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변김경혜

꿈이 있더냐(12회) - 3장 탄생, 비밀과 기쁨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28. 01:00



며칠 뒤 김은경은 아들과 함께 인근의 흑성산(黑城山)을 찾았다.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작업을 하느라 꼬박 반년 이상을 쉼없이 보낸 것 같았다. 날이 차 입을 열때마다 허연 입김이 선명했다. 산을 오르느라 등허리에 땀도 흘렀다. 정상에 오르니 천안과 목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흑성산의 옛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지관들은 오래전부터 검은성을 한양의 외청룡이라며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길지형국이라고 말했다. 인근 승적골은 오목(덜목, 제목, 칙목, 사리목, 돌목) 사이에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피난처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제 동경대전 간행이 목전이다. 김은경은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도인들의 열망이 모여진 숙원이 이제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 마음이 설레십니까?”

늘 김은경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아들 용철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 보이느냐?”

김은경이 목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아버님이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경전을 간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다음부터 한시도 편히 주무시는 걸 못보았습니다.”

용철은 김은경을 계속 바라보았다. 지난 가을 이후 눈에 띄게 머리가 새었다. 지천명(知天命)이 되려면 아직 몇 해 더 남았다. 용철은 아버지를 계속 바라보았고 김은경은 대답대신 흐음하는 헛기침을 하더니 계속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김은경이 입을 열었다.

용철아. 지관들이 말하길, 여기 흑성산에서 보면 저기 북쪽의 석천리에서 이 산 근처의 지산리가 좌우동천승적지라고 하더구나. 덜목과 제목, 칙목, 사리목, 돌목 이 오목의 승적골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고 말이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길지라고 하는데, 세간엔 숨기 좋은 곳이라고도 하지.”

지관들의 예견이 맞았는지, 김은경이 말한 인근엔 이런저런 이유로 도성에서 나와 숨어든 이들이 많았다. 그중엔 양반도 많았다.

저기 보이는 태조봉의 남릉으로 가지를 친 이 능선의 최고봉이 바로 우리 발 밑 흑성산이란다. 형상도 최고로 꼽히는 명산이기도 하지만 명당에다 화기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라고도 하지. 그래서 반골의 피가 흐른다는 얘기도 있고.

예전에 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할 당시 목천에 상국진(尙國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제 유민이었는데 목천 호장까지 지내고 지역에 큰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지. 하지만 그가 목천에서 여러 차례 백제 재건을 시도하자 태조 왕건이 노해 그의 성씨를 짐승인 코끼리 상()으로 바꿔 버렸지. 상국진 일가만이 아니라 우(), (), ()씨도 짐승을 뜻하는 한자로 바꾸라고 명을 내렸어. 이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다 몇 대 후에 학문이 뛰어난 후손의 공으로 향역도 면제받고 본래의 성인 상(), (), (), ()으로 회복했다고 하는구나.”

김은경의 시선은 여전히 목천에 있다.

아버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용철은 여전히 아버지를 보고 있다.

반골의 땅이란 백성이 일어나는 곳이란 뜻이란다. 상국진 일가 일이 어디 그때만 벌어진 일이겠느냐? 허나 지금은 그때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동학이 일어서는 곳, 아마 여기 목천이 그런 일을 할 것이다. 동경대전이 이곳 목천에서 간행되는 것도 백성의 뜻이고 하늘의 뜻일 게다. 용철아, 훗날 너는 모든 백성이 평등하고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런 시대를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조선은 국운이 쇠한 듯하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거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도 헤아릴 줄 모르는 조정에는 희망이 없다. 왜놈들은 억지를 부려 개항장을 얻어낸 뒤로 조선 땅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고, 청국은 여전히 이 땅에서 엄청난 조공을 걷어가고 있다. 명나라 명나라 하며 조아리던 대신들이 청나라를 몰라보고 왜놈들을 하대하다 이렇게 왜놈들 등살에 휘청이게 된 게지. 서양놈들도 정승들에게 뇌물을 먹여 왕권을 흔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가다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조정도, 백성들도.”

말끝에 김은경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용철은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 과묵하던 아버지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놓은 적은 없었다.

청나라나 왜놈들뿐 아니라 법국, 아라사 같은 나라들이 조정을 흔들어대는 것은 알고 있다. 헌데, 분명 버티기 힘들 것이라 하셨다. 조정과 백성이 버티지 못한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지? 아버지의 의중이 어디까지일까?’

