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세요,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Q. 소설 쓰는 과정에 생긴 에피소드
A.
(1)
갑오년에 동학군이 홍주성에서 패한 후 도망 가는 장면을 써야 했어요. 태안 문장로 수접주는 어디로 숨어들었을까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태안지도를 펼쳐놓고 세세히 살폈습니다. ‘나라면 이쪽으로 숨어들었겠구나’ 하고 글을 써나갔습니다. 완전 상상이었죠. 글을 다 쓰고 났는데 마침 문장로 아들 문병석 씨의 전기가 나왔습니다. 그 책을 본 저는 너무 소스라치게 놀랐죠. 제가 상상했던 두 장소가 하나는 문장로의 친가요, 다른 하나는 외가였습니다. 너무 섬뜩했죠.
(2)
두 번째는 자료가 있었으면 하는 사안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작업 초반부에 박인호와 박덕칠 중 누가 나이를 더 먹었는지 알고 싶은데 자료가 없는 거예요. 그럴 때는 상상으로 써야 하죠. 어차피 자료가 없으니까 마음 놓고 쓰자 하고 썼는데 나중에 자료가 나와서 보면 바뀐 거예요. 식은땀이 주욱 흐르는 동시에 ‘에구머니 동학 조상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라구요. 제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동학 조상님들이 내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그 후로 작업이 잘 안될 때 이렇게 혼잣말을 했지요
‘제가 쓴 내용이 억울하시면 나오세요. 나오셔서 본인의 입으로 말하세요’라고요.
억울해 하시는 조상님 몇 분이 계셨습니다. 저승에서 이승까지 그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애 좀 쓰셨을 거예요. 하기사 제가 보면 먼 길이겠지만 동학 조상님들에겐 먼 길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해월 선생이 하루 이백 리를 걸으셨다니 젊은 동학 도인들은 더 먼 길을 걸으셨겠죠.
(3)
하루 일과가 글 쓰는 거잖아요. 몸에 밴 일이 아니라 몸이 많이 안좋아지더라구요. 몸이 좀 빤한 듯 해서 글을 좀 쓰면 몸이 다시 나빠지고 그러다보면 어떤 때에는 일주일 동안 하나도 못 쓸 때가 있었습니다. ‘이거 완성 못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생각일 뿐 걱정은 안했습니다. 동학 조상님들이 시켜서 하는 일인데 완결을 못 지을 이유가 없지요. 이런 일은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인연이 있어야 되는게 아닌가 싶었어요.
(4)
소설을 한참 쓰고 있는데 어느 날 외삼촌이 오셨어요. 저희 외삼촌은 족보 쓰는 일에 엄청 관심이 많은 분이세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 조상 중에 동학과 관련된 분이 없었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외고조부 일을 말씀해 주시더라구요. 논산 지나면 외성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진사이신 외고조부가 갑오년에 그곳에 사셨대요. 일대 땅이 외조부님 소유일 정도로 갑부였답니다. 그 마을 뒷산에 산성이 있었는데 동학군들이 도망을 그곳으로 왔답니다. 춥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동학군들이 밤에 외고조부댁으로 사람을 보냈답니다. 당시에는 동학난이 일어났다고 했답니다. 외고조부님은 ‘왜놈들을 쳐부수기 위해서 동학난이 일어났다는데 암만 도와야지’ 하시면서 동네 부잣집들로부터 옷가지를 수거해서 먹을 것과 함께 산성으로 올려 보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참 별일이다 싶었습니다. 외고조부의 은덕으로 제가 동학 소설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