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9회)-2장 1892년 공주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3. 07:00

 

 21892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그 선비였다. 의령은 억지로 필사하려던 붓을 놓고 자신을 쳐다보던 선비를 떠올리며 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저수지에 빠져 죽으려 들어가기 직전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세차게 뺨을 맞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뺨을 맞고 정신을 차리자 물에 젖은 몸이 추위와 무서움으로 정신없이 떨렸었다. 아픔 때문이었는지 슬픔과 무서움 때문이었는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참아왔던 서러움이 한순간 몰려왔다. 자신의 치부를 몽땅 들켜 버린 사람이라 더욱 더 미웠다. 그러나 미우면서도 고마웠다.

의령은 그동안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자신을 질책하며 쏘아 보던 선비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라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살았다.

그를 다시 본다 해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모습보다 더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최상의 품질로 보이는 크고 넓은 갓을 쓰고 엷은 색의 쪽빛으로 색을 낸 도포에 남색의 술띠를 맨 모습이 예상대로 높은 벼슬을 가진 사대부의 지체 높은 양반 자제가 틀림없었다.

수시로 떠오르는 그의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가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마냥 아련했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그를 알아보았다.

세상 모든 일에 무심해 보이는 눈이었지만 화가 났을 때는 얼음도 녹일 듯 차갑고 격렬함에 오금이 저렸었다. 그래서 더욱더 오만방자하게 입을 놀렸는지 모른다.

오늘 감영에서 자신을 쳐다보던 차가운 눈빛은 여전했지만 호기심으로 반짝 빛이 나는 걸 보았다. 들일을 하지 않고 방안에서 서책만 보는 양반치고는 얼굴빛이 적당히 그을려 있었고 반듯하고 시원스런 콧날과 무표정했던 입은 의령과 눈이 마주친 순간 슬쩍 비틀려 올라간 것 같았다. 그 순간 의령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반가운 웃음이었을까? 그는 그런 의령을 외면하며 곧바로 눈길을 돌렸다.

아마도 그 선비도 의령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가 그것을 느꼈다. 의령은 선비를 언젠가 한번이라도 마주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감영에서의 갑작스런 만남이 낭패스러웠다.

속옷까지 모두 찢겨 속살이 다 드러났던 수치스러운 몰골과 고마움도 모르는 철면피하고 안하무인으로 비쳤을 것을 생각하면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 서 있던 자리에 구멍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만나면 고맙고 미안했다는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자신의 가장 처참하고 비참했던 상황을 목격한 사람. 그럼에도 의령을 죽음에서 구해준 은인.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가 또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이중적인 심정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어 의령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의령 성님, 큰어머니가 찾으시는데요.”

잠시 후 성연이 조금 열려 있던 방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알았어. 곧 갈게.”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떨쳐버리듯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건너갔다.

의령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필사한 서책을 읽고 있던 어머니 배씨 부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 책도 재미나구나. 아이들이 좋아하겠어.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서 다 들었누?”

배씨 부인이 그녀가 필사했던 책을 펼쳐보면서 물었다.
장에 나갈 때 만난 어르신들에게 물어보거나 동네의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면서 들은 것들을 저야 옮겨 적은 것뿐인 걸요.”

그러게 어릴 적 많이 들었던 얘기들을 이렇게 모아 놓으니 재미나고 좋구나. 심청전이나 운영전 같은 것들은 어린애들이 이해하기 힘들지.”

어른들은 어린애들이 이야기 해 달라고 하면 가난해진다고 그리 썩 좋아하진 않아요. 하하

의령이 큰소리로 웃었다. 배씨 부인이 그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의령을 대견스럽게 쳐다보는 눈길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웃는 얼굴은 곧바로 걱정스런 얼굴로 변했다.

장날에 애들 모아놓고 서책 읽어주는 것은 당분간 조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또 잡혀 가면 어찌하누.”

그 목소리에 의령은 살짝 풀어진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수록 계속해야지요. 그놈들이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저런 것 따지면 아무것도 못하니까요.”
그래도 조심해라. 아버지도 집에 안 계시는데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 하누.”
명심할게요. 아버지에게 언제 도착하신다는 기별은 있으셨나요?”

그녀는 배씨 부인의 염려스런 마음을 돌리려 화제를 바꿨다. 아버지 윤상오의 장기간 부재는 두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보름 정도 예상하고 가셨지만 아직 모르겠구나. 상주까지면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니 기다려 봐야지. 그나저나 가신 일이 잘 되어야 할 터인데.”
서장옥, 서병학 접장님들과 함께 가셨다지요? 해월 선생님을 뵙고 요청하신 일이 잘 풀릴지 모르겠네요.”

윤상오는 서장옥, 서병학 등과 함께 상주 공성면 왕실에서 은거중인 해월 선생을 만나러 며칠 전부터 출타 중이었다.
서학인 천주학은 벌써부터 금압에서 풀려났는데 우리 동학은 수운 대선생이 억울하게 죽은 누명도 풀어주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또 있겠니? 해월 선생님이야 20년 전 영해거사의 실패 때문에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신다는 건 아는데도 워낙 세상이 어수선하니 아버지와 서장옥 접장께서 더욱 더 서두르시는 것 아니겠니? 관에서는 동학의 동자만 들어도 무조건 잡아다가 매질을 해대지만, 결국은 돈을 뜯어 먹자는 수작이 아니냐? 장터나 나루마다 왜놈, 청나라 놈, 서양놈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왜 유독 동학만은 금단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에휴.”

부인이 긴 넋두리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나루에 매일매일 쌀이 태산처럼 쌓이고, 또 그만큼씩 배에 실려 북쪽으로 가는 건 세곡이고, 남쪽으로 가는 건 모두가 왜놈 나라로 팔려 가는 거라네요. 조선 백성들은 굶어 죽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많은 쌀을 왜국으로 보낸다니.. 뿐만 아니라 장터에서 왜놈들과 청나라 놈들, 심지어 서양 놈들까지 극악한 행패를 부리는데도 어쩌지 못하니 사람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나루마다 일본으로 실어 가기 위해 쌓아 놓은 쌀더미가 산처럼 높았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은 대부분 조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빼앗은 수탈의 열매였다. 그로 인해 시중에는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굶어죽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

 

 

"벼, 쌀" by hangidan is licensed under CC BY-SA / Cropped from original

 

이렇게 당하구만 있을 수야 없겠지. 여기저기서 배고픈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데도 어째서 나랏님은 아무런 대책이 없는지 답답하구나.”


장터에 나도는 말로는 궁에서는 임금이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해요. 왜인, 청인과 서양 여러 나라에서 꼼짝도 못하게 옭아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민중전과 민씨 일파의 횡포야 어린애도 다 알고 있는 얘기고요.”


“10년 전 임오군란 때도 난리가 아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바뀐 것이 없고 왜놈, 청나라 놈도 모자라 온 세상 나라란 나라 사람들은 죄다 조선사람의 속고쟁이까지 벗겨 가려고 눈을 뒤집고 있는 것이 지금 형편이라고들 하더구나. 한양에서 이리 떨어진 곳 사람들까지 그리 훤히 알고 있는 일을. 쯧쯧.”


…….”

둘은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아녀자들이지만 나랏일만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잠시 후 의령이 넌지시 말했다.

저 어머니. 그 선비님을 봤어요.”


? 선비? 누구?”

의령은 의아하게 쳐다보는 배씨 부인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렸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