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12회 - 비와 구름을 몰고 온 여인
“꽝! 꽈아아앙!”
흐린 하늘로 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탐진강가에서 장녕성을 향해 서 있던 도인들이 함성을 지른다. 이미 전날 벽사역에서 승리를 맛본 도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하룻밤 사이에 여름 장맛비처럼 불어난 도인들의 숫자를 눈으로 헤아려 보며 이소사는 말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최신동이 행렬의 맨 앞에서 나팔을 불었다. 나팔소리가 고요하던 장안으로 울려 퍼지며 성 주변의 사람들을 깨웠다. 도인들은 일제히 장녕성을 향해 전진했다.
가파른 산자락을 타고 올라야 하는 남문 공략은 이방언 대접주가 맡았고, 탐진강 줄기에서 올라오는 동문을 향하는 동학군은 이인한 대접주가 지휘하고 있었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홍조를 띤 볼, 형형한 눈빛의 젊은 여인, 이소사가 이끄는 농민군은 북문을 치기로 하였다. 동문 앞에는 이미 보부상들과 민보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동문으로는 구교철과 이사경이 민보군의 뒤에서 공격을 하기로 했다.
벽사역 쪽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다시 짙어졌다. 누군가 새로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매캐한 냄새가 고을을 덮었다. 어제부터 타던 가옥들도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었다. 연기는 안개와 섞여서 이상야릇한 기운을 자아냈다. 동학군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서 접을 이름을 대며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안개가 좀 더 농밀하게 밀려들면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것은 동학군들에게 불리한 것인지 유리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말을 타고 장녕성 전투에 전면으로 나선 이소사는 젊고 예뻤다. 게다가 신기(神氣)까지 지녔다고 하니 이미 도인들 사이에서 이소사에 대한 소문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도인들은 이소사의 지휘를 받으며 새로운 기운이 차올랐다.
이소사는 말 위에서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동문에서 남문에서 서문에서도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추어 도인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장녕성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보따리를 들고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앞으로, 앞으로 나가라! 이제 우리에게 오는 것은 한울님의 세상, 살아있는 생명들이 존중받는 새 세상이 열린다!”
“켄지켄지 켄지켄!”
“두우웅 두우웅!”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신호음으로 떠오르자 북소리가 뒤를 따르며 도인들이 장녕성 성문을 부스고 있었다. 서쪽에서 내려오던 동학군들은 산에서 성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맹수처럼 외쳤다.
“한울님의 새 세상이 열린다. 장흥 부사 박헌양을 죽여라.”
긴 여운을 끌며 징이 울렸다. 지잉징 울려대는 그 소리가 자꾸만 농민군을 자극했다. 북소리가 이어지고 잔바람 같은 장구소리도 급하게 다가왔다. 이소사는 말 위에서 북문을 바라보았다. 관군들과 민보군까지 성곽에 빽빽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늘 해는 뜨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미 동이 틀 시간이 지났는데도 하늘은 몹시 흐렸다. 이소사는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관군과 민보군들은 옷차림이 달라서 어둠 속에서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징소리가 급하게 몰아쳤다. 서둘러야 했다. 전날 벽사역을 점령했을 때 역전을 지키는 찰방은 도망을 가고 없었다. 찰방 김일원이 강진 병영에 구원을 요청하러 떠났다는 소문이 이미 농민군에게 알려졌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성을 점령해야 했다.
“앞으로!”
그녀는 소리 높이 외쳤고, 벽력 소리가 나더니 화포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성안으로 떨어졌다. 성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북문으로 다가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미 동학군들은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성벽을 기어서 성안으로 진입한 터였다. 서쪽 산으로 이동을 하는 동학군들이 줄을 이었다.
새벽안개 속에서 장흥부사 박헌양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는 으스스 온몸을 떨며 스멀스멀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을 털어 버리려 애썼다. 어제 벽사역이 농민군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그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다만 한번 죽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만 명이 넘은 농민군이라 할지라도 장녕성은 천연요새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서 평지에서 올라오는 동문만 막아내면 수성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문은 담벼락에 붙어 있어서 쉽게 드나들 곳이 못 되었다. 민보군과 보부상을 보강하였으니 성문 세 개를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동학군이 득실거리는 나주성도 아직 함락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승산은 있었다.