그래도 이 흑성산이 명당이어서 화기를 피하게 하는 피난처라고 하더구나. 아마 동경대전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분명 동경대전이 우리 동학도들에게 닥칠 화기를 피하게 해 줄 것이다.”

용철은 아버지가 풍설을 사실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렇게 믿으려 하는 것인지 궁금하였지만 묻지 못했다. 지금 아버지의 머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철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풍설이 사실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목천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까지 모두 동학으로 이끈 아버지의 그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놓고 경전 편찬에 이르게 한 그 믿음, 마음이 궁금할 따름이다. 조선의 국운이 다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이토록 동경대전 간행에 당신의 모든 걸 바친 것인지, 아무리 추려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용철은 동경대전이 간행되면 꼭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여기 이것이 피었구나.”

용철은 아버지의 손이 머문 곳을 보았다. 김은경의 밝은 얼굴을 닮은 노란 복수초였다. 봄이 오긴 이른 날이다. 봄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꽃이다.

용철은 아버지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그 노란 복수초가 경전 편찬의 성공을 예견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왕을 갈아치우는 역성혁명(易姓革命)과는 다른 길이다. 평등 세상,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나 역시 평등 세상, 개벽 세상을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다. 양반과 평민은 평등할 수 있다. 허나 국왕은? 우리가 국왕과도 평등해진다면, 조선이라는 국가는 대체 어찌 되는 것인가? 국왕이 없다면 국가는 어찌 운영되어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평등하다면, 평민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서역의 불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왕을 처형했다고? 허면 그 나라는 누가 경영하고 있단 말인가? 대학연의의 절국(竊國)’과는 분명 다른 길이다. 허나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사랑채에 혼자 들어앉은 이희인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얼마 후면 동경대전도 간행이 된다. 이제 나에게 답할 차례다. 저리 많은 이들이 동학으로 모여드는데, 개벽 세상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동학 도인의 개벽을 이 조선에서 어떻게 성사시킬 것인가? 단순히 조정에서 허하는 개제 따위가 아니다. 500년 조선을 지배해 온 저들과 맞서서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사대부의 부패 때문이라고, 조선왕실의 무능 때문이라고? 아니다. 아니야. 이것은 분명한 흐름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렇게 가야 하는 당위(當爲). 허나 그들에게 사대부와 왕족이, 농사짓는 이들이 모두 평등하고 귀한 이들이라고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가? 그것이 하늘의 뜻임을. 깨닫는 것은 오랜 시간 수련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거부하고 가진 것을 끝까지 움켜쥐려는 자들과 어찌 논해야 하는가? 답을 찾아야 한다. 답을!’

이희인은 자꾸만 아뜩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동학의 세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동경대전이 인출되면 동학으로 몰려드는 이들이 더욱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다른 지역보다 유독 양반의 입도가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사대부들과의 명분 싸움이 각을 이룰 것이다. 그들과의 명분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 조급해선 아니 된다. 물 흐르듯 당위인 것을!’

이희인이 긴 숨을 내쉬었다. 미간의 주름도 슬며시 펴졌다.

어르신, 손님이 들었습니다

돌쇠의 목소리다. 이희인이 몸을 일으켜 사랑채 앞마당으로 나갔다.

아니, 자네가 어인 일인가?”

굳었던 이희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윤영렬이다. 무과에 합격한 후 오랜 세월 지방 관아를 전전해 온 자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몇 번을 아뢰어도 듣지를 못하십니까? 혹시 계집이라도 숨겨놓은 겝니까?”

윤영렬이 짓궂게 농을 던졌다.

이 사람이, 오랜만에 나타나더니 요상한 말부터 하는구만. 어서 들어오시게.”

둘은 사랑채로 들었다.

윤영렬은 매사에 꺼릴게 게 없는 자였다. 호방한 성격에 금상의 신임이 두터운 형을 두고 있어 언제든 중앙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차 보였다.

글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십니까?, 저는 서책만 보면 답답합니다.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서책만 보시다가는.”

윤영렬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희인의 책상을 보며 말을 건넸다.

그렇구만. 어찌 사셨는가? 이곳저곳을 많이 보았다고 들었네만,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좀 들려주게.”

