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의 꿈(10회) - 개항(1)
4장 개항
조지서 일을 하는 동이 아버지 한순구는 구월산 자락 아래에서 평생 종이를 만들며 보냈다. 종이 만드는 일은 워낙 품이 많이 들고 힘이 드는 일이었다. 산에서 초군들이 닥나무를 캐 가지고 오면 그 다음 일은 조지서 일꾼들 차지였다.
“아흔아홉 번의 손길이 가야하는 거여, 정성이 부족하면 좋은 종이가 안 나온다.”
귀에 더깨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조지서에서 만든 종이는 중국에 보내는 진상품이었고 그들도 조선의 종이를 제일로 여겨 황제와 벼슬아치들만 쓰는 귀한 물건으로 알았다. 보얗게 마름질된 책 한권을 묶기 위해 조지서 일꾼들의 몸은 휘어지고 손바닥은 갈라져 거칠어졌다.
한순구는 아들을 조지서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종이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보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었다. 어려서는 병약하여 그저 튼튼하기만 바랐는데 동네에 유배 온 동학도인 백사길에게 글을 배우면서 점점 눈매가 영글어 가니 내심 기대가 크게 되었다. 백사길이 죽은 후에 마음이 힘들어 방황하는 아들을 다독거려 아예 역관 노릇을 하는 외가 쪽 친척에게 보내 공부를 시켰다. 다행히 동이는 외국말 배우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동이가 청나라 말과 일본 말을 두루 익혀 제법 말을 할 무렵 초리면의 부자로 소문난 우종수가 동이를 찾아왔다. 원산항이 개항이 되어 일본 사람들이 몰려와 식량을 사 간다는 소문이 나자 무역을 할 마음이 생겨 데리러 온 것이었다.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서양 세력이 조선에까지 눈을 돌려 통상을 요구할 때 주변 정세에 어두운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간신히 터지기 일보직전의 봇물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민씨정권이 들어서자 외교 교섭을 위해 부산에 파견된 모리야마는 밀정을 풀어서 모아들인 정보를 매일같이 외무성에 있는 상관에게 보고했다.
“조선은 아시아의 요충지로 세계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서로 노리고 있습니다. 속히 우리가 먼저 정벌하여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대원군보다 고종이 집권하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의 국방 상태는 어떤가?”
“생각보다 군대가 많이 허약한 것 같습니다. 실력 행사를 해서 일단 조선 군대가 대응하는 것을 본 다음 그에 맞춰서 적절한 방법을 쓰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조선에 대하여 최소한의 도발을 가하는 것입니다.”
일본군 군함 운요호가 서해안 난지도에 도착했다. 보트에 수십 명의 군인들을 나누어 타고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을 대며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했다.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무시하여 조선 군대가 발포하자 운요호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맹포격을 해왔다. 신식 무기를 받아들여 대포의 성능이 우세했던 일본군은 일거에 초지진을 점령하고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게다가 일본은 자기네가 오히려 국제법상의 피해를 당했다며 보상을 요구하면서 세 척의 군함과 팔백 명의 군대를 끌고 와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한편 개항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결국 전쟁을 우려한 조정은 조약 체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세 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자유로운 해안 측량을 허가할 것, 외교관의 자유로운 여행 허락, 조선의 곡식을 제한 없이 유출할 수 있을 것, 관세를 붙이지 않을 것.’ 등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압적으로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은 인천 부산 원산의 세 항구를 개방하고 무방비 상태로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탐욕 앞에 벌거숭이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종수와 함께 원산에 도착한 동이는 처음으로 본 쪽빛 바다, 그 무한한 광대함에 할 말을 잃었다. 원산 항구는 대여섯 개의 작은 섬들이 병풍처럼 나지막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주 보이는 갈마반도에는 붉은 해당화가 무리지어 피었고 쪽빛 바다를 감싸며 명사십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동이가 하염없이 바다만 쳐다보며 오래도록 아무 말이 없자 우종수가 웃으며 동이의 어깨를 슬쩍 쳤다.
“자네는 바다를 보는 게 처음인가?”
“예, 얘기만 들었지 처음입니다. 야, 이건 정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데요?”
“앞으로 이 바다 냄새에 아주 익숙해질 거네. 허허.”
그러나 바다의 풍광에 마음을 뺏긴 것은 잠시였고 동이는 곧 회오리 폭풍 속에 휘말린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한적하고 조용한 포구였던 원산은 개항이후 커다란 군함과 각국의 배가 정박하고 있었고 상인들과 부농들이 객주에 몰려들어 시끌벅적했다.
외국 상인은 객주에 몰려와서 조선 상인을 만나고 물건을 소개받았다. 동이도 제일 많이 붐비는 객주로 가서 외국 상인을 만나면서 개항장 분위기를 익히기기 시작했다. 동이는 객주 주인들에게 외국말이 유창하다고 소문이 퍼지면서 객주집마다 불려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느라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실은 그 덕분에 며칠 만에 객주 주인들은 물론이고 외국 사람들과도 서로 인사하며 지내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처지이기는 했다.
동이가 만난 외국 상인은 대부분 일본 사람과 청나라 사람이었다. 원산항 무역 거래의 80%를 일본 상인이 차지하고 나머지가 청나라 차지였다. 산더미 같은 식량들이 일본 배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본 동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동이는 쌀 한 톨도 소중한 것이고 없는 사람과는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만 알고 자랐다. 그러나 개항장에서는 밥에 담긴 소중한 의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돈으로 환산된 물건에 불과했다. 돈의 흐름을 쫓아 이리저리 몰리고 있었고 이익을 위해서 눈속임을 했다.