그는 밤새 작전을 짰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벽사역에서 도망 온 관군이 수십 명, 성을 지키는 수성군이 기백 명은 되었다. 무기 창고에 들어 있던 온갖 무기들을 꺼내서 관군에게 지급을 마쳤다. 민보군에는 미리 무기를 전달했다. 수성군이 성안에서 공격을 하고 민보군과 보부상들이 성 밖에서 공격을 하면 저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한들 호락호락 당하기만 할 판국은 아니었다. 그는 성 안에 있는 돌들을 성곽으로 모아놓고 농민군들이 들이닥칠 때 가차 없이 돌멩이를 굴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제 도망 쳐 온 관군의 장교들은 그에게 싸우기보다는 피신하기를 강권하고 있었다. 동학군의 군세가 오합지졸은 아니며, 무엇보다 그 숫자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상황은 끝이 났다고 말했다. 농민군들과 싸워서 이긴 부사는 없다는 것이었다. 김원일 찰방은 전투를 준비하는 그를 비웃었다. 그는 찰방에게 말했다.
“벽사역을 지키는 관군은 불과 기백 명이었다. 장녕성 안의 우리 상황은 숫자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다. 민보군이 들어오고 보부상들도 협조를 하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이다. 벽사역과는 상황이 다르다.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벽사역을 지킬 방법은 없다. 어제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터이니 성에 모인 역졸들에게 다시 한 번 엄명을 전하라. 만약 역졸들의 신분으로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을 친다면 엄벌에 처하리라.”
그러나 찰방은 김일원은 고개를 저었다. 부사의 눈길을 피하며 슬그머니 외쳤다.
“나리, 빨리 상황 판단을 다시 하소서. 저들 또한 어제의 숫자가 아니올시다. 어제는 천 명이었는데 이미 강진과 보성, 해남에서 합세한 병력이 만여 명을 넘었다고 하옵니다. 기껏해야 천 명 될 동 말 동한 성안의 병력이 만 명을 당해낼 수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어제 강진병영에 군사요청을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주로 가서 청병을 하여 오겠습니다.”
찰방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박헌양은 어제 전투로 아들을 잃은 찰방이 안쓰러웠다. 그는 이미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아들까지 잃고서 장녕성에서 농민군들의 손에 죽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눈가에 두려움과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스스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적이 몇 만 명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음에서 이미 졌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사라지는 것이니라. 적들은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이고 역졸들은 이미 고부에서 농민군들을 진압한 경험이 있지 않으냐? 무장한 군인들이 어찌하여 싸우지도 않고 역을 내주었느냐?”
박헌양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찰방을 쏘아 보았다. 찰방은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사또, 사람의 생명이란 단 한 개뿐, 한번 죽으면 그만이요. 천 명으로 만 명을 당해낸다는 것을 새 발의 피입니다. 빨리 몸을 피하소서. 어제 벽사역이 허물어질 때 이미 장녕성도 사라진 셈입니다. 지원군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몰살당할 것입니다. 어서 도망을 가시고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일본군이 남하하고 있으니 지금 몸을 피했다가 세를 보아 다시 이곳으로 들어되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죽음을 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찰방의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부사는 김일원이 한없이 얄팍하다고 생각했다. 처자식을 버리고 제일 먼저 역을 빠져 나온 관리의 목을 베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군이 시급했다. 만여 명의 농민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천여 명의 관군으로는 끝끝내 감당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찰방에게 일렀다.
“그대가 보다시피 목숨이 경각에 달렸느니라. 빨리 말을 타고 나주로 가서 서찰을 전하라. 장녕성이 무너지면 적들은 이제 나주로 향할 것이다. 여기에서 저들을 막아내는 것이 나주 관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니 가서 원군과 함께 내려오라. 그것만이 찰방이 공을 세울 수 있는 길이다. 이미 벽사역을 지키지 못하고 내준 것은 조정에서 벌을 받아 마땅하나 장녕성을 지킬 구원군을 얻어 온다면 그 죄를 사하게 되리라.”