이희인이 궁금하다는 듯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뭐 있습니까? 뇌물주고 자리한 관리들의 몹쓸짓이나 도적놈들이 된 화적떼를 잡고 조정에서 금하는 동학 무뢰배들의 작당들 얘기지요. 헌데, 동학쟁이들은 양반, 쌍놈이 없답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천한 것들은 그렇다 쳐도 왜 양반들까지 가담을 해서 그자들 편을 들어주는지, 나라가 있으니 반상의 법도가 있는 것이고 남녀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윤영렬이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래, 조정에선 어찌 한다고 하던가? 한때는 좌도난정이라고 모두들 잡아들인다고 하던데.”

이희인이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웃음을 띠며 물었다.

작금의 조정이 요즘 조정입니까? 얼마 전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민씨 등살에, 내 참 드러워서, 제가 지방관아를 전전하는 것이 다 왜이겠습니까? 민씨 척족에게 뒷돈을 안 줘서입니다. 민겸호 그자가 죽기 전에, 저도 뒷돈을 좀 댔으면 달라졌을 텐데, 하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하하하.”

윤영렬이 크게 웃었다.

그놈의 서학이 들어온 다음 서양 놈들부터 왜놈들까지, 조정에 잘 나간다는 정승들과 협잡하고, 궐 내탕금이 민씨 치맛자락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임오년 그 난리도 선해청 민겸호 그 자가 작정하고 재물을 착복해서 벌어진 사단 아니겠습니까! 대체 얼마나 재물을 모으려고 하는지. 국모 자리를 제 외척 세력 배불리는 자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국모가 국모다워야지, 동서고금에 여자가 나서서 잘 됐다는 일을 본적이 없습니다.”

윤영렬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보게, 그 입 좀 조심하게, 아무리 그래도 중전 아닌가. 누가 들을까 걱정이구만.”

이희인이 걱정스럽다는 말투다.

들어도 좋습니다. 궐 안팎이 썩은 내로 진동하니 백성들 또한 부화뇌동해 동학이라는 요설에 휩쓸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학 무뢰배들이 반상의 법도를 무시하고, 평등이란 말을 대놓고 하니, 이참에 천것들이 양반과 어깨를 마주해 보려고 동학에 앞 다투어 들어가는 거랍니다. 형님, 사실은 저도 그 평등이란 말을 듣고 처음엔 마음이 동하였습니다. 서얼 출신인 제가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려면 그 길이 빠른 게 아닌 가 싶었습니다. 허나 그게 될 법한 이야기입니까? 금상도 따지고 보면, 조대비 없이 그 자리에 앉았겠습니까? 민씨도 재물이 있으니 저리 주인 행세를 하다 변이 난 것이고. 세상이란 것이, 다 힘과 재물로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등이라니요. 다 헛된 꿈입니다.”

윤영렬이 헛기침을 한 번 하며 이희인의 얼굴을 살폈다. 지난 임오년(1882) 여름 한양에서 벌어진 구식 군대의 난리 때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얼마 전 돌아온 형, 윤웅렬을 두둔하고 싶은 속내를 내보인 게다.

예끼, 이 사람아. 세상이 아무리 매관매직이니 뭐라 해도, 자네 같은 무관만이라도 정도를 지켜야지, 아니 그런가?”

이희인이 윤웅렬 얘기를 꺼내기는커녕 달래듯 말했다.

허허, 형님이나 저를 대접해 주시지, 어느 양반 나리들이 저와 겸상이라도 하겠습니까? 무관들 사이에서도 어디 가문이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정도를 어기는 건 진짜 양반이면서, 저 같은 서얼 나부랭이들에게 정도를 지키라 하면 아니됩지요?

모르겠습니다. 형님을 뵈면 그런 말씀 드리는 게 잘못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윤영렬은 신세한탄을 하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자네 말이 맞지, , 틀림이 없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자들에게 해야 할 말이지. 허나 양반이든 평민이든, 정도를 지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니 하는 말일세.”

이희인의 말은 진심이 묻어났다.

자네 형님도 생각을 하셔야지. 금상의 총애가 대단하다는 걸 알고 있네.”

이희인이 자연스레 윤웅렬 이야기를 꺼냈다.

