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님, 모심] -14회 영월에서 49일 기도 (김현옥)
<영월 직동 사적지>
영월에서 49일 기도
다음 날 장봉애 아버지 장필생은 양양옥 관아 뜰에 놓인 형틀에 묶여 곤장 십여 대를 맞고서야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어머니가 면회가 허락되었을 때는 엉덩이 살이 짓물러지고 터져서 양양옥 멍석 바닥에 엎드려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는 옷 한 벌과 돈 30냥을 가져다 속전으로 바쳤다. 어머니가 딸 시집 밑천으로 모아 둔 돈이었다. 그러나 관아에서는 아버지를 내보내지 않았다. 어머니와 그녀는 날마다 감자며 조밥 등을 해 왔다. 잘 먹어야 장독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웃집에서 빌린 돈으로 곡식을 샀다. 집에 있는 그녀 동생들은 굶어서 누리끼리한 얼굴로 물배만 커져 있었다.
“저…. 남편을 언제쯤 내보내 주시는 겁니까?”
장봉애 어머니가 옥을 지키는 포졸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라 물건을 훔친 것은 중죄이기 때문에 쉽게 보내 줄 수가 없다.”
포졸은 냉정했다.
“그래도 언제라는 기한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모른다. 형방 어른에게 물어봐라.”
형방을 찾았더니 형방이 더 기막힌 소리를 했다.
“돈 50냥을 죗값으로 더 내놓으면 풀어 주겠다.”
“이미 30냥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해. 네 남편 죄가 얼마나 무거운 줄 모르느냐?”
형방의 말을 전해들은 장 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우리 집에는 돈 한 푼도 없습니다. 굶어 죽어 가는 자식들 살리려는 것도 죄가 되오? 물고기 몇 마리 잡았다고 그것이 80냥이라니요.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오.”
“죗값을 갚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방이 네 딸을 보고 반한 모양이다. 네 딸을 소실로 보내는 것이 어떠냐?”
형방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살자고 딸을 팔다니요.”
“누가 팔라고 했단 말이냐? 이방의 소실로 가면 귀염받고 호의호식할 것이다.”
“첩으로 가는 신세가 어찌 귀염 받는 것이라 하십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에이, 그놈 고집 한번 세군. 고생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쉽게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다음 날 그녀와 어머니는 아버지만 바라보다 돌아갔다. 이 소문은 이웃 마을까지 퍼졌다. 다행히도 장 씨와 절친한 박 씨가 도움을 주려고 50냥을 들고 찾아왔다. 논 사려고 모아 둔 돈이라고 했다. 장 씨가 양양옥에서 나온 뒤 장봉애는 그 집 둘째 아들과 결혼했다. 그가 바로 박용걸이다. 시집와서 알았다. 시부모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왔다는 것을. 그 뒤로 양양옥 이방이 박용걸에게 자꾸 시비를 걸어 그는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이 깊은 산속 영월로 이사 오고 말았다.
장봉애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동네 우물로 나갔다. 이웃집들은 멀리 띄엄띄엄 있지만, 산골에 동네 우물은 하나였다. 아낙네들은 이곳에 모여서 세상 소식을 주고받았다. 벌써 삼척댁과 인제댁이 물을 긷고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오늘은 웬일로 늦었소? 밤일을 찰떡지게도 했구먼.”
아침부터 농담이었다.
“자기 한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네 그려. 아침부터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가? 서방님 잡아먹고 싶지 않거든 아껴 가면서 써.”
받은 만큼 농담으로 되돌려 주었다.
“양양댁 말하는 품 좀 봐.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겠네 그려. 뭔 일 있소?”
저 여편네의 예민한 직감에 놀라며 장봉애는 입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엊저녁에 온 두 양반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되면 남편이 다칠 수 있었다.
“일은 뭔 일. 아무 일도 없어. 쓸데없이 말 만들지 말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나 아낙네들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게다가 입은 가볍기가 그지없었다.
“양양댁이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구먼, 괜시리 날이 선 것이….”
더 말하다가는 스스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장봉애는 물동이에 물을 채워 똬리 위에 얹고 얼른 들어와 버렸다.
그녀가 부엌에 동이를 내려놓자 남편이 대접에다 막 떠온 물을 담아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안방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한울님께 고하겠습니다. 두 분은 앞에 서 주십시오.”