찰방은 뒤도 안 돌아보고 부사의 면전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곧 관복을 벗어던지고 솜저고리의 평복차림으로 성을 빠져 나갔다.
서쪽에서 산으로 들어오는 농민군의 함성이 들려왔다. 평지에서 장녕성으로 들어오자면 성문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성곽은 높고 튼튼해서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쪽 산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산에서 내려오는 동학군들에게는 오히려 안정적인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동학군들이 줄을 지어 성곽을 걸어서 성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부사는 동헌이 서서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갔다. 이제는 길이 없었다. 성벽을 헐어서 마련해 놓은 돌멩이들은 던져 보지도 못하고 성을 내주게 생긴 것이다. 그는 수성군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서문에 비도들이 들어오고 있다. 서문을 방비하라!”
화승총이 불을 뿜어댔다. 그러나 밀물처럼 밀려드는 동학군들은 대포 소리와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을 넘어 들어왔다. 수백 명의 동학군들이 입성하자 제법 전열을 갖추어 대응하던 수성군들은 이내 겁에 질려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부사는 수성군들에게 외쳤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적을 두고 도망을 치는 자들은 모두 목을 베리라.”
그러나 농민군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화승총 몇십 자루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관군들이 총을 쏘아서 눈앞에서 쓰러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서 또 농민군들이 밀려 왔다. 그 거대한 숫자에 놀란 관군들은 농민군들이 코앞에 나타나자 총을 버리고 도망을 치니라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혼이 나간 것이다. 부사는 동헌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가진 것은 고작 죽창일 뿐인데 총과 칼을 가진 관군들이 밀리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는 서문의 상황을 피해서 동문을 향해 갔다. 다행히 동문은 닫혀 있었다. 수성군과 민보군이 아직까지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농민군들이 뒷전에서 공격을 시도하려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동문의 군사들을 서문 쪽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동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인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박헌양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장흥 고을 부사의 목숨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고작 농민군의 반란에 목숨을 내주려고 공부를 하여 출사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학문에 힘을 썼던 그는 관리가 되어서도 청렴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억세게도 관운이 안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비겁하게 농민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저들이 가진 것은 고작 죽창일 뿐이었다. 저들이 꿈꾸는 세상도 단지 며칠 만에 무너질 게 뻔했다. 그 며칠을 견뎌야 했다. 박헌양은 손으로 얼굴을 비벼 가며 애써 정신을 수습했다. 며칠이 아니라 단지 오늘 이 순간만 넘긴다면 내일은 청병이 도착할 수도 있었다.
‘단지 며칠이야. 며칠만 견디면 다시 수습이 되는 거지. 일본군이 내려오고 있지 않는가? 오늘 전투만 이기면 내일은 병영성에서 지원군이 도착한다. 오늘이 중요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동문으로 허우적허우적 달려갔다. 그리고 관군과 민보군에게 외쳤다.
“저들은 무기가 없다. 우리에겐 화승총과 포가 있다. 저들이 성벽 밑에 도달하면 돌들을 밀어뜨려라. 저 역도들 몇 놈의 머리만 깨부수면 놀라서 모두 흩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내주면 갈 곳이 없느니라. 싸움은 마음에 달린 것,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부사는 그 함성이 공허하게 들렸다. 이미 슬금슬금 성을 빠져 나가고 있는 병사들이 눈에 띄었지만 잡으러 갈 수 없었다. 우선 눈앞의 상황이 급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사또의 모습을 보며 사기를 회복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어제 벽사역에서는 찰방이 먼저 도망을 쳤다는 소문은 병사들에게도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관리들이란 목숨을 부지할 길만 찾을 뿐,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병사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로 남문으로 달려갔다.
“오늘 이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면 곡식창고를 열어서 그동안 모아 놓은 쌀들을 전부 너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오늘의 싸움에 함께한 누구든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목이 터질 듯이 관군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은 이미 수적 농민군에게 밀려서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었다. 부사의 제의가 달갑지 않았다. 눈앞에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포상을 받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그는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의외로 반응이 없자 성문을 바라보며 서성였다.
북문 쪽에서 첨병이 달려왔다.
“사또 나리, 지금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이 여자라고 하옵니다.”
