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경상도편

경상도편 (8회) - 이하백아 왜 왔나? 홍조동아 왜 죽였나?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26. 06:00



(상주에도 동학도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해월은 멀리 문경의 소야까지 포덕. 군위처녀 운매와 의성총각 이하백의 만남은... )

숨이 멈출 것 같았지만 꼼짝도 못하고 바위에 붙어 있었다. 호랑이떼도 망대에 있는 사람들처럼 좀체 돌아갈 줄 몰랐다. 도치는 죽을 맛이었다. 일어설 수도 없고 달려갈 수도 없고 그대로 바위에 붙어 있어야 하다니,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달려들 것 같아서 몸이 덜덜 떨렸다.

이윽고 한낮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긴 산 그림자가 들녘을 삼켜 버리자 이야기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도치는 긴장해서 호랑이 떼를 바라보았다. 몸을 숨기고 눈빛만 번득이고 있던 호랑이 떼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상주에도 도인들이 모래알처럼 많아졌습니다.”

 얼굴이 통통한 사내가 해월에게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면서 덧붙였다. 때마침 으르렁거리던 호랑이 소리가 더욱 커졌다.

 

“가만, 이건 맹수의 소리야. 저들이 우리를 따라온 건가?”

 갸름한 얼굴의 중년남자가 일행을 정지시키며 숲속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으르릉거리는 호랑이 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야단났군, 호랑이 소리야. 호랑이가 사람냄새를 맡으면 천 리라도 쫓아간다는 데...”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사내가 일행을 정지시키며 해월을 바라보았다. 해월은 그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손을 내저었다.

 “먹거리가 곧 하늘이니 우리가 호랑이 밥이 된다고 하면 그것도 하늘이 뜻이 아니겠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호랑이에게도 우리의 뜻을 전해 보기로 합시다.”

해월은 조용히 앞으로 나와 호랑이들이 으르렁거리고 있는 곳을 쳐다보며 주문을 외웠다. 한 떼의 호랑이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렸다. 도치는 바위를 붙잡고 매달렸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호랑이가 뭔가를 던져 주고 가는데요.”

 누군가 다급한 소리로 외쳤다. 호랑이떼가 숲을 헤치고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잔나무 가지가 흔들리며 소란스러웠던 숲이 잠잠해졌다. 도치는 바위 위에서 고개를 들고 숲을 바라보았다. 소나무 사이로 사라져 가는 호랑이의 꼬리가 보였다.

 

 “저기 호랑이가 물어 다 놓은 게 있어요.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마 짐승인가 봅니다.”

동그란 얼굴의 사내가 숲을 헤치며 달려갔다. 남은 사람들도 조심조심 숲속으로 걸어갔다. 도치는 바위 위에 서서 숲속을 바라보았다. 꿈틀꿈틀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었다.

 “노루네요. 갓 잡은 것 같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어요. 호랑이들이 왜 노루를 잡아다 놓고 갔을까요?”

 “호랑이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놓아 주는 게 좋겠소.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은 것을 어찌 사람인 우리가 잡아먹겠소.”


 “오늘은 날이 저물고 있으니 여기에서 저녁을 먹고 내일 새벽에들 떠나도록 하시오. 호랑이가 온 것은 오늘 저녁에 떠나는 것을 막으려던 것이었나 보오. 식즉천(食卽天)이니 주변에서 가꾼 것, 가꾸지 않은 것들이 모두 하늘이 주신 우리의 먹거리요. 감사하며 준비합시다.”


도치는 여전히 바위틈에 딱 붙어서 집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월 부인을 도와 부리나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연기가 피어나고 텃밭에서 무와 배추를 뽑고 가지와 고추를 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서산으로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도치는 어둠이 내리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며 바위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혼자 생각에 빠져 들었다. 호랑이는 해월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 호랑이와 마주쳤을 때는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을 했고, 호랑이가 슬쩍 사라진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월의 집을 가려고 나섰을 때 호랑이가 막아 선 것이나 오늘 호랑이 떼가 노루를 잡아 놓고 간 것을 보니 해월이라는 사람이 더욱더 남다르게 보였다.

