 16:06

 사람들이 많대요. 다들 좋아라 하고. 이 겨울이 지나면 동경대전이 나온다 하대요.”

 

윤지가 머리를 기댄 채, 얘기했다.

난 동경대전보다, 우리 혼인이 더 좋다. 동경대전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혼인했으면 좋겠다.”

칠성이는 윤지를 옆눈으로 보며 얘기했다.

윤지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린 동생들과 아버지 때문에 혼사를 미뤄 왔다. 기다려 주는 칠성이가 고맙기도 하지만, 식구들 생각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미안하오, 오라버니.고맙소.”

윤지는 오늘도 같은 말을 할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칠성이가 겨드랑이에서 윤지의 손을 빼더니 자신의 무릎 위로 천천히 윤지를 눕혔다. 윤지는 칠성이를 기다리는 듯 살포시 눈을 감았다. 칠성이와 윤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칠성이의 손길이 윤지의 뺨에서 어깨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윤지 입술이 열렸다.

그냥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혼인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오라버니 든든한 가슴팍에서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어린 동생들과 아버지, 집안 살림 걱정 하지 않고, 이렇게 오라버니와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시집간다고 고운 옷 한 벌 해 주셨겠지.’

윤지가 자신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 토해냈다. 거칠어진 손으로 윤지의 옷고름을 풀고 막 저고리를 벗기던 칠성이의 손이 멈췄다.

윤지야.”

칠성이가 안타까운 눈으로 윤지 표정을 살폈다.

미안하오, 오라버니.”

윤지가 흐느끼며 말했다.

아니다, 윤지야. 미안하다. 걱정마라.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기다릴게. 걱정마라.”

칠성이가 윤지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내가 다섯 해 넘기기 전에 그놈의 아가리를 반드시 찢어발기고 말테다. 개 같은 놈! 그리고 그놈의 집을 가만 놔두지 않을 테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그리할 테다!”

칠성이의 분에 찬 목소리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상현이는 어떤 위로도 칠성이형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듣고만 있었다.

더러운 놈. 더러운 놈! 지 딸 같은 윤지를, 어찌 그럴 수 있느냔 말이다! 난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놈과 같은 마을엔 못 산다. 꼭 그놈의 아가리를 찢어발겨서, 잘못했노라고 싹싹 빌게 만들 테다. 아니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어도 그놈을 죽이고 말 테다!”

칠성이는 분에 견디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꾹 참고 있다는 걸 상현이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떠꺼머리총각 소리를 들으며, 몇 년을 연지와 혼인할 날을 기다려 왔는데, 연지를 빼앗기게 생겼다.

칠성이 형.”

상현이도 눈물이 핑 돌았다. 연지와 혼인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 온 칠성이를 잘 알기 때문이다. 상현이도 혼인을 앞두고 칠성이와 여기를 찾았었다. 친형 같은 칠성이보다 먼저 혼인한 것이 무척이나 미안했기 때문이다.

칠성이와 상현이는 태조산 꼭대기에 앉아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삼거리 주막 뒤편 취암산부터 태조산 성거산 위례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다. 둘은 어려서부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태조산을 찾곤 했다. 산은 아무 답도 주지 않았지만 산과 산으로 연결된 능선은 자신들을 품어주는 것만 같았다. 산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게만 느껴졌다.

어찌하면 그놈의 집안을 망하게 만들까? 상현아, 넌 명석하니까, 그 방법을 알 것 아니냐?”

형님, 나도 형님과 무엇이 다르겠소. 오가놈이 그럴 줄이야. 지금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지만 찾아보겠소. 나도 그놈, 오가놈의 패악을 가만 두고 보지 못하니까, 형님,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억울해도 우리가 힘을 키울 수밖에.”

상현이가 칠성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항상 든든했던 칠성이의 등허리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껏 칠성이의 가슴팍이 이렇게 흐느끼는 건 처음이다. 칠성이 형의 어깨와 가슴팍은 크고 넓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칠성이형과 원씨 아저씨가 없었다면 마을에서 아마 외톨박이로 살아왔을 거다. 칠성이형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그랬을 거다.

어찌해야 할까, 형을 어찌 위로해야 하나?’

상현이는 아무리 궁리해도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오가 놈의 이중계약을 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한다고 사람들이 계약서 같은 걸 가져오면 읽어 주고 조언을 해 주는 상현이다. 윤지 아버지도 계약서를 가지고 와 상현이와 원씨 아저씨에게 한번 봐 달라고 했던 참이다. 오가놈의 수작을 미리 알아차렸더라면, 칠성이형이 오매불망 연모하는 윤지를 그렇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텐데. 칠성이형을 돕지 못했다는 게 못내 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내저었다. 오가 놈이 논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건 처음부터 계획적인 것 같았다. 관가에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눈치였다.

향리가 오가 놈 집에서 윤지 아버지와 삼자대면을 할 때였다. 오가 놈은 양반은 아니지만 재물이 넉넉한 편이었다. 마을사람들도 남의 땅을 붙이던 오가 놈이 어찌해서 재물이 생겼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상현이와 원씨는 오가 놈 대문 안에 들어섰다. 칠성이도 오가 놈 집에 오려 했었지만 원씨가 겨우 말렸다. 칠성이가 분을 참지 못해 오가 놈의 멱살이라도 잡는다면, 큰 싸움이 날 것이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장군감이라고 할 만큼 덩치 크고 힘 좋은 칠성이가 싸움이라도 일으키는 날엔 오가 놈의 면상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향리가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오가네 집 마당 평상에는 향리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오가 놈이 붙어 앉아 있었다. 윤지아버지는 허리를 굽힌 채 옆에 서 있었다.

