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을 삼킨 하늘(11회)-2장 1892년 공주
2장 1892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의령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후 장을 열어 깊숙이 넣어 두었던 보자기를 꺼냈다.
일 년 전 저수지에 몸을 던졌을 때 구해 준 선비가 벗어 자기 몸에 덮어 주었던 도포였다. 도포의 사연을 알고 배씨 부인이 빨아서 정성껏 손질한 후에 의령에게 전해주며 혹시나 살아가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도포에 담긴 선비의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의령은 도포를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선비를 만났으니 도포는 당연히 선비에게 돌려줘야 했다.
도포를 돌려줄 때는 장날에 옷감을 사서 손수 중치막을 지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과거를 끊어 내리라 생각했다.
의령은 더 이상 지난날의 후회와 고통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며칠 후 장날,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다시 만났다. 의령은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얼굴만 내밀고 걸어가다 멀리서 다가오는 유상을 발견하고는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러다가 저잣거리 한가운데서 서로를 마주보며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유상을 마주보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그가 따라오는 기척이 들렸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적한 골목길 끝에 가서 멈춘 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유상이 보였다. 가슴의 일렁임이 조금씩 높아졌다.
의령은 내외를 하고 서서 나직이 말하였다.
“작년에 저를 구해 주신 선비님이시지요?”
“저수지에서….”
“일전에는 고마웠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의령은 내외한 채로 머리를 숙여 절하였다.
“그때는 경황중에 민망한 꼴을 보였습니다. 은인에게 감사는커녕….”
“아니, 이런 인사를 받자고 한 일은 아니다.”
“저는 신평에 사는 윤의령이라고 하옵니다.”의령이 이번에는 유상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일 년 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유상이 기억하는 것 보다 더욱더 낮고 성숙했다.“나 또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어서 끝까지 챙기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다행이구나.”
유상은 패악스럽게 소리치며 떠났던 소녀가 어엿한 여인네의 풍모로 다소곳하고 정중한 인사를 건네자 다소 당황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다시 보니 고집스러운 눈빛은 여전했지만 일 년 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이제 소녀가 아닌 온전한 여인었다.
“그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실례가 많았어요. 미안했고 고마웠습니다.
“됐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따라온 것이 아니다. 단지 네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도대체 일 년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 죽어가던 사람이 여염집 낭자로 변신했을까?
유상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의령을 쳐다보다 사람들이 오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 의령이도 재빨리 쓰개치를 뒤집어썼다.
“여기는 아녀자가 오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니니 먼저 가거라. 나는 잠시 후에 나가마.”
“…예. 그럼 안녕히 돌아가시어요.”
의령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망설이다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그를 지나쳐 골목 안을 빠져 나갔다. 유상은 눈만 보이게 쓰치마를 뒤집어쓰고 멀어지는 의령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뒤따라 나왔다.
의령은 뒤에서 유상의 눈길을 느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찾고 있는 성연과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성님, 어디 갔다 이제 와요? 또 잡혀간 줄 알고 깜짝 놀랐잖우. 포목점에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수?”
“미안하다. 잠시 장거리를 구경하느라 시간이 이리 지난 줄 몰랐네. 서둘러 가자.”
의령은 유상을 뒤로 하고 성연과 아이들을 데리고 포목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상은 꼼짝 않고 서서 의령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2장 끝 다음회 3장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