외국상인들의 눈빛은 물물 교환하러 온 자가 아니라 약탈자의 그것이었다. 곧 동이는 무역에 대한 환상이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다.
‘농민들이 애써 수확한 쌀이 저렇게 모두 실려 나가면 우리나라 백성은 무얼 먹고 살아야 하는 거지? 어디서 보충할 방도는 있는가? 나라에서는 도대체 이런 상황에 대해 무슨 대책을 가지고 있기는 한 건가?’
동이의 고심을 알 리 없는 우종수는 동이가 객주 주인들과 금세 사귀어 솜씨 있게 일을 하자 내심 흐뭇했다. 곡식을 사고파는데 관심이 있는 우종수는 동이가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닌 덕분에 꽤 많은 이익을 챙긴 것이다.
“지금 물량거래는 어떤가? 각국 상인들이 오고 가는 게 대단하네그려.”
“일본은 지금 곡물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습니다. 주로 쌀과 콩을 싸게 들여가서 자기네 노동자들에게 주로 공급하고 대신 자기네 쌀은 유럽에 비싸게 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앉아서 손해를 보는 꼴이 아닌가? 우리 쌀과 콩은 품질이 훨씬 나으니 가격을 좋게 매겨야 하네.”
“초창기라 쌀은 객주에 있는 중개인의 손을 거쳐 개항지로 집결되는데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에 버티고 앉아서 쌀값을 후려치고 있습니다.”
“눈치 보아서 쌀값을 내리자는 속셈인가?”
“예. 객주 여러 명과 거래를 하여 경쟁을 붙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어떤 물건이 오는고?”
“주로 면포를 영국에서 들여와 시가보다 비싸게 우리에게 넘기고 있습니다. 또 화장품과 보석 양주 같은 것을 들여와 파는데 주로 왕실이나 양반층에서 많이 사간다 합니다.”
조선의 쌀을 헐값에 사가는 대신 일본 상인들은 값싼 면직물과 공산품을 대량 유통시켰다. 기계로 만든 수입 옥양목은 결이 좋고 하얀 광택이 있어 보기는 좋으나 질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넋빠진 양반네들은 그걸 귀한 사치품으로 여기며 너도 나도 사들이고 그게 유행이 되면서 질긴 조선의 면이 오히려 밀리게 되었다.
부녀자들이 농사짓는 틈틈이 일해서 집안 살림에 보태던 중요한 부업거리가 설자리를 잃었다. 조선의 전통 수공업들이 몰려오는 수입 물품에 힘없이 무너졌다.
보름동안 고향에 다녀온 동이가 친분이 있던 객주를 찾아가니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모습이 웬일인지 예전같지가 않았다. 어쩐 일이냐고 묻는 동이에게 주인이 울상을 하고 하소연하였다.
“이젠 객주가 아주 망하게 생겼네. 외국 상인들이 발길을 뚝 끊고 이제 자기네가 직접 내륙 상인들과 거래하겠다고 설치고 있네. 그동안 조선에서 거래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이거지. 그뿐인가? 이젠 법으로 금지하는 물건까지 거리낌 없이 팔고 있네.”
얼마 되지 않아 호황을 누리던 객주도 한 집 두 집 무너졌다. 법으로 외국 상인과 거래하는 것이 금지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당연히 그만큼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정부는 개항장 객주에게 수출입 무역의 유통 지배권을 보증하여 밀무역을 단속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일본과 조선이 맺은 여러 조약에 저촉된다고 항의하여 곧 철폐하였다.
객주들은 일본과 청국 상인과의 경쟁에서 형편없이 밀리자 원산상회소라는 조합을 설립하여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일본 자본의 힘을 조합의 힘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이가 회원들이 모인 원산상회소에 가보니 모두들 울분을 토하기에 바빴다.
“요즘 일본인 상인들이 정미소까지 세워 쌀을 도정하여 싣고 간다는구먼. 망한 정미소가 한두 집이 아닐세.”
“그 뿐인 줄 아나? 고리대금업자들이 판을 친다네. 웬만한 조선 상인들은 죄다 그놈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이여. 또 일본인들이 몫이 좋은 곳을 돌아다니며 좋은 땅을 무조건 사들이고 있다네.”
“우리하고 무역을 하려고 개항한 게 아니라 아예 이 땅에서 밀고들어와 우리 물건으로 자기네 이득만 보려는 심보일세. 이렇게 나가다간 조선 땅이 돈 많은 저놈들 농간에 남아나는 게 있겠나?”
초리면에까지 일본인이 들어와 땅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경작하기 시작하자 우종수는 속이 끓기 시작했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조선인 소작인들을 부려 쌀을 생산해서 일본으로 실어갔다. 봄이 되면 곡물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절했다. 조선인 지주들이 맥없이 일본인 농장주들의 하수인이 될 판이었다. 우종수의 집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식량을 구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쌀값이 너무 올라 도무지 사먹을 수 없는 형편이고, 그나마 쌀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우리 농민들은 다 굶어 죽을 판입니다요.”
“사람들이 항구로 몰려가 하루벌이 일꾼이 되고 있습니다. 아예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가서 땅을 개간하겠다는 사람들도 있구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