도치는 해월이 떠나기 전에 입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이나 모레 어머니를 졸라서 동학도인이 되자고 해야지. 해월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니 더 이상 미루다가는 해월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지도 몰랐다.




6. 예천 -이하백이 왜 왔나, 홍조동아 왜 죽였나? (1894. 8)


사흘 전 추석이 지났지만 아직 들에는 벼들이 그냥 서 있었다. 거두기 전이라면 벼알곡은 조금이라도 더 볕을 받는 것이 좋았다. 신원1)은 들이 넓었다. 남쪽으로 팔공산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해는 온종일 들을 덮었다. 해가 서쪽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길 때 신원장터 입구의 주막에 한 처녀가 들어섰다.


신원 장날은 다음 날이었지만 주막엔 사람이 꽤 웅성거렸다. 처녀가 들어서자 한쪽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포졸들이 서로 눈짓을 건넸다.


 “아주머니, 식초가 다 떨어져가네요. 식초 만들게 탁주 두 되만 주세요.”

 “응. 운매 왔구나. 그래. 항아리 내놔봐.”

운매가 뚜껑 없는 대나무 석작에서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를 꺼내어 주모 서 씨에게 건넸다.

포졸 하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이름이 운매야? 우는 메주? 울었던 메주?”

마주 앉았던 포졸이 킥킥댔다.

입구 쪽에서 장국을 먹던 얼굴이 하얀 선비 하나가 손가락으로 갓 날개를 치켜 올리고 포졸과 처녀를 주시했다. 과연 처녀는 얼굴이 네모형으로 썩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선비는 ‘얼굴 생김새를 가지고 저렇게 놀려도 되는 건 아니지.’하는 생각을 하며 처녀의 반응을 지켜봤다. 뜻밖에도 처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5전 드리면 되지요?”

 “응. 그래. 어머니한테 안부 전하고...”

주모는 운매에게 항아리를 건네면서 한 편으로는  포졸들의 짓거리에 매의 눈초리를 보냈다. 처녀는 포졸들에게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솔잎뭉치를 실로 동그랗게 묶은 것으로 항아리 뚜껑을 막고 석작에 다시 담아 머리에 이었다. 입구 쪽으로 향하려는데 포졸이 발 하나를 스윽 내어 밀었다. 처녀가 발에 걸려 기우뚱하며 머리의 석작을 떨어뜨릴 찰나 얼굴이 하얀 선비가 재빠르게 한 손으로 석작을 받아들고 한 손으로는 운매의 팔을 잡아주었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선비는 석작을 처녀에게 건네주고는 밥상으로 가 남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응? 울줄 알았는데 안 우네? 우는 메주 운메가 아닌가?

포졸들이 한 편으로는 선비에게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고는 운매에게 다시 찝적거렸다. 처녀는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석작을 머리에 이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더니 뒤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아주머니,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고 하셨죠? 오늘도 사방이 부처님 나라네요. 하하하”

그리고는 여전히 포졸들은 거들 떠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긴장하고 있던 주모 서씨의 눈매에 비로소 웃음기가 서렸다. 선비는 일행에게 눈짓을 하고 얼른 자리를 떴다.


떨어지는 해가 처녀의 오른쪽 뺨을 비추었다. 조심조심 따라가던 선비는 얼마 안 가 처녀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걷게 되었다. 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고맙다는 인사도 미처 못했네요. 감사해요.”

 “뭘요. 이름이 운매라 했소?”

 “네. 제 아버지는 훈장이셨어요. 제가 넷째 딸인데 동네에서 딸 그만 낳고 아들 낳으라고 끝순이, 필남이... 이렇게 이름 지으라고 했대요. 그런데 제가 태어날 때 하늘에 매화처럼 생긴 구름을 보셨대요. 그래서 운매라 지어주셨지요. 정운매.”

