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11회 이인한 기포령을 올리다(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13. 11:33

 남원집회 이후 전라도 남서부 일대에는 요소요소에 동학농민군 부대들이 혹은 운집하고 혹은 이동하며 고을고을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 전역을 통틀어서, 아니 어쩌면 전국을 통틀어서 동학농민군에게 목에 가시 같은 나주성이 인근에 있어서 이를 믿고 항거하는 몇몇 양반 중심의 민보군 부대도 만만찮게 세를 규합해 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본군과 관군이 곳곳에서 동학군을 대패시키며 남하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웅치면에 모인 수천 명의 동학군들은 머리에 황건을 쓰고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이미 전주성을 함락하고 내려온 외부의 동학군들도 함께 참석을 했고, 인근이 보성과 강진에서 들어온 도인들도 합세를 했다.

장흥부사 박헌영은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웅치면에 웅거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길로 병영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영은 병영대로 수성할 병력조차 태부족이니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 박헌영은 일대의 양반사족들에게 민보군을 장흥성으로 보내라는 통문을 잇따라 내보냈다.

이인한은 1125일 고읍면에서 본격적인 기포령을 내렸다. 발호하는 민보군을 제압하고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봉준, 김개남 대접주 등도 지원해야 할 형편이었다. 한편으로는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서진하며 하동을 지나 전라도를 넘본다는 소식도 전해져 왔다.

이인한의 부대의 기세는 더 장렬했다. 장흥만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섬에서 올라온 동학군들만 수천 명이었다. 도인들은 머리에 황명주 수건을 두르고 무릎에도 황명주 수건을 둘렀다. 들판에 온통 노란 꽃이 피어난 듯 황색깃발이 휘날렸다.

대장기 아래 청수를 모시고 이인한의 고래 같은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자 수만의 도인들이 주문을 세우기 시작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구름떼 같은 도인들이 주문을 세 번 외우자 흙먼지가 하늘로 오르며 강산초목이 흔들렸다. 대흥면의 넓은 들판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이미 천관산을 훌쩍 넘어 먼 바다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인한의 주도아래 심고를 올리고 나자 긴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인들은 네 곳으로 나뉘어서 동서남북을 가르며 진군을 시작했다. 이인한 진영에서 나팔을 불어대자 동쪽에서, 서쪽에서 차례로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거대한 산맥이 흐르듯이 도인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이인한이 말을 타고 제일 앞에서 진군을 지휘했고 최신동 역시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대흥면을 한 바퀴 돌고 곧바로 회령진성으로 향했다. 황색 두건을 쓰고 황색 천을 무릎에 두르고 깃발을 흔들며 진군하는 모습은 수만의 새떼들이 들판을 건너는 모양인 양 웅장하고 끝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회령진성으로 들어가자 만호는 벌써 도망을 가고 없었다. 예전에는 회령진을 지키는 수군들이 400여 명 있었으나 지금은 관리 몇 명이 무기고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인한은 회령진 무기고를 열고 하나도 남김없이 무기를 탈취해 버렸다. 대포와 화승총과 화약 등의 무기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무기를 훔친 대열은 사기가 출중해서 대흥면에 모여서 돼지를 잡고 장기자랑을 펼쳤다. 풍악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마을마을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도인들을 구경했다.

이인한의 기세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장흥 부사 박헌양은 대흥면의 기포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장흥의 도인들이라고 해야 고작 관군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웅치의 도인들을 잡아들일 일로 이미 혼이 반이나 나가 있었는데 대흥면의 소식은 그에게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는 병영성에 또다시 사신을 보냈다. 동비들이 장흥성을 공격할 것 같으니 원조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병영성에서는 답이 없었다. 씁쓸한 분노가 치솟으며 애써 장흥부사 자리를 회피하고 충청도 부사로 가 버린 박제순이 원망스러웠다.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우직함을 탓했다. 아무도 차지하려고 하지 않는 장흥부사의 자리를 덥석 문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헌양 부사는 떳떳하게 싸우다 죽으리라 각오를 했다. 성을 내주고 도망을 치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비록 유학을 통해서 관직에 들어왔으나 비겁한 도피를 할 수는 없었다. 이인한은 제일 먼저 벽사역을 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이방언에게 제안을 했다.

벽사역 역졸들은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용태 부사의 명령 아래 백성들이 재산을 빼앗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더 참혹한 것은 부녀자들을 강간한 것입니다. 그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어 이용태의 만행을 경고해야 합니다.”

이방언은 두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한번 까닥일 뿐이었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이방언을 따라다니는 구교철이 입을 열었다.