나리, 이걸 보십시오. 분명 저는 땅을 샀습니다. 여기 수결 날짜도 있습니다. 제가 분명 한마지기를 샀다고 여기 쓰여 있지 않습니까? 제가 논 값 반은 물고, 나머지 반은 첫 해와 둘째 수확, 이년에 걸쳐 나눠 갚는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윤지 아버지가 향리 앞에 계약서를 펼쳐보였다.

. 자네 말대로 그렇게 쓰여 있군.”

향리는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내리 깔아 슬쩍 보는 시늉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맞지요. 제 말이 맞는 것이지요?”

윤지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헌데, 그게 말이네. 여기 날짜를 보게. 여기 수결 날짜가 사월 초삼일이네. 이미 그 논은 보름 전에 다른 사람한테 팔린 것이지. 그걸 몰랐나?”

향리가 여전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곁눈질로 윤지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구요? 그럼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요? 땅을 두 번 팔아먹은 사람이 잘못이지. 어찌 제 잘못입니까?”

윤지 아버지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허. 내가 땅을 팔았나? 나한테 왜 이러는가? 난 사리에 맞지 않다는 걸 말했을 뿐이네. 헤엠.”

향리가 헛기침을 하며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니, 그럼 땅을 두 번 판 놈을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논 값으로 지불한 돈을 돌려주라고 하든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윤지 아버지는 분에 찬 눈으로 오가놈을 한 번 흘겨본 후 다시 향리에게 언성을 높였다.

헤엠, 글쎄,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정 억울하면 관아에 가서 발고를 하게.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니. 발고를 했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헤엠. 난 이만 바빠서 가봐야겠네.”

향리는 평상에서 내려와 뒷짐을 지더니, 오가 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보곤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걸어 나갔다. 문가엔 동네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다.

헤엠. 뭐 구경났나? 왜 이리 보는 눈이 많아? 남의 땅을 모르고 산 놈이 무식한 거지, 허허, 하기사, 무식한 게 죄지, 죄여.”

향리는 뒷짐을 지고 사람들 앞을 휙 나가 버렸다.

윤지 아버지는 다시 오가 놈을 향해 읍소했다.

이보시게, 그럼 내가 준 논 값은 돌려주게. 그건 내 전 재산일세. 분명 나리도 땅을 두 번 팔았다고 하지 않았나!”

오가 놈은 향리가 앉았던 평상 가운데로 자리를 잡았다.

자네, 나한테 빌려간 건 기억이 안 나는가? 작년까지 이자만 쌀 열가마니는 족히 될 텐데, 그건 왜 안 갚는가? 난 그걸 이자로 생각해서 받은 건데?”

오가 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 뭐라고,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닌가? 빌린 돈은 빌린 돈이고, 내가 논 일궈서 갚는다고 했잖는가, 자네도 그러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리 말을 바꾸는가!”

윤지 아버지가 오가 놈에게 큰소리를 쳤다. 곧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였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양반도 아닌 오가 놈이 재물이 늘어나면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랬는가? 그런 말 하는 거 누가 듣기라도 했나. 저기 사람들이 병풍같이 서 있으니 물어보세.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대문가에 있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그 말은 계약서를 쓰기 전에 둘 사이에 나눈 이야기였다.

마을사람들은 오가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임을 누구나 알았다. 오가 놈이 돈이나 쌀을 빌려준 다음 딴소리를 해 여럿 피해를 입은 걸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은 오가 놈을 찾아가곤 했다.

대문가에서 지켜보던 원씨가 윤지 아버지를 데리고 삼거리주막으로 향했다. 오가 놈 뒤엔 향리가 있을 테고, 향리 뒤엔 목사가 버티고 있으니, 관아로 가봐야 소용이 없을 터였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내 갖고 있던 전 재산인데, 이걸 어쩌면 좋은가, 어찌,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있는가.”

윤지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진다며 연거푸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놈이 아주 고얀 놈일세, 이자에 이자를 물어 쌀 세가마니를 여섯마니로 만들다니.”

원씨가 탁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필시, 나를 옭아매려고 작정하고 시작한 짓이 틀림없어. 안 그러면 논을 이중으로 팔아먹는 짓까진 하지 않았을 걸세. 논을 헐값에 팔겠다고 접근할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남의 땅 안 붙이고 내 땅에서 농사 한번 지어보겠다고 욕심을 내다가.”

윤지 아버지가 저고리 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쳐 냈다. 논을 갖게 되었다고 탁주를 마시던 게 엊그제였다. 쉴 새 없이 눈물이 맺혔다가 흘러 내리는 눈가는 벌겋게 상기되었다.

처음부터 자네에게 논을 사라고 했단 말인가? 이상하네 그려. 그렇다고 관가에 발고하기도 어려울 듯 하이. 이미 그 향리 놈이 오가 놈과 붙어먹은 눈치일세. 발고를 해도 자네가 빌린 빚을 가지고 작당을 할 것 같은 눈치야. 향리 놈은 또 목사 놈한테 뇌물을 갖다 바쳤을 테고. 이 일을 어찌한다.”

원씨도 걱정스럽게 얘기했다.

그놈이 이상한 게, 윤지를 보는 눈빛이 이상했어. 처음부터 논을 사라고 집으로 찾아올 때도 윤지를 흘끔흘끔 보는 게 이상했고, 지금 생각하니까. 설마 아닐 테지, 지놈 마누라 죽은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지 아들놈과 윤지가 몇 살이나 차이난다고. 설마 아니겠지?”

윤지 아버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원씨를 쳐다보았다.

으음.”

원씨의 한숨도 깊었다.

그놈 마누라가 살아 있다면, 하소연이라도 해 볼 터인데, 이제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어.”

윤지 아버지의 주름이 불안한 듯 더 깊어만 갔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