 “이름이 예쁘구려. 무거우면 내가 들어 드리리까?”

 “아뇨. 괜찮아요. 머리에 이는 게 더 쉬워요. 아버지가 계실 때는 이런 일 안했어요. 언니들이 다 출가하고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신 뒤로는 제가 다 해야 해요. 어머니가 신 음식을 좋아하셔서 초를 제가 늘 안 떨어뜨리고 만들어 놓지요.”

 “효녀로구만요. 나는 이하백이라고 해요.”

 “뭐 하시는 분이고 어디 가는 길이세요?”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 세상공부를 좀 하느라 집을 나왔다오.”

 “일행분들이랑 오늘 머무르실 데가 없으시죠? 저희 집으로 가세요.”

 “응? 어찌 알았소?”

 “일행 분들이 아까부터 멀리서 따라오는 것 알고 있었어요. 그냥 지나가는 분들은 아닌 것 같네요.”

 이하백은 잠시 말이 없었다. 운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봄에 남쪽에서 동학하는 농민들이 일어나서 시끄러웠다고 들었어요. 동학하는 분들은 다 점잖으시던데...”

이하백의 낯빛이 환해졌다.

 “동학을 아시오?”

 “하하. 얼굴이 밝아지셨네요? 사실은 저희 아버지도 동학을 하셨어요. 다른 집 같았으면 딸만 넷 낳았다고 첩실이라도 얻으려고 난리였을 거예요. 그런데 아버진 첫째 딸 낳았을 때 너무 좋았고, 둘째 딸 낳았을 때도 너무 좋았고, 셋째 딸 낳았을 때도 너무 좋았고, 저를 낳았을 때도 너무 좋았대요. 그 때마다 오동나무를 심으셨답니다. 아들 딸 차별도, 양반 상놈 차별도, 모든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아이고, 이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가씨를 주막에 있던 포졸들이 왜 몰라봤을까?”

 “하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은 없다고 하셨어요. 자기가 하늘님이라는 걸 몰라서 그럴 뿐이래요. 제 얼굴이 유난이 각이 져서 가끔 그렇게 놀리는 이들이 있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버지는 무엇에도 휘둘리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하백은 볼이 빨개서 가쁜 숨을 쉬는 운매를 흘깃흘깃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 사실 우리는 동학도들이라오. 세상이 조용하면 나도 아가씨 같은 처자 만나 장가들어 살면 좋을텐데...”

 “세상이 계속 시끄러울까요?”

 “작년 봄에 보은에서 큰 취회가 있었다오. 배고픈 백성들 등쳐먹는 탐관오리들도 문제지만 왜놈들이 자꾸 조선을 넘보고 있어요. 지난달엔 일본 놈들이 부산 앞바다로 들어와 계속 한양 쪽으로 올라가며 전선을 깔고 있다오. 전선을 까는 건 전쟁준비를 한다는 거고 조선을 언제든 먹겠다는 뜻이지요. 동학을 창도하신 수운선생님이 일본을 조심해야 한다고 수차례 말씀하신 게 다 이유가 있어요. 전선을 깔려면 중간중간 병참기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인근의 농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지요. 땅도 마구 빼앗고. 장차 큰일이 일어날 터라 농민들이 여기 저기 전선을 끊으면 일본군들이 또 찾아낸다고 난리, 찾으면 죽인다고 난리. 아주 말이 아니지요.2) 문제는 관군과 못된 양반들이 일본놈들과 한 편에 서 있다는 거지요.”

 “아유, 정말 답답한 노릇이네요.”

 “얼마 전에는 구산동에서 동학도 11명을 민보군이 잡아다가 생매장을 했다오.”

이하백이 분노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드문드문 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큰 감나무 있는 집이 우리 집인데요, 근처 숲에 계셨다가 어두워지면 조용히 들어오세요. 어머니께는 제가 미리 말씀 드릴게요.”