“여자라고? 아니 어느 집 아녀자가 농민군을 지휘한단 말이냐?”
첨병은 북문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였다.
“저기를 보옵서소. 안개 속에서 말을 타고 앞장서서 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소사라는 여자인데 절세미인이랍니다. 신기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인다고 합니다요.”
그는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는 성곽을 바라보며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세상이 망하려니 별 해괴한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여자가 어떻게 남정네들 싸움터에 끼인단 말이냐.”
대답은 없었다. 찬바람이 훅 끼치며 온몸에 또 소름이 돋았다. 오늘 죽는단 한 들 여한은 없었다. 다만 이제야 누리기 시작한 영화를 포기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청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던 날의 영화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던 이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고작 농민 반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 것인가? 그는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각오를 다졌다. 내 공간은 내가 지키리라.
“병사들은 들어라, 농민군이 가진 것은 고작 죽창일 뿐이다. 너희들이 가진 화승총에 장전을 하고 각 성문에서 다가오는 농민군들을 쏘아야 하느니라. 한발도 헛나가면 안 된다.”
찬 기운이 몰아온다. 오늘이 섣달 초엿새, 이 해를 못 넘기고 저승사자를 맞이할 것 같은 불안감이 찾아든다. 그런데 해는 왜 뜨지 않는가? 어제까지 말짱하던 날씨가 오늘따라 겨울비라도 내릴 듯 하늘이 잔뜩 내려앉아서 부아를 돋우었다.
“에잇, 쯔쯧. 쨍하고 맑은 날 싸우는 게 낫지, 스멀스멀 귀신같이 내려앉는 물안개는 저 역도들보다 더 재수가 없구나.”
그는 두 손을 들어서 주변을 물리쳤다. 아무도 남기지 않고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신기가 있는 여자의 소문은 이미 성 안까지 퍼져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신기하다고 했다. 그녀가 나타난 곳엔 언제나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 여자가 역도들을 지휘하며 다가오고 있다고…?”
그는 길게 호흡을 늘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 여자의 손에 최후를 마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공부한 보람이 한낮 여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니.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자 외쳤다.
‘한낮 아녀자의 손에 사나이 대장부가 도망을 치랴! 내 비록 이 성에서 최후를 마치더라도 당당하게 싸우리라. 인생이란 다시 올 수 없는 것이지만 살 때보다 죽을 때가 더 중요하다.’
“그래 봐야 여자인 걸. 여자가 뭘 안다고 말을 타고 농민군을 지휘해.”
그는 천천히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함성이 들려오는 북문 쪽을 바라보았다. 산골짜기를 타고 농민군의 행렬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화승총을 장전하고 북문을 향해 쏘았다. 총알은 북문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탐진강 가로 몰려든 농민들이 동문 쪽으로 진군을 하고 있었다. 산이 가로막고 있으나 남문 쪽에서 이미 많은 농민군들이 올라오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문제는 북문이었다. 북문 쪽으로 다가오는 농민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단전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사지는 어쩔 수 없이 덜덜 떨렸다. 그는 재빨리 병졸을 불러서 관군들을 모두 북문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민보군을 이끌고 있는 유생 김한섭의 소식이 당도하길 기다렸다. 김한섭이 이끄는 민보군은 강진에 있었다. 한나절이면 도착하고도 남는 거리에 있는 그가 그립기 한량이 없었다.
농민군들이 한 차례 밀려왔다가 완강한 저항에 밀려 썰물지듯 물러간 틈에 김한섭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 듣는 만 못한 절망적인 것이었다.
“김한섭의 민보군은 아직 전투 준비를 갖추지 못하여 오늘 전투에는 참가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 장녕성이 무너지면 적들이 내일은 병영성을 공격해 올 거라고 해서 병영성 전투를 준비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서찰을 가지고 떠난 군졸은 흙투성이의 허름한 농민복 차림으로 반절을 하며 소식을 전했다. 서찰도 없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박헌양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애써 솟아오르는 분노감을 누르며 물었다.
