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 (10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7. 07:50

 

 

“취회 소식은 들었소. 고생들 하셨소.

이창구가 순섬이와 함께 서택순의 집에 들어서자 해월 선생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마루로 나와 그들을 반겼다.

“감결의 내용이 충청 감영에서 내린 것과 똑같아서 실망하는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해월 선생은 이창구의 말에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 문제는 대접주들이 좀 더 모이면 대책을 논의키로 하고 방에 들어와 잠시 쉬구려.”

해월 선생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그래 김순섬 도인이라 했소?”

“네.”

순섬이는 해월을 바라보았다. 몸은 깡말랐으나 눈빛만은 영이 살아있는 듯 번쩍였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전에 이창구가 해월 선생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얼핏 비추었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그러나 이창구가 이름을 강조할 리는 없었을 터였다.

“동학을 해 보니 어떠시오?”

해월 선생은 자신의 보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순섬이를 바라보았다.

“살면서 수많은 바람이 저를 거쳐 갔어요. 고추바람을 맞으면 삶이 매서웠습니다. 칼바람을 맞으면 죽을 것 같았고, 산들바람을 맞으면 살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저 자신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바람을 원망하고, 바람을 미워하며 비참한 저의 운명을 한없이 괴로워하기만 했지요.

“호오, 그래요…?”

“그러나 동학을 하고부터는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결국 흔들리는 것은 저 자신이지 바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음공부를 하여 마음기둥을 튼튼히 하면 할수록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창구는 순섬의 말을 들으며 적이 놀랐다. ‘아, 저만큼의 깊이로 벌써 깊어졌는가.’

해월은 잠시 얼굴을 들어 순섬을 가만 쳐다보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좋은 공부를 하셨습니다.

순섬은 해월 선생이 ‘고맙다’고 하는 말에 왈칵 눈물이 치솟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아아, 아시는구나. 내 아픔을….’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지난날의 아픔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밀려오며, 그것들을 다시 깨끗이 씻어내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에 감개가 무량하였다.

순섬이는 짚신을 삼고 있는 해월의 손을 바라보았다. 꺼칠했지만 손놀림은 수를 놓는 여성들의 손길처럼 정성스러웠다. 짚을 대하는 눈길 또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했다. 짚은 어느새 완벽한 짚신이 되어 있었다. 순섬이는 해월 선생의 정신력에도 놀랐다. 잠시 머물고 있는 제자의 집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짚신을 삼는다는 것은 보통의 정신력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도인들 말에 의하면 허구한 날 피신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매일 짚신을 삼는다고 했다.

“이거 하나 신어 보겠소?”

해월 선생은 순섬이에게 방금 만든 짚신을 건넸다.

“신어 보구려.”

이창구는 해월 선생으로부터 짚신을 받아 순섬에게 주었다. 순섬은 송구스러웠으나 해월 선생의 정성이 느껴져 얼른 일어나 신어보았다. 발에 꼭 맞았다. 본인 자신이 삼아도 그 정도로 꼭 맞지는 않았다. 해월 선생의 눈썰미에 순섬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해월 선생을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선생님, 짚신을 삼을 실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세요?”

순섬은 괜한 질문을 했나싶어 이창구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이창구가 엷은 미소를 짓자 해월 선생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 해월 선생은 긴 묵상에 잠긴 후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짚신은 밥이에요. 도인들이 집을 나설 때 봇짐 속에 넣었던 가래떡이요, 백설기요, 미숫가루예요. 길이지요. 도인들이 숨죽여 걷는 들길이요, 산길이요, 물길이에요. 시간이기도 해요. 도인들이 걸어 나섰던 새벽어둠이요,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이요, 노을 핀 저녁이에요. 몸이에요. 엄지발가락이요, 손바닥과 발바닥이요, 그들의 쉼없는 움직임이지요. 밥줄이에요. 장터에서 오고가는 흥정이에요. 대화지요. 짚신을 삼는 자와 신는 자의 긴밀한 소통이에요. 놀이고 휴식이기도 해요. 아이들이 개울물에 띄워 보는 배요, 사람들이 느티나무 아래서 즐기는 한가함이에요. 세상 만물이에요. 그 안에서 씨앗 망태기를 보고 낫을 보고 도리깨와 방아를 보지요. 생명이지요. 저는 볏짚 속에서 뛰노는 메뚜기를 보고 우렁이를 보지요. 긴 호흡이에요. 두려움, 경쟁, 반목의 반 생명을 내쉬고 자비, 평화, 생명을 들이쉬는 시간의 연속이에요. 하늘님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떠받치는 하늘님입니다.”

배탈이 나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월 선생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고요했다. 짚신 하나가 그렇게 귀한 존재였던가? 순섬이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상 만물이 모두 짚신과 같을 터, 귀중치 않은 것은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세상 만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할 수가 없지 아니한가? 시간은 멈춘 듯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순섬은 해월 선생이 준 짚신을 넣으려고 이창구의 바랑을 찾았다. 그것은 해월 선생의 보따리 옆에 있었다.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해월 선생 곁에는 항상 보따리가 있다고 도인들은 말했었다.

“선생님, 도인들 말에 의하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보따리를 옆에 두고 계신다던데요?”

순섬은 밝은 미소를 띠며 해월 선생을 바라보았다.

“음…. 보따리는 제 생명과 다름없어요. 보따리 안에는 수운 선생의 말씀이 쓰여 있는 문서와 통문 쓸 종이가 들어 있지요. 이 도인의 바랑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순섬은 바랑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라 머뭇거렸다.

“삼례 모임을 알리는 통문이 있습니다.”

이창구가 대신 대답을 했다.

“통문이 무엇인가요?”

“….”

순섬은 머뭇거렸다. 통문이란 무엇일까?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으로 중요한 사항이 적혀 있는 종이가 아니던가?

“통문은 단순히 글씨가 적혀 있는 종이가 아니오. 그곳에는 하늘이 있고 수운 대선생이 있고, 정원갑이 있고, 당신이 있고, 당신 아들 찬고가 있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있소. 통문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이자 생명의 노래인거요.”

해월 선생은 바랑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순섬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창구는 입 매무새를 다졌다. 소중한 통문이었다. 갑자기 마당이 시끌시끌했다. 해월 선생을 뵈러 오는 또 한무리의 도인들이었다. 얘기가 중단되었다.

다음날 순섬이와 이창구는 해월 선생에게 큰 절을 올리고 서택순 집을 나섰다.

“앞으로 응구치구해서는 안 되겠소.”

“네? 응구치구라니요?”

순섬이가 이창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즐겨 쓰시는 말이오. 매사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이창구는 순섬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