밤이 늦도록 이하백 일행이 들어선 사랑방에서는 조용조용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직 어둑어둑할 때 운매는 부엌에 나가 봄나물 말려두었던 거며 여름장마 뒤에 소금항아리에 넣어두었던 버섯을 아낌없이 넣은 찌개를 끓였다. 쌀이 조금밖에 섞이지 않은 보리밥이지만 정성껏 밥그릇에 담았다. 그들은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섰다.


명절직후의 장은 보통은 한가한 편이었다. 그래서 19일 장은 한산했을 터였지만 장에서 돌아온 사람이 들려준 소식은 엄청난 것이었다. 외지에서 온 백 명 가까운 비도들이 의흥관아에 쳐들어갔다가 팔공산 쪽으로 움직이며 양반집들을 혼내 준다는 것이었다. 운매는 크게 놀라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날 밤 늦게 이화백이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운매는 부지런히 감자를 삶아 늙은 오이를 썰어 넣고 식초를 넣은 냉채과 함께 가져다주었다. 이화백이 감자 두 알을 가지고 나와 솥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며 운매에게 한 알을 건넸다.


 “양반들을 혼내 주셨나요?”

운매가 감자를 입에 넣으며 웃었다.

이화백은 피로가 심한 얼굴임에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양반이라도 양심 있고 행실이 올바른 자들은 우리가 건드리지 않소.3) 내가 속해있는 접의 지도자 중에는 상양반도 있고 보통 양반들도 많아요.”4)

 “선비님은 어쩌다가 동학도가 되셨어요?”

 “예천 소야동에 사시는 최맹순이라는 분이 의성 안성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접주신데 그 분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어요. 해월이라는 더 큰 선생님과 의성에 오시면 가끔 강독을 들었지요. 혹시라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야동 사시는 최맹순 어른을 찾아뵈세요. 그분들이 다니시면 동네 사나운 개들도 조용해진대요.”

 “네. 제가 오라버니라 불러도 돼요? 언니들 밖에 없었던지라...”

 하백은 운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렇게 해요.”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운매의 팔을 통해 찌르르한 것이 올라와 가슴까지 저리는 듯 해서 운매는 흠칫 놀랐다.

 “아이구머니나. 오라버니라면서 공대는 왜? 어서 쉬셔야지요.”

운매는 들어가시라며 하백을 밀쳐내고 손을 뺐다.


다음 날도 운매는 새벽밥을 지었고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운매는 아침나절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땡감을 주워다가 따듯한 소금물 항아리에 넣어두었다. 내일 새벽 그들이 길을 떠날 때쯤이면 떫은맛이 빠져 먹을 만하리라. 아버지의 옷가지들을 모두 꺼내어 손질하면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화백일행은 밤늦게 무사히 돌아왔다. 운매는 방에 감자와 늙은 오이냉채를 넣어주었다. 화백이 역시 감자 두 알을 들고 살며시 빠져 나왔다.


 “어머니는?”

 “초저녁잠이 많으세요. 나이가 들면 그런대요.”

살짝 웃는 운매는 처음 주막에서 보았던 그 처녀가 아니었다. 하늘의 선녀가 이처럼 예쁠까?

 “운매, 내일은 아마 신원장터에서 큰 전투가 있을 것이요.”

하백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못된 양반들이 민보군을 꾸려 우리와 대적하려 혈안이 되었다는 소문이요.”

 운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는 했다.

 “왜 아무 말이 없소?”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뾰루퉁하게 말하는 운매의 소리가 떨려나왔다. 20일 달은 반달보다는 아직 컸다. 화백은 구름이 달을 비껴났을 때 운매의 뺨에 반짝이며 흐르는 두 줄기 물줄기를 보았다.

 “내 어쩌자고 이리 예쁜 처자를 이제야 만나게 되었을꼬?”