강수의 말에 해월과 박용걸이 옷을 바르게 하고 의젓하게 섰다.
“한울님, 해월 선생님과 박용걸 처사가 인연이 깊어 형제가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박용걸 처사가 형이 되고, 나이 적은 해월 최경상 선생이 동생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 분은 형제로서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할 것입니다. 오늘의 소중한 인연을 길이 이어 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두 분이 서로 화합하여 큰일 이루는 데 보탬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고합니다.”
해월과 박 씨는 합장하며 절했다. 형제가 된다는 약속으로 청수를 나누어 마셨다.
그날 이후 해월과 강수는 박용걸의 안방에만 머물렀다. 해월은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묵상을 하거나 글을 썼다. 강수는 곧잘 자리에 앉아 수련을 하다가도 수시로 일어나 밖에 귀를 기울였다. 침착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수선스러운가?”
어느날 해월이 한마디 했다.
“태백산에서는 먹고 자는 것이 힘들더니, 지금은 방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듭니다. 불쑥불쑥 가슴이 방망이질하고 바깥세상 소식이 궁금해집니다.”
“마음과 바깥이 둘이 아닐세. 강 접장 마음이 편안하면 바깥세상도 편안해질 것이네.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한울님이 강림하시어 같이 화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네. 그것을 궁을 부도라 하네. 자네의 마음이 그 부도로 가득 차야만 천도가 다시 살아나고 세상의 모든 백성을 건질 수 있게 될 것이네.”
“한울님이 강림하시는 모습?”
“그렇다네. 일찍이 스승님께서 네 몸에 모셨으니 멀리서 찾지 말라 하지 않으셨는가.”
해월의 소리는 저 깊은 동굴에서 울려 나온 듯 시원하면서도 차분하였다.
“저는 아직 도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강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닐세. 누구나 본래 한울님이니,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리고 조용히 기다리면 반드시 감응하실 걸세. ”
“그런데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꾸 잡념이 떠오릅니다.”
“스승님께서도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마음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오직 한울님 마음을 향하여 정진하기만 하면 되네.”
“…….”
“이 방은 나와 자네를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나와 자네를 잡으러 오는 관졸의 추적이 두려운 것이 아닐세. 사나운 범이 무서운 것도 아니요, 벼락이 치는 것이 무서운 것도 아닐세. 오직 두려워할 것은 한울님의 마음일세.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비방하고 원망한다 해도 한울님께서 나의 앞길을 열어 주신다면, 내 어찌 주저함이 있을 것인가. 그러니 자네나 나나 이곳에 있는 동안 오직 힘쓸 것은 우리의 마음 기둥이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튼튼히 하는 일일세. 그것이 수련 아니겠는가?”
“마음 기둥이 무엇입니까?”
“스승님께서도 마음기둥이 튼튼해야 도의 맛을 알게 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또 이어서 오직 한 생각을 한결같이 하여야만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진다 하셨네. 마음기둥이란 우리 몸을 지탱하는 뼈대와 같아서 자신이 애초에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힘이지. 그 기둥이 튼튼하여 흔들림이 없어야 비로소 한울님이 그 마음 먹은 바를 이루도록 도와준다네. 몸을 써서 일하는 이가 잔병치레를 하지 않듯이 마음을 수련하여 튼튼히 해야만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야 한울님이 강림하시는 법이라는 말일세.
해월은 말하기를 마치고 벽을 향해 돌아앉아 묵상에 들었다. 강수도 벽을 향해 자리를 고쳐 앉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풍랑 치듯 어지럽던 마음이 차츰 잦아들고 몸도 반듯하고 조용해졌다.
이날부터 해월과 강수는 먹고 자는 최소한의 시간을 빼고는 수련에 임했다. 49일 수련은 수운이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한 데서 유래했다. 강수는 49일 기도를 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였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희열이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무수한 잘못의 파편들이 회초리가 되어 온몸을 매질하는 고비를 넘어, 다시 한 걸음 오직 주문만을 생각하며 나아갔다.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고, 잡념을 생각하는 마음도, 몸도 사라졌다. 그러므로 희열도 참회의 심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환한 허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49일 기도가 끝났다. 그 새벽에, 해월과 강수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서로를 향하여 크게 절하였다.
(14회로 연재는 끝났습니다. 책으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