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2회) -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않았다
손병희는 남접의 장군 전봉준과 첫 대면을 하는 순간 ‘늑대의 상이로다.’라고 혼잣말을 하였다. 불의와 불평등을 한시도 참지 못하며 그래서 절대 권위에 길들여지지 않고 투쟁하는 인간. 전봉준에게서 영원한 자유를 꿈꾸며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야성을 느꼈다. 반면 전봉준은 손병희에게서 카리스마 넘치는 호랑이상을 느꼈다. 충의에 몸을 던지는 인간, 굳센 의지와 용맹으로 휘하의 사람들을 서늘하게 만드는 위용을 가진 인간….
남접과 북접을 각각 대표하는 장수가 한 자리에 만나 서로를 탐색하는 듯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모두 하늘님을 마음으로 모시는 동도이며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깃발 높이 들고 비장한 각오로 나선 장수들 아니던가. 서로의 거친 손을 따뜻하게 마주잡았다.
“저보다 6살 많으니까 당연히 제 형님이지요?”
손병희가 전봉준을 향해 말했다.
“해월 선생님께서 통령기를 하사하시고 통령에 임명하셨으니 제가 상석에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봉준이 손사래를 하며 겸양하여 말했다.
“천운이 이에 이르러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서 좋은 마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님을 모셨으니 신분과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테지요. 하지만, 만군을 거느리고 적들을 맞서야 하는 자리에는 단연 지략과 경험이 출중한 전 접주께서 서셔야 할 터이지요. 진영을 벗어난 자리에서도 의당 나이 많은 전 접주를 제가 형님으로 모셔야지요. 그러니 이 이야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손병희의 말에 전봉준이 할 말을 잃고 잠시 뜸을 들이자 둘러선 각처의 대접주들도 모두 그것이 적절하다고 거들고 나섰다. 결국 6살 많은 전봉준을 형으로, 손병희를 아우로 하여 호형호제하며 오랜만에 쌀알이 섞인 주먹밥과 시래기 반찬을 서로 권하며 정읍 보은 취회 이후 처음 만난 정담을 나누었다. 전봉준 군의 동학도들은 전라도를 휩쓸던 무용담을 전하느라 분주하였고, 호서 중심의 북접군들은 그들의 전투 경험담을 들으며 전의를 다져 나갔다.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접주들은 막사에 모여 일본군과 관군들에 맞서 어떻게 싸움을 전개해 나갈지 밤새 머리를 맞대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였다. 1차 목표를 공주성 점령으로 잡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공주만 점령한다면, 서울까지 가는 길에 거칠 것이 없었다.
동학군은 20일부터 노성 일대와 경천 일대로 진출한 다음 공주를 목표로 나아갔다. 공주는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는 지리적 중요도를 갖고 있으며 지형적으로도 산이 성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금강이 감싸고 있어 방어에도 유리하였다.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공주성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관-일본 연합부대를 분산시키고자 포진시켰던 목천 세성산의 동학군들이 궤멸되고, 내포 지역에서 승승장구하던 박인호, 이창구의 대군이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여 흩어지는 중이라는 첩보가 속속 들어왔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동학군이었다.
동학군의 공주 공격은 음력 10월 23일부터 시작되었다. 1차 공격은 효포와 이인 쪽에서 공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효포 방면,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은 이인 방면을 각각 담당하였다. 각 진마다 오색 깃발이 나부꼈으며, 사기충천한 동학군들로 온 산과 골짝을 뒤덮었다. 동학군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들이 숲에 숨어 있다가 일제히 일어서면, 그들이 가진 죽창들로 죽산(竹山)을 만들었다.
이인 부근에서 관군을 패퇴시킨 동학군들의 사기가 다시 한 번 치솟았지만, 공주성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 성을 둘러싼 능선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시작되자 전세는 금방 판가름 났다. 산 정상에서 일본군들은 회선포라는 신식무기를 설치하고 올라오는 동학군들을 향해 사정없이 쏘아댔다. 동학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올라왔으나, 일본군의 신식 소총을 당해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진격하던 수백명의 동학군들이 모두 쓰러졌다. 용맹을 자랑하는 전봉준 휘하의 정예병도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 놀랄 겨를도 없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져 갔다. 2파, 3파로 밀고 가는 족족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후퇴와 전진을 거듭하며, 우회로와 약한 틈을 노리며 사방에서 길을 뚫어 보려 했으나 일본군은 치밀한 대응으로 발 빠르게 동학군의 틈입을 차단하고 나섰다. 몇 십 명의 일본군이 뒤를 받치고 그들과 같은 무기로 무장한 관군 수백 명이 진을 친 능선을 수천, 수만 명의 동학군이 달려들어도 도무지 뚫어낼 수가 없었다. 이제 악에 바친 동학군들은 동료들의 죽음에도 겁내지 않고 깃발을 높이 들고, 북을 치며 계속 올라왔다.
이때 동학군들에 맞서 싸우던 관-일본군 연합부대는 스즈키 소위가 이끄는 약 100명의 정예군에 이규태가 이끄는 영병 2,500명, 모리오 대위가 이끌고 지원차 합류한 100여명이 전부였다. 그들 중에 조선말과 지리에 능통한 구로다가 있었다. 그는 스즈키를 도와 이곳에 왔고, 전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계곡을 메운 죽창들과 꽹과리 소리에 그를 비롯, 일본군들은 긴장하였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동학도들은 풀보다도 더 가볍게 꺾어졌다. 전쟁에 이력이 난 구로다는 그들이 전투 경험이 있고 훈련된 자들이 아니라, 농사나 짓던 양민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염없이 계속되는 총질에 손과 팔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는 계곡에 첩첩 쌓인 시체들을 보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또 다시 함성을 지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계곡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니 이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용기로, 무슨 의리로 겁 없이 총 칼에 뛰어드는가? 저 끝없이 올라오는 깃발, 북소리와 함성들···. 아, 저들은 죽음을 초월하였구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