운매는 얼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화백이 그 손을 들어 가만히 자기 뺨에 대었다. 하백은 와락 운매를 껴안고 귀에 속삭였다.

 “그동안 고마웠소. 어렵고 힘들 때면 주문을 외워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내 가슴 속 하늘님 모시니 조화가 자리 잡고 영원히 잊지 않으니 만사가 다 깨달아지이다. 나 역시 잊지 말아줘요. 눈 속에서 핀 매화보다 더 예쁜 구름매화 애기씨.”


다음날 저녁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을 꼬박 새우고 기다리던 운매는 동이 트자마자 신원장터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주모 서 씨는 헝크러진 머리를 가다듬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살다 살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무슨 일이?”

 “어제 여기 장터에 동학군들하고 민보군들하고 수백 명이 뒤엉켜 전쟁이 났더란다.”

 “그래서요?”

 “죽고 터지고 깨지고...서른 명 가까이나 경상감영에 끌려갔어.”

 “동학군이 졌어요? 그래서 끌려간 거예요?”

 “그럼. 민보군은 작심하고 관에서 총이랑 무리들을 받아왔던 걸. 동학도들은 뭐 손에 변변한 거나 들었나, 어디? 참, 너 술 사러 왔을 때 석작 받아줬던 그 잘생긴 선비도 그 속에 있더라.”

 “잡혀간 사람들은 어떻게 된대요?”

 “경상감영에서 오늘 죄다 처형한대.”

운매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씨가 놀라 운매를 일으켜 툇마루에 앉혔다.

 “그 대율동에 홍조동이 있지 않으냐? 너희 동네 아래쪽 한밤동에 5대조부가 당상관 지냈다던... 그 자가 민보군을 꾸려서 아주 이를 갈고 있다가 악착같이 잡아가더란다. 5대조부면 얼굴을 알겠느냐 목소리를 들었겠느냐. 맨날 옛날 고리짝에 죽은 조상벼슬 앞세우며 거들먹 거리더니만. 동학도들은 못된 양반들 혼내킨다더니 그 인간은 어찌 성했는가 몰라.”


운매는 화백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하염없이 울며 걸었다. 지금쯤... 지금쯤이면... 아... 아... 그녀는 길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나무 밑에 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더 서럽게 눈물이 솟구쳤다. 하염없이 따듯했던 사람.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 이제 뜻을 못 이룬 채 아쉬움을 안고 이승을 떠날 사람. 정신없이 울다가 눈물을 훔치고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곰곰 생각했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음날 그녀는 아버지가 가르치던 동네 조무래기들을 불러 모았다. 감자를 삶아놓고 노래를 가르쳤다.

 “왜 왔나 왜 왔나. 이하백이 왜 왔나.

 영락없이 죽어 갈 길 이하백이 왜 왔나.

 왜 죽였나 왜 죽였나 이하백이 왜 죽였나.

 조동아 홍조동아 이하백이 왜 죽였나.” 5)


노래를 가르친 지 사흘째 되는 날에는 비가 왔다. 갈 곳 없는 조무래기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그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녀석이 물었다.

 “누나, 이 노래를 왜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는 건데?”

운매는 잠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물방울이 후두둑 치마폭에 떨어졌다.

 “이건...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네 아이들에게, 네 손자들에게도 계속 가르쳐주면 좋겠다.”

맨 앞에 앉았던 제일 작은 아이가 다가와 운매의 무릎 위에 앉으며 목을 껴안았다.


운매는 다음날 비가 그친 뒤 풀섶의 이슬이 마를 동안 어머니와 근처에 사는 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다음날인 8월 27일 새벽 현창 아래 한밤동의 홍조동6) 집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새벽 어스름에 타오르는 불빛을 돌아보며 운매는 작은 보따리를 석작에 담아들고 북으로 북으로 예천 소야동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밝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 했다.

 

(주는 생략.  다음주에는 인터넷 공개 마지막 8회가 이어집니다. 상주에서의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