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김현옥

작품 [님, 모심] -10회 최경상, 도를 닦다(김현옥)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4. 02:00

 

 

최경상, 도를 닦다

 

 

 

해월은 통곡했다. 강수도 따라 울었다. 해월은 이 목숨을 오직 도를 위하여 쓰겠노라 다짐하였다. 강수도 남은 목숨을 해월을 위하여 쓰겠다고 결심하였다.

해월은 이윽고 울음을 멈추었다. 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툭 트이며 기운이 맑아졌다.

맑고 차가운 산바람을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높은 태백산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굽이굽이 능선의 이쪽과 저쪽은 양지와 음지가 섞여 있었다. 빛과 그늘은 둘이 아니었다. 산봉우리들을 그윽이 바라보니 부드러운 흙 가슴으로 뼈들을 감싸고 있었다. 산봉우리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건 없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았다. 가파른 벼랑에 군락을 이루며 서 있는 소나무들이며 회양목들이 거친 바람에도 꿋꿋하게 견디고 있었다. 바람 불면 허리를 숙였다가 지나가면 금세 허리 펴고 햇빛을 머금었다. 자기 자리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해월은 바위 위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강수도 그 곁에 앉았다. 주문 암송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내 이름은 경상(崔慶翔)이었다. 어머니의 친가인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나 이듬해에 고향인 영일군 신광면 터일로 와 그곳에서 자랐다. 내가 다섯 살 때, 웬일인지 아버지가 밖에 나가 놀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동네 어귀 타작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집쪽에서 오며 너 어매가 애 낳는단다.’고 하는 소리에 집으로 달려갔다. 마당에 들어서자 방안에서 어머니의 ~악 아~!” 하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무슨 일인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관심도 없이 왔다 갔다 서성거리고 있고, 이웃집 아주머니도 웬일인지 희색을 띠고 분주히 방을 들낙거리는 게 더 서러웠다. 얼마가 지났을까, 방에서 아주머니가 붉은 갈색을 띤 아기를 안고 나와 울지 말고 와서 봐라. 니 동생이다.’ 했다. 멀찍이 서서 쳐다본 아기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어제 그 징그럽던 살덩이가 고운 아기로 바뀌어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낳고는 산후 조리가 잘못되어 얼마 후 돌아가셨다. 상여가 마을에서 떠나갈 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아버지와 함께 상여 뒤를 촐랑촐랑 따라갔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모셔 왔다. 정 씨라 했다. 새어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먹을 것을 잘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밥을 주었지만, 안 계시면 새어머니는 친척들을 데려와 자기들끼리만 먹고 말았다. 그때마다 굶주린 배를 안고, 우는 여동생을 달래곤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돌림병에 걸려 온몸에 열꽃이 피더니 얼마 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러자 새어머니도 집을 떠나 버렸다. 겨우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었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여동생과 먼 친척 집에서 머슴살이, 식모살이를 했다. 어린 여동생이 한겨울에도 찬물에 설거지하고 빨래하느라 손등이 터져서 피가 배어난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남몰래 울었다. 친척 집에서도 배가 고픈 것은 여전했다. 사람들은 나를 머슴놈이라고 부르며 마구 부려 먹고 무시했다. 배고픔이나 추위, 힘든 일은 참을 수 있었으나 머슴놈이라고 비웃는 말은 죽기보다 싫었다.

 

터일 안쪽 올금당 마을은 닥나무가 잘 자라고, 시냇물이 풍부했다. 그곳에 제지소가 있어서 겨울이면 많은 사람이 일하러 들어왔다. 열일곱 살에 제지소에 들어갔다. 행동거지가 바르고 성실하며 붙임성이 좋다고 사람들이 나를 칭찬했다. 아버지를 닮아 손기술도 뛰어나 종이를 잘 만들었다. 내가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아서 잘 팔렸다. 덕분에 주인의 신임을 얻어 흥해, 영덕, 경주 등 거래처에 한지를 날라다 주는 일을 하면서 인근에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열아홉 살 되던 해 흥해에 사는 과부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일찍 청상과부가 되었지만, 재산이 많다고 혼인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남의 덕에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대신 먼 일가의 중매로 흥해 매곡에 사는 손 씨를 아내로 맞았다. 손 씨는 마음씨가 곱고 심지가 곧아서, 내 마음에 흡족했다.