“이곳을 지키면 강진성은 무사할 게 아니냐. 그렇게 어리석은 판단이 어디 있단 말이냐. 벌써 이곳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강진성을 지킬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군졸은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또 나리, 외람될 말씀이오나 강진병영에서도 이미 높은 양반들은 모두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사옵니다. 수만의 역도들이 몰려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떠나야 한다고 이미 성안은 텅 비다시피 되었다 합니다.”
“뭐라고?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부터?”
목울대를 심하게 꿈틀거리며 박헌양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단전에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 보지만 스멀스멀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동문으로서는 이방언이, 북문으로는 신녀인 이소사가 접근하고 있다고? 그럼 남문은 보나마나 이인한이 맡고 있겠구나. 이런 빌어먹을 놈들. 한 곳이라도 뚫리면 안 되니라.”
병사들은 북문에 집중적으로 집결이 된 듯 북쪽에서 함성소리가 울려 퍼진다. 꽹과리 소리가 박자를 빠르게 달구며 점점 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징징징 울리는 징소리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더 숨가쁘게 만들었고, 도둑고양이처럼 쇠와 징 사이를 뚫고 쳐대는 북과 장구소리에 박헌양은 이미 혼이 나가고 있었다.
“아, 저놈의 꽹과리 소리. 저 소리를 죽여야 하는데.”
꽹과리와 북소리는 싸우기도 전에 적의 사기에 눌리게 했다. 억세게 파고드는 꽹과리 소리에 농민들의 원망과 분노가 담긴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엊그제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주리를 틀었던 농군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식솔이 많다고 엄살을 털며 세금을 감해 주라던 그 늙은 농부는 곤장 몇 대에 파르르 떨며 숨이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동헌에 앉아서 그가 혼줄을 냈던 농부들이 모두 농민군이 되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엊그제까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농민들이 이제 자기 머리를 노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 목숨을 내놓고 저들과 싸워 이기리라. 이곳이 내 무덤 자리가 될지라도, 내 기필코 저 역도들을 징치하고야 말 것이다.”
그는 어제 저녁 내내 갈게 한 칼을 꺼내 들었다.
“누구든지 오기만 해라. 그러면 단칼에 목을 베어 줄 테이니.”
“와아아아아.”
농민군들의 함성이 또다시 커졌다. 한 차례 물러났다가 금세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북문에 도착한 농민군들이 굳게 닫힌 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북문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박헌양은 소리를 질렀다.
“모두 화승총을 쏘아라. 적의 머리에 제대로 맞도록 쏴야 한다. 돌을 던져라. 농민군들의 머리를 겨냥하라!”
화승총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선두에 섰던 농민군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주춤하던 농민군들이 이내 더 큰 함성을 울리며, 장마에 불어나는 계곡물처럼 마구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헌양은 무너진 성문으로 들어오는 농민군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가 한 사람의 농민군의 가슴을 찔렀을 때는 이미 수십 명의 농민군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그는 다가오는 농민군에게 칼을 휘두르며 접근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를 에워싸고 있는 농민군들은 수십 명에서 이제는 기백 명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소사는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북문 안으로 들어갔다. 수성군들이 정신줄을 놓고 발포한 화승총알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폭죽에 불과했다. 선발대로 달려 나간 농민군들의 죽창을 휘두르며 수성군들의 화승총을 빼앗아 버렸다. 수성군들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군에게는 독안에 든 쥐였다. 성안 어디서건 그들을 숨어 들어간 곳은 농민들이 다 뒤지고 있었다.
육탄전이 벌어졌다. 수성군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높은 성곽에서 아래로 뛰어 내렸다. 한편으로는 남문 쪽으로 달려 산 속으로 도망을 시도했지만 남문도 이미 농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동문으로 들어오는 이방언 장군의 병사들은 탐진강으로 뛰어 드는 민보군을 잡아 죽이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수성군 한 명이 잡힐 때마다 농민군 수십 명이 달려들어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화가 난 농민군들은 성안 곳곳에 숨어 있던 백성들을 찾아내 공터로 모이게 했다. 농민군을 피해서 성 밖으로 도망을 치는 백성들을 쫓아가는 농민군도 여럿이었다. 이방언 장군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삽입 그림 저작권 : "Active Sky" by rabiem22, used under CC BY / Cropped from orig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