벽사역을 사면에서 포위해야 합니다. 첫 전투이니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을 물론이지요. 건산의 모정등에는 이인한 접주께서 주둔하고 김방서 접주가 벽사역 뒤의 평원에 진을 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행원 앞 평원에는 부사면의 접주이신 이사경 접주가 맡아야 합니다. 저는 모정에서 이인한접주를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언 대접주님께서는 동쪽의 평화 송정등에 주둔하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러자 이방언이 껄껄 웃음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평화는 고씨들이 사는 마을로 이미 군량미를 대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나는 송정등으로 정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무고한 백성들은 죽이지 않도록 미리 도망을 하라고 해야 한다.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것은 동학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니 각별히 조심을 해야 되지 않겠나?”

이인한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벽사역을 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그는 몸집이 큰 사람들을 모아서 기수를 시켰다. 백 명에 한 개씩 대장기를 나눠 주며 기수에게 흔들며 걷도록 했다. 그리고 구국항왜(救國抗倭),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깃발을 만들었다.

그가 기포령을 내리고 수만의 도인들과 회령진성을 점령하고 대흥면으로 돌아오자 이소사와 최신동도 대열에 함께 끼여 있었다. 그는 이소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여기는 아녀자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싸움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지요. 집으로 돌아가서 도인들을 넓히는데 노력을 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소사는 고개를 저었다.

동학에는 남녀 차별이 없다고 했으면서 여자에게 전투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저도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인한은 당당하게 말을 타고 나타난 이소사를 보며 당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신동도 마찬가지였다.

접주님, 저도 전투에 나가도록 해 주십시오.”

아니다. 너는 아직 어려. 전투는 스무 살이 넘어야 참가할 수 있어. 아직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으면 안 되지. 멀리서 구경만 하도록 해라.”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싸우도록 해주십시오.”

이인한은 이소사도 최신동도 전투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쉬운 듯 후방에 남아서 전투를 지켜보기로 했다.

드디어 124일 도인들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미 3일에 맡은 바 지역에 진을 친 도인들은 아침 7시가 되자 벽사역을 포위하고 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방언이 이인한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들은 2천 명 정도이나 무장도 하지 않았고 이미 고부군에 가서 지은 죄 때문에 잔뜩 얼어 있으니 도인들을 많이 동원할 필요가 없소. 원한이 맺힌 사람들만 자원해서 공격에 나서도록 하시오.”

이인한은 이방언의 지시에 따라서 급히 네 곳에 통문을 보냈다.

각 지역의 공격수들은 자원해서 3백 명만 나오도록 하라.’

진시(辰時)가 되자 건산을 출발한 이인한 부대는 벽사역 전방에서 길게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포탄이 쏟아졌다. 성으로 에워싸지 못하고 평원에 자리하고 있는 벽사역으로 불꽃으로 날아들었다.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튀었다. 벽사역에 있는 관사들이 포탄에 맞아서 불에 타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역졸을 이리 튀고 저리 튀어서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농민군에게 잡혔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소문으로 들은 터였다. 찰방 김일원도 어젯밤부터 벽을 포위하며 진을 치는 농민군들에게 겁을 먹고 아침이 밝자마자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며 역을 빠져 나가 버렸다.

역졸들은 이미 고삐가 풀린 망아지였다. 그들은 들판을 향해 뛰었고 탐진강을 건너서 장녕성의 앞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백성들은 모두 역사(驛舍)를 빠져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방언은 화염에 쌓인 여염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염려 마십시오. 민가를 태울 작정은 아니었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만 불길이 옮겨진 것입니다. 이미 역사 주변의 백성들은 400여 호가 모두 피난을 갔습니다.”

말을 타고 나타난 최신동이 소식을 전했다. 허공으로 희뿌연 재가 날아올랐다. 벽 주변의 건물들은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성난 도인들이 벽사역으로 뛰어갔다.

고부에서 이용태에게 당한 백성들이옵니다. 저들의 가족들이 역졸들에게 죽임을 당했지요. 저들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천여 명의 도인들이 벽사역을 습격하고 이미 타 버린 관사를 뒤지며 주변에 숨어 있는 관리들의 가족을 찾아서 보복을 가하고 있었다. 이방언은 뜨거운 숨을 내리쉬었다. 비록 탐관오리들을 척결해야 하지만 가족에게까지 보복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쫓기는 역졸들의 고함 소리와 쫓아가는 도인들의 함성이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장흥 부사 박헌양은 동문에 서서 벽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녕성은 산 위에 있어서 평지에 있는 벽사역이 손바닥처럼 다 보였다. 이리저리 콩을 볶아 대듯 터지는 대포소리와 역졸들이 도망을 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또다시 병영의 병마절도사에게 분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