윤영렬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윤웅렬은 별군관에 임명된 뒤 금상의 신임을 받는 몇 안 되는 무인이다. 윤웅렬이 신사년(1881)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한 것은 경진년(1880) 금상이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 일행의 수행을 맡아 일본을 다녀오면서부터다. 대국 말에 능숙했고, 일본말은 더듬거리나마 할 수 있었던 윤웅렬은 김홍집 등과 어울리며 일본과 깊숙이 연을 맺고 있었다. 금상이 파견한 2차 조사단에 아들 윤치호를 일본에 유학시키기 위해 억지로 끼워넣기도 했다.

세상은 그런 윤웅렬에게 일본 앞잡이라고 말들이 많았던 참이다. 임오년 군인들이 일으킨 난에서도 일본 공관 습격 계획을 미리 일본 측에 알려준 이도 바로 윤웅렬이었고, 그때 그의 집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는 조선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자 한성부를 탈출해 원산에서 피했다가 부산을 거쳐 박제경(朴齊絅)과 일본군 중위 가이즈(海津)의 도움으로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망명하였다.

세간엔 그가 부산이 아닌 원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고, 그때 이사카와라는 일본 승려의 도움을 받아 가마니에 둘둘 말려 짐짝인 것처럼 눈을 속여 겨우 탈출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런 윤웅렬은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얼마 전 복권되어 별군직에 임명되고 뒷날 첨지로, 그 후 남양부사로 제수되었다. 금상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희인은 윤웅렬의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윤영렬이 자신의 집을 찾은 것도, 세상 돌아가는 민심을 파악하기 위한 것쯤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서얼 출신 형제들의 세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를 것이란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일대 내로라하는 양반들 중에 윤씨 형제와 가까이 지낸 건 이희인과 몇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윤웅렬이 금상의 총애를 받고 한양에 머물자 이희인과도 왕래가 끊겼고, 윤영렬의 발길도 자연히 멀어져 근래엔 만남이 없던 처지였다. 허나 이희인의 마음은 측은지심도 있었다.

윤씨 형제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양반들 사이에서 괄시를 받아온 것이나 윤웅렬이 관직 길에 오른 이후 부당한 대접이나 탄핵을 받아 힘들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흐음,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 세상 얘기나 해 드립지요. 목천 이 구석에만 있으니, 답답허실 것 같아서요.”

윤영렬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표정이 바뀌었다.

왜놈들 얘기 들으셨습니까? 아니지, 이제는 일본이라고 해야 맞지요. 일본에 가면 서양에서 들어온 진귀한 물건들이 아주 많다 합니다. 멀리에 있는 사람과 얘기를 할 수 있는 요상한 물건도 있고, 한양의 광화문보다 높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집들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포와 화승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식 총들이 있다 합니다. 왜놈, 왜놈 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윤영렬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마치 눈앞에 진귀한 물건들을 직접 본 듯한 표정이다.

그런가? 자네도 직접 보았는가?”

이희인도 맞장구를 쳤다.

제 조카놈, 치호가 서찰을 보내와 알았습니다. 형님도 알다시피, 우리 치호가 얼마나 명석합니까, 큰 세상을 본 게지요, 허허.”

윤영렬이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렇지, 자네 조카는 어윤중 대감의 제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지. 참 아까운 인재야. 시대를 잘못 태어나서 참 안쓰럽네그려. 그래, 지금 일본에 있는 겐가?”

이희인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윤영렬은 조카 이야기가 나오면 어윤중이 인정한 수재다, 서얼 자손이라 어찌 출세할 수 있느냐, 관직조차 나가기 힘들지 않은가!’라고 항변하려 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형 윤웅렬을 나무라지 말라는 말을 돌려 하려 했으나 이희인이 먼저 품을 넓혀 얘기해 뭐라 답할지 선뜻 떠오르질 않았다.

윤영렬은 이희인과 담소를 마치고 대문을 나섰다. 스무 걸음쯤 걸은 그는 뒤돌아 이희인의 집을 향해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분명 알고 있는 눈치야. 헌데 왜 형님 얘기나 치호 뒷얘기를 꺼내놓지 않지?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 근방 양반놈들의 마음은 도통 읽을 수가 있나? 세상이 어찌 변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족보 타령이나 하는 놈들의 눈치를 이젠 더 이상 보지 않으련다!”

윤영렬은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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