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박석흥선

동이의 꿈(11회) - 개항(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16. 06:37

이태에 걸쳐 대흉작을 겪은 일본 정부는 조선 농민들에게 고리채 돈을 빌려주고 추수미를 실어갔다. 타들어가는 논밭의 사정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흉작으로 들판에 마른 내가 퍼지고 메마른 갈퀴 손으로 흙을 헤집다가 죽어 넘어간 사람의 시체를 개가 뜯어먹고 있더라는 소문이 이곳저곳에서 흔하게 돌아다녔다. 일곱 배가 넘게 쌀값이 오르고 굶어 죽는 백성을 구휼할 쌀도 부족하게 되었다.

그나마 콩이 소출이 있는 편이어서 가느다란 희망줄이었으나 이것도 봄에 미리 선금을 치른 일본인 상인에게 그대로 넘어갈 판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의 원망스러운 눈길이 일본인 상선에 끊임없이 실어나르는 쌀가마와 콩자루에 머물 무렵이었다. 대책에 골몰하던 조병식에게 귀뜸이 들어왔다.

"여섯 해 전에 민영목 나리와 일본공사가 양측의 대표로 나서 체결된 조일통상조약이 있는데 황해도에서는 그 조약에 이거해서 방곡령을 실시하고 있답니다.

"무슨 내용이더냐?"

"천재·변란으로 인한 식량 부족의 우려가 있을 때의 방곡령을 내릴 수 있다합니다."

원산항을 통하여 일본에 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라. 한 달 전에 공시해야 한다는 조항에 의거하여  당장 91일에 예고하고, 101일 부터 방곡령을 실시한다.”

그러나 일본은 공시 기간이 한 달이 되지 않았다며 일본 상인에게 끼친 피해를 배상하라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일본이 요구한 금액은 10원이 쌀 한 가마인 시가로 14만여 원(현 시가 150)이었다. 조정은 일본의 항의에 맥없이 굴복하여 조병식을 3개월간 감봉 조치하고 강원도로 보냈다.

새로 부임한 함경도 관찰사 한장석 역시 방곡령을 실시했고 일본은 배상금 17만환을 요구했다. 일본이 군함까지 몰고와 위협을 하자 조선 조정은 일본과 협상을 통해 11만환으로 줄여 청나라에게 돈을 빌려 배상금을 갚고,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우종수는 개항 초창기에 제법 벌어놓은 돈이 다시 맥없이 빠져나가는 지경이 되어서야 동이의 말을 받아들여 원산에 있는 점포를 철수했다. 쌀을 파는 게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고 하루하루 일본 상인들을 대하기에 피가 말랐다.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무기로 하여 약탈을 하려고 드니 당할 재간이 없었다.

자네 말대로 이쯤해서 물러나는 것이 옳겠네.”

잘 하셨습니다. 더 이상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자네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나마 자네 덕분에 손해 안 보고 이 정도에서 그만 두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워낙 일본 상인들이 악착같이 쌀과 곡물을 싸게 매입해 실어 날랐고, 그들이 가지고 온 공산품과 우리 곡물을 맞바꾸어 무역을 한 것이 결국 조선의 숨통을 조이는 짓이었습니다. 하루빨리 청에 의지하는 습관도 버려야 합니다. 병자년 개항 이후 관세없이 7년을 보내고 이제 해관이 생기자 총세무사의 임명권이 청나라에 넘어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개항 때에는 무관세를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고 7년이 지나서야 청나라에 의존하여 해관을 만들다가 청국해관에서 파견된 총세무사와 외국인 세무사에 의해 원산해관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해야  된다는 말인고?”

조선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서야 하고  밀려드는 외국과의 계약을 제대로 하기위해 국제법을 알아야 합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정치적 간섭에 조정은 분열하여 개화파니 수구파니 하고 대립하였다. 준비 없이 받아들인 개항의 여파는 계속되는 회오리를 몰고 왔다. 신식 군대를 우대하고 구식 군대의 월급 지불을 미루어 오다가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나라의 위신을 깎았고,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일본에 터무니없는 배상금을 물어주기에 바빴다.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해외사절단 파견에 드는 비용과 배상금 경비들이 백성들에게 갖가지 명목으로 징수되었다.

 

동이는 개항장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나라는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뿐 백성들을 지키지 못했다. 사대부는 명분을 방패 삼아 권세를 누렸으나 그들을 위해 노역하는 백성들을 먹이고 베풀지 못하였다. 백성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희생만을 요구하는 정부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의 이익착취하는 열강의 제국주의 사이에서 백성들만 죽어나갔다.

우종수는 재산을 지키는 데 전에 없이 고심하느라 몇 년 사이에 부쩍 늙은 모습이었다. 몇 년을 개항장에서 노심초사하다가 머리가 하얗게 샌 초로의 늙은이가 되었다. 그쯤해서 더 이상 손해 보지 않은 것만이라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동이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 몇 년간 동이를 사람됨을 지켜보고 흡족하게 여긴 우종수가 딸과 혼인시키려 했으나 동이는 그저 웃음으로 넘기며 사양을 했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내가 자네에게 줄 몫은 땅으로 주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

자네를 내 사위로 맞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네. 돈으로 받기를 원한다면 그리 하겠네.”

그냥 그대로 두시면 제가 나중에 필요할 때 찾아가겠습니다.”

자네 몫으로 된 땅의 계약서를 써 줄 터이니 가져가게.”