 

스물여덟 살 때 경주 신광면 마북동으로 이사했다. 한두 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내게 집강 일을 맡겼다. 정직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관아를 찾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고 울력이나 마을 집집의 대소사를 무난히 처리해 나갔다. 집강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마을 어른들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관아를 출입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관의 비리와 서리들이 부리는 농간을 알게 됐다.

 

마북동 땅은 척박하여 생산량이 넉넉지 못했다. 서른세 살 때 식구가 늘어나자 검곡으로 이주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기로 했다. 거친 산을 일구며 한 뼘의 땅이나마 내 땅을 갖고 싶었다. 몸은 고단했으나, 방 한쪽에 쌓아 둔 곡식 자루를 보면서 마음은 편안했다.

 

 

신유년(1861) 서른다섯 살 때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경주 용담에 신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알려 주었다. 최씨 집안의 먼 친척인 수운 최제우가 도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곧 용담으로 찾아가 동학에 입도했다. 한 달에 두세 번 용담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경주 인근의 상민들은 물론이고 학식이 깊은 유생도 있었고,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다.

 

8월 중순경이었다. 수운 스승님의 제자들이 천어(天語)를 경험한 이야기들을 했다. 모두 열심히 수행하여 천어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주문을 외웠지만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정성이 부족함을 느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스승님께 절을 올렸다.

날이 저물었는데 70리 길을 어떻게 가겠느냐?”

수운 스승이 말렸다. 그러나 밤새도록 걸어 금등골 집으로 돌아왔다. 나도 천어를 체험하고 싶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강력한 수련을 실천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내 뜻을 설명했다. 아내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내 뜻에 따라 주었다.

이튿날부터 일도 하지 않고 수련에만 집중했다. 두 달간 밤낮으로 주문을 외웠으나 천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더욱 전념하기 위해 멍석을 방문 앞에 쳐서 햇빛을 가렸다. 캄캄한 방에서 온종일 주문만 지극 정성으로 읊었다. 한 달이 또 지났다. 그래도 천어는 들리지 않았다. 정성이 부족한가 싶어 음식을 줄이고 수련에 몰두했다. 다시 스무 날 동안 집중했으나 몸만 수척해졌다.

 

보람도 없이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멍석을 들치고 밖으로 나오니 보름을 며칠 앞둔 달빛이 환한 한밤중이었다. 한겨울이라고는 하나 군불 땐 방에서 수련에 전념하다 보면 온몸은 땀으로 젖곤 했다. 그날도 계곡으로 내려갔다.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살갗이 찢어지는 듯,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 수련을 하는 동안 뜨거운 기운이 퍼지며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 날도 찬물 속에 들어가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공중에서 엄중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찬물에 갑자기 들어앉는 것은 몸에 해로우니라.”

나는 깜짝 놀랐다. 드디어 나에게도 감응하시는구나! 감격했다. 그런데 한울님 말씀치고는 너무 평범했다.

 

그 뒤로는 방안에서 수련했다. 밤낮이 없는 어둔 방안에 있어도 마음은 온통 환한 빛 속에 있었다. 세상 살아가는 수많은 이치가 밝게 해득이 되었다. 때로는 무념무상의 시공간에 들어 꼬박 하루를 앉아 있기도 했다. 눈이 녹아 길이 열리자 영덕에서 친구가 기름 두 병을 가져왔다. 그제야 반 종지 기름을 부은 이래로 서너 달이 지났음을 알았다. 영덕의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부터 벅찬 희열이 솟구쳐 올랐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