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10회) 이인한 기포령을 올리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6. 14:15

접주님, 저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인한이 천관산에서 윤범식을 만나고 내려오는 새벽, 한 마을에 사는 열네 살 최신동이 사립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아직 미성년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거라.”

이인한은 뺨에 분홍빛 기운이 흐르는 최신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올시다. 저도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접주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최신동의 가는 눈에는 벌써부터 각오가 들어 차 있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도인들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도 않는 애들더러 싸우라고 해서는 안 된단다. 싸움이란 스무 살이 넘은 사람만 해야 하는 일이지.”

아니옵니다. 저는 접주의 재주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가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도 죽음 목숨이나 마찬가지이죠.”

이인한의 손을 붙들고 애원하는 최신동은 이미 몇 달 전부터 혼자 이인한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마을 앞 제각에 정좌를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어깨 너머로 익혀둔 동작을 몸으로 펼쳐 보이곤 했다. 지난 해에 환곡의 이자를 못 내서 잡혀가서 곤장질을 당하고 들어온 아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때마침 닥친 전염병으로 죽고 말자 어미마저 따라 죽어 버린 탓이었다. 한때 최신동은 정신을 잃고 부모의 묘가 있는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올해 들어서 눈빛이 가라앉으며 차분한 기색을 되찾았다.

기다려 보거라,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이니 반드시 쓸모가 주어질 테니까.”

이인한은 최신동의 등을 두들겨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러나 최신동은 먹을 것을 보채는 어린 아이마냥 이인한을 가로 막으며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아니되옵니다, 접주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다시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때린 옥졸을 제 두 손을 목을 졸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아버님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저를 전투에 참가하게 해 주십시오.”

이인한은 여전히 표정 없는 목소리로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동학은 치사한 관졸들을 때려 눕히는 것이 목표가 아니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관졸들과 벼슬아치들, 욕심꾸러기 양반들이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 말이야.”

최신동이 이인한의 손을 잡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저렇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벼슬아치들과 나누며 살라고요? 저들은 모두 탐진강에 쳐 박아야 한다고요.”

최신동은 눈앞에 관졸들이 늘어선 있는 양 소리를 치며 날 뛰고 입가에 허연 거품을 물었다. 이인한은 최신동의 분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이인한은 최신동을 말에 태웠다. 그리고 채찍을 휘두르며 연지리를 빠져 나갔다.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 가자!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노라.”


"벼 (Oryza sativa) 2014년 9월 12일" by 영철 이, used under CC BY


들판에는 가을이 오고 있었다.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이삭들이 살랑거렸다. 더위도 가시고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하루하루가 달랐다. 윗녘에서는 이미 관군들과 전투가 시작되었고, 해남과 장흥에도 특별 군대가 파견되어서 동학군을 잡아들일 준비를 착착 해 오고 있었다.

이이한은 삼십 리 길을 달려서 장녕성 아래로 갔다. 그리고 최신동에게 네 개의 문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부사의 목을 칠 것이다. 너의 각오가 그러하다면 너는 부사의 목을 칠 수 있겠느냐?”

최신동이 깜짝 놀라 자기의 목을 잡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쳐 댔다.

저에게 시켜주시기만 한다면 아비의 원수를 기꺼이 처단하겠습니다.”

최신동은 장녕성의 곳곳을 올려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인한의 장녕성의 지세를 꼼꼼하게 살폈다. 탐진강으로 이어지는 동문과 서쪽 산으로 이어지는 서문, 그리고 평평한 남문은 아마 민보군이 지키게 되리라.

우리의 적은 관군만이 아니란다.”

이인한은 바위산으로 덮인 동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성 밖에서는 민보군과 보부상이 우리들을 공격할 거야. 이미 민보군도 세력을 우리만큼 넓히고 있으니 그들이 관군보다 더 강한 적일 수도 있다.”

최신동은 이인한의 하는 소리를 마치 다 알아듣는 양 묵묵히 성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이인한에게 물었다.

정령 싸울 마음이 있다면 먼저 싸움터를 둘러 보아야 한다. 어디로 공격을 해야할지 물러날 때는 어디로 피해야 하며, 적을 쫓아내기에 적합한 곳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느냐?”

최신동은 이인한의 말을 들으며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투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총알이 튀고 포가 터지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관군들을 모두 동문으로 쫓아서 탐진강으로 빠져 들어가게 할 참이었다.

동문은 바위투성이로 이어진 절벽이어서 관군들을 몰아넣기만 하면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질 방법밖에 없었다. 절벽 아래는 시퍼런 탐진강이 흘러 내렸다. 사람 깊이의 몇 배가 되는 깊이의 강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인한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건산으로 갔다. 건산을 지나면 강진읍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지세를 따지자면 장녕성은 우리에게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강진성이나 병영성을 우리에게 불리할 수도 있어. 다만 구원군이 오기 전에 점령을 하면 식은 죽 먹기이지. 이미 회령진의 수졸들은 전투를 치를 수 없는 만큼 나약해져서 쥐방울 드나들 듯 남은 무기를 탈취할 수 있으니까 그 소문이 강진성인들 날아가지 않으리오만.”

이인한은 소리를 내어 껄껄 웃었다. 최신동은 이인한의 등 뒤에서 강진성과 병영성을 돌아보며 전투를 치를 날을 머릿속에 그리며 혼자 고함을 쳐 댔다.

이인한은 다시 말을 돌려 묵촌으로 들어갔다. 이방언이 묵촌의 느티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이인한을 맞이했다.

대접주님, 기포령을 내리도록 합시다.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에게는 불리합니다. 전국의 도인들이 이미 들고 일어나서 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장흥에서도 빨리 날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방언은 수염을 내리 쓸으며 호방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이미 조직을 끝냈소. 빨리 다른 지역의 도인들에게 거사를 준비하도록 하시오.”

이인한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갑오년이 밝아오자마자 준비하기 시작한 거사는 이제 인원동원이 다 이뤄졌고 식량도 비축되었으며 무기도 마련되었다. 각 지역에서 참가할 도인의 숫자를 파악하고 진열대를 정비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방언은 이인한에게 평상에 앉도록 하고 멍석을 깔아 주었다. 그리고 이인한은 멍석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인한은 장흥의 산들을 멍석 위에 그리고 쓰윽 탐진강을 그리고 나서 지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서 도인들이 모이려면 일단 가을걷이가 끝나야 하오. 그리고 보름간의 말미를 줘서 섬마을에서도 배를 타고 포구를 건너서 산길을 넘어와야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미리 기별을 띄우도록 합시다.”

최신동은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서 이방언과 이인한이 머리를 맞대고 나누는 이야기를 정신을 팔고 들었다. 그에는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였지만 이인한이 자기를 데리고 온 것은 전투에 참가해줄 뜻이 있는 것이리라 여기며 홀로 실실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