동이는 원산학사에서 중국어 교사로 오라는 청을 받아들였다. 원산학사는 밀려들어 오는 외세에 위협을 느끼고 뜻을 모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성금을 모아 설립한 학교였다. 동이는 방학이 되거나 노는 날이면 해주에 있는 수연의 집을 찾아가서 동학 도인들과 함께 수련을 하였다. 그곳에서 외삼촌 준기가 장연에 한약방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승 백사길이 처형당하고 난 후 준기는 고향에 잠시 머물렀다가 길을 떠났다. 세상을 바람처럼 떠돌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눈에 보이는 풍경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았다. 여러 번의 봄이 지나갔다. 압록강이 흐르는 마을까지 올라가서 중국 접경지역까지 둘러본 다음에야 남쪽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압록강의 지류인 삼교천이 흐르는 평안도 구성은 짙푸르게 우거진 나무숲이 호수에 그대로 비치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 나그네에게 다가온 노인들이 마을에 생일잔치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권했다. 인정이 많은 동네였다. 준기는 마을 사람들을 따라가 음식을 먹다가 그 집 안주인이 며칠 전부터 속이 불편하다고 하더니 기어이 앓아누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좀 뵈어도 되겠습니까?”

안내를 받아 방안으로 들어가니 수염이 하얀 노인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안주인을 돌보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 있던 안주인이 힘없는 표정으로 살포시 눈을 떴다.

언제부터 이렇게 불편하게 되셨지요?”

아픈 지 한 이레 정도 된 것 같소.”

안색을 살펴보니 얼굴에 누런빛이 돌아 소화기능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을 놓고 몇 가지 처방을 하고 나오는데 노인이 불렀다. 조카가 의원인데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며칠 묵고 있다가 만나고 가라는 것이었다.

안주인은 사흘이 지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지런하고 솜씨 좋은 안주인은 자기를 낫게 해 준 고마운 나그네에게 무언가 해 먹이려고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 봄 새 풀이 돋아나기 전 강가에서 잡아 단지에 절여 두었다가 밥반찬으로 먹는 갈게가 별미였다. 호박멸치찌개며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국수, 메밀에 느릅나무 가루를 섞어 만든 느릅쟁이국수, 담백한 동치미도 고향 생각을 잊게 해주었다.

조카 김자명이 중국에서 돌아왔다는 기별이 와서 한약방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마악 밖으로 나서려는 처자와 마주쳤다고개를 숙이며 얼른 비켜서는 처자의 고운 눈썹을 보는 순간 준기는 왠지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것을 느꼈다.

뜻밖에도 김자명은 마당에서 소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흙투성이 손을 쓱쓱 바지에 문지르고 나서 준기와 반갑게 악수를 하더니 소부터 가리켰다.

이웃집에 소가 병을 한다고 하여 그 소를 데리고 왔네.”
이 소가 그런 소입니까? 그런데 왜……?”

병든 소를 데리고 왔다는 말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준기를 보며 김자명은 걸걸한 목소리로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 병든 원인을 알려면 누군가는 이놈을 한 번 들여다보고 연구를 해야 하지 않겠나? 병든 소 때문에 울상 짓는 사람들 근심도 덜어 주고 말이야.”

의원은 사람만 고치는 줄 알았는데 이것 참 놀랍습니다.”
소도 산 생명이니 아픈 곳을 고쳐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이렇게 고쳐 놓아야 나중에 다른 소들도 살릴 수 있는 방도가 생길 것이고.”

김자명은 중국 사람에게 의술을 배운 사람으로 타고난 천성이 호탕했다. 준기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심부름하는 일부터 차근차근 시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의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준기는 의술을 배우는 사람 틈에서 처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김자명은 여자들의 병을 고쳐보라고 딸 연화에게 의술 배우기를 권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우리 한약방에서 세상의 병이라는 병들은 다 고쳐 보도록 하세.”

준기는 다른 마을에서와는 달리 김자명의 약방에서는 오래 머물게 되었다. 한약방에는 병을 고치러 온 사람뿐만 아니라 의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붐볐으나 김자명이 세워 놓은 관문을 넘지 못해 대부분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 어느 날 온몸이 상처투성인데다 여기저기 고름이 잡힌 행려병자가 거적때기에 실려 들어왔다. 김자명은 견습하는 사람들을 모두 마당으로 불러내어 누가 환자를 돌보겠냐며 물었다. 환자에게서 나는 역한 냄새에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준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순간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대놓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널브러진 형상을 보니 다 죽었구먼. .”

보아하니 나이도 많은 늙은이라 화타가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이번엔 못 고칠 거네.”

김자명이 다시 한 번 준기에게 다짐하듯 물었다.

네가 할 수 있다 했느냐?

, 제가 돌보아 주고 싶습니다.”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준기와 행려병자가 남았을 때, 처음부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연화가 자기도 돌보겠다고 나섰다. 김자명은 잠시 연화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러면 너희 둘은 당분간 저 환자에게 전념하도록 해라. 환자를 돌볼 방부터 준비해야겠다.”

김자명이 방으로 들어가고 난 후 준기는 자기를 도와주려고 나선 연화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으나 말은 웬일인지 퉁명스럽게 나갔다.

어찌 이리 힘든 일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섰습니까?”

그건 바로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환자가 그대로 버림 받게 될 것 같아 안타까워서 그랬소.”

저도 그랬습니다. ,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환자부터 살펴야지요.”

연화는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면서 활달하게 나섰다. 우선 환자를 좀 쉬게 한 다음 씻기고 옷부터 갈아입히기로 했다. 환자는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