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임최소현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8회) - 동학세상의 감동과 경이로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7. 07:00



짚신만 만들던 손병희는 어느 날부터 멍석도 만들고, 가마니도 만들고, 지붕의 영새끼며, 지게의 동바, 쇠고삐까지 만들어냈다. 짚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다. 그 속에도 도는 있었다. 벼는 낱알인 쌀을 사람에게 식량으로 주고, 볏짚마저도 이처럼 큰 소용이 되는구나. 어디 볏짚뿐이랴. 온갖 풀들이 그러하고, 가축은 가축대로 사람과 더불어 농사를 짓고, 뒷날에는 고기와 뼈와 가죽까지 모두 사람에게 내어 준다.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고 떠나는 것이라면, 최고의 영성을 가졌다는 인간인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줄 것인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주문 스물한 자를 외우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영겁처럼 길게 오갔다. 드디어는 생각 없는 자리가 몇 시각이고 이어지기도 했으며, 번개처럼 스치는 이치와 깨달음이 꼬리를 물고 무궁으로 깊어졌다.

그는 수운 대선생님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도 어렵게 구해 되풀이 읽고 또 읽었다. 그리하여 날이 가고 해가 바뀌고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2년 전의 손병희는 없었다. 말수가 적어지고, 외양에서 위엄과 기품이 눈부시게 빛났다. 무엇보다 눈빛이 달라졌다. 새벽 샘물처럼 맑고 깊어졌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았고, 어머니와 부인이 불편할 새라 집안 궂은일, 힘든 일을 모두 챙겼다. 충청도에서도 이름난 한량이자, 난봉꾼, 말술에다가 사나운 싸움패였던 그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즈음의 어느 날 손병희는 다시 해월 선생 앞으로 나아갔다. 해월은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손병희는 아무 말도 없이 큰 절을 올렸다. 해월이 그만큼의 깊이로 마주 절하여 답하였다.

해월이 다가와 손병희의 손을 잡았다. 두 배는 족히 됨직한 손병희의 손이 지푸라기처럼 앙상하게 마른, 가벼운 스승의 손안에 안겨들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손병희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부터 손병희는 해월 선생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해월 선생을 따라 전국 각지를 돌며 선생이 하는 일을 묵묵히 거들었다. 해월이 가는 곳은 어느 고을 할 것 없이 가가호호 주문 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학 도인들도 자신감이 넘쳤다. 관의 탄압은 날로 가중되었으나, 더 이상 동학 도인임을 숨기고 사람 눈을 피해 다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 발 벗고 나서 구명하며 세를 넓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무극대도의 정론을 펼치고 싶어 했다.

한편, 도인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그 기회를 헤집고, 동학 금압을 빙자하여 도인들의 재산을 착취하고, 위해를 끼치는 사례도 급증하였다. 그러나 당하기만 하고 숨거나 도망치던 예전의 도인들이 아니었다. 시나브로 도인들의 중론이 수운 대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동학과 도인들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공론화하자는 데로 모아지고 있었다. ‘신원운동.’ 성리학의 유생만이 양반이 아니라 동학을 하는 도인들도 반상의 구별을 넘어선 참된 선비임을 밝히고 주장하는 길을 새로이 여는 중이었다. 움츠렸던 시절에는 감히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길이 열리자 마음과 기운이 급속히 모아졌다. 되도록 수많은 도인들을 동원하여 각도의 감사에게 당당하게 그들의 뜻을 전달하기로 했다.

189210월 손천민의 집에 도소가 마련되었다. 해월 선생의 소집 통문이 각 접에 전달되자 공주에는 수천의 동학 도인들이 모여들었다. 서병학, 김연국 등이 주도하여 마련된 의송단자가 감영에 전달되었다.

방금 서양 오랑캐의 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뒤섞여 있고 왜놈 우두머리의 독이 외진에 도사리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절치부심하는 일이다. 심지어 왜놈 상인들은 각 항구를 두루 통하여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얻는 이익을 저들이 마음대로 조종하니 돈과 곡식이 마르고 백성들이 지탱하고 보전하기 어렵다. 심복 같은 땅과 인후 같은 장소의 관세 및 시장세와 산림과 천택의 이익마저 오로지 바깥 오랑캐에게로 돌아가니 이것이 또한 우리들이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바이다.”

수운 대선생의 신원을 호소하고, 동학의 탄압을 금해 달라는 호소도 들어 있었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탐관오리의 일탈과 외세의 횡행을 규탄하며, 의로운 뜻을 모아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워 가자는 요구까지 갖춘 당당한 글이었다.

처음에는 꿈쩍도 않던 조병직 감사는 수천의 도인들이 일사불란 하고 의연히 요구하기를 계속하므로 마지못하여 각 군에 감결을 하달했다. 그러자 해월 선생은 일단 도인들을 물러나게 했다. 감결의 내용인즉 동학 도인들을 무고히 해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나 각처에서 핍박을 입고, 해를 입는 도인들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11월에는 삼례에 전라감사에게 다시 동학에 대한 금압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모인 도인의 수는 1만을 넘어섰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도인들은 말도 다르고 얼굴도 낯설었으나 누구 하나 서먹한 이가 없었다. 모두 형제요 부모 같았다. 처음 보는 이들이 얼싸안고 눈물 바람하기 일쑤요, 집안 안부 묻기를 스스럼없이 하였다. 여기저기서 사돈이 맺어졌고, 중신애비 중매쟁이가 숱하게 생겨났다.

아무 말씀도 마시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 모두들 고맙고, 또 고맙소! 한울님, 스승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목소리로 외치는 감사의 소리가 물결 넘치듯 무리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동안 쫓겨 다니며 음지에서 숨죽여 살아왔던 도인들은 평생 보지 못하던 동무의 무리에 스스로 놀라고, 마음을 모아 하나 된 하늘님의 세상에서 도를 깨치는 기적들을 목도했다. 그들은 난생 처음 접하는 동학 세상의 감동과 경이로움을 만끽하였다.

그러나 한편의 현실은 엄연하여서, 전라감사의 감결 내용도 충청감사의 것을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두 감사 모두 동학은 나라에서 금하는 바이므로 그것을 근본적으로 풀어내는 일은 자기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결국 한양으로 나아가 임금님께 도인들의 뜻을 전해야 한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18932, 광화문 앞에서 임금님께 엎드려 교조신원의 품의를 전달하게 되었는데, 손병희는 아홉 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는 밤새 여러 생각들로 뒤척이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녘에 일어나 기도를 마친 후 서둘러 짐 보따리를 쌌다. 관졸의 눈을 피하려면 날이 밝기 전에 서둘러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부인 곽씨와 어머니가 정성스레 챙겨준 옷 보따리와 미숫가루, , 주먹밥 등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나서는 길이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하고 희망찬 기분이 들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해월 선생과 동학 접장들의 믿음직한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학, 개벽!’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벅찬 말들이다. 아무 희망 없이 술과 원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에게 이 세상 존재의 이유를 환하게 알려주었다.

광화문 복합상소 이후 동학의 주요 일꾼들이 충청도 청산현에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운 대선생의 순도 향례를 마친 뒤 동학 도인들의 단결된 힘을 응집하여 신원운동을 다시 한 번 벌여 나갈 것을 결의했다. 해월 선생은 통유문을 보내 최대한 많은 동학 도인들이 보은 장내리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2015/06/20 - [소설/임최소현]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7회) - 도(道)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