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딸, 용담할매 Part 2(7회 ~ 13회)
→ Part 1에 이어서…
윤은 손 씨 큰어머니에게 괜스레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들어 젊은 어머니가 오게 될 모양이라는 걱정의 뜻을 비추어보았으나 이미 쇠잔할 대로 쇠잔해진 큰어머니는 다만 감사할 뿐이라며 윤이 어른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새어머니는 젊고 시원시원했다. 손 소사가 큰댁을 어머니처럼, 윤을 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집안 살림을 규모 있게 꾸려내는 것을 보고 주변사람들은 모두 한 걱정을 덜게 되었다.
윤이는 집안일을 도우며 짬짬이 다시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언문으로 된 책은 쉽게 읽고 쓸 수 있어서 집을 드나드는 아저씨들에게 책을 구해 달라 부탁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저녁에는 언니 같은 손 소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달라고 졸랐다.
“새엄니는 어렸을 때 뭐하고 놀았어요?”
“너는 뭐하고 놀았니?”
“에이 또 내 얘기부터 묻는다.”
“나도 네 얘기가 궁금하거든.”
“음.... 나는 연화 언니하구, 덕기 오빠하구, 연국이 오빠가 집에 있을 때는 연국이 오빠하구두 같이 산채를 많이 하러 다녔어요. 덕기 오빠는 노는 걸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시간 있을 때마다 산채 나물을 많이 갈무리 해 놓으라고 하셨거든요.”
“뭘 뜯었는데?”
“고사리, 취나물, 참나물, 두릅…. 아유, 고사리 꺾는 건 너무 재밌어. 굵다란 게 그냥 톡톡 부러지거든요. 단양 송두둑에서 살 때가 제일 좋았었는데….”
윤이는 잠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담엔 어디 어디서 살았어?”
윤의 얼굴에 다시 씩씩한 표정이 살아났다.
“그다음엔 상주 앞재로 갔지요. 우린 이사 다닐 때 밤에 다녀야 해요. 거기서 2년 살다가 또 멀리 불냇이래나 하는 데서도 잠깐 살았구 다시 몇 달 만에 앞재로 갔는데 길이 너무너무 멀어서 아주 식구들이 모두 죽는 줄 알았어요. 앞재로 돌아갔을 때는 집에 있던 게 깡그리 다 없어져가지고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고 있었지요. 나중에 누가 베를 가져다주어서 풀씨들을 훑어다가 솜 대신 옷에다 넣구….”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윤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리구 다음엔 어디서?”
“그리구 지금은 이렇게 보은으로 와 살구….”
손 소사는 어린 것이 품고 있는 너무 많은 기억과 슬픔에 자기의 가슴도 먹먹해졌다.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보구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동학 북접 주인.”
“아녜요. 최보따리라구 해요. 최보따리.”
“최보따리라니? 그 속엔 뭐가 있기에?”
“아버지의 큰 스승이 하신 말씀들을 적은 종이묶음들이요. 짚신하구….”
윤의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우리 아버진 자주 쫓기세요. 기미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보따리를 들고 뜰 준비를 하면서 사시는 거예요. 아주 큰일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잡히시면 안 된대요. 송두둑에서 떠난 뒤로 계속 그러시는 걸요.”
“아주 큰일이라는 게 뭔데?”
“세상을 바꾸는 일이래요. 지금은 양반이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잖아요. 자기네가 윗분이라구 하면서 때리구 빼앗구…. 그래도 아랫사람들은 아무 소리두 못하구…. 양반들은 우리네를 천것들, 쌍것들이라구 한대요. 연국이 오빠는 그런 세상이 싹 다 엎어져야 한다구 했어요. 물론 아버지 앞에서는 그런 소리 못하지요. 우리 아버지는 엎는 사람이 아니에요. 항상 만들어 가야 한다구 하셨어요. 살리는 거, 그게 더 크고 귀한 일이라구 하셨지요.”
젊은 새댁은 앞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있었다.
“진짜 이제는 새엄니 얘기 하실 차례에요. 고향부터 시작해요.”
“나는 청주에서 태어났어. 나두 큰어머니가 계시단다. 손천민 큰접주님이 큰어머니의 손자니까 나이는 많아도 내 조카뻘이지.”
“아, 그 글 잘 쓰시는 손천민 아저씨가 나이가 많은데두 조카에요?”
“응. 우리 어머니는 둘째 부인으로 들어와서 병희 오라버니랑, 나랑, 동생 병흠이를 낳으셨어.”
“그래서요?”
윤은 바느질을 하고 있던 손소사의 다리를 베고 누었다.
“병희 오라버니는 어렸을 때부터 장난이 심했지. 동네 대장노릇하면서….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둘째부인이니까 첩의 자식이라고 열여섯에 혼인한 뒤에도 집안 제사 지낼 때 집안 어른들이 무덤에 절도 못하게 했단다.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곡괭이를 들고 무덤을 팠더라지. 뼛조각이라도 몇 개 가지고 따로 무덤 만들어 절하겠다고 말이야.”
“이야. 손병희 아저씨, 아니 이제는 외삼촌이네. 외삼촌 참 대단하시다. 그래서요?”
“오라버니는 어딜 가서도 기죽는 법이 없이 당차니까 뭐 집안 어른들이 두 손 두 발 다 드셨지. 열일곱에 괴산서 수신사가 말 꼬리에 역졸의 상투를 매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끌고 가는 걸 보고 낫으로 말꼬리를 잘랐더란다. 관가로 잡혀갔는데 오빠가 한 방에 나를 죽이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다 복수하겠다고 소리를 쳤더니 사또 심상훈이 겁이 나서 풀어주더래.”
윤은 손병희 삼촌이 자라나며 사고 친 이야기를 더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보다도 잠의 힘이 더 셌던 것이다.
인제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새로 간행되고 해월이 활발하게 포덕을 하러 다닌 덕분에 무자년(1888) 들어 입도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단양, 충주, 청주, 목천, 보은, 공주, 예산, 청풍, 연풍, 괴산, 진천, 연기 등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가을에 엄청난 기근이 들었지만 동학교도들에게는 가진 것이 있으나 없으나 서로 돌보아 죽이라도 나눠먹도록 유무상자(有無相資) 연통이 돌았다. 기근이나 괴질이 돌아도 이러한 해월의 가르침 덕분에 동학에 입도하면 해를 입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웃을 하늘로 여기는 이러한 인정과 이적 아닌 이적 때문에 동학에 대한 민초들의 믿음은 커져만 갔다.
기축년(1889)에도 흉년이 들었지만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여전했고 구휼정책이라는 것은 백성을 우롱할 뿐이었다. 쌀값은 폭등하고 전국에 아사자가 속출했다. 양반들은 급할 때에 쌀을 빌려주고 제 때에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아 버렸다. 관에서 보릿고개에 빌려주는 장리곡은 쌀겨가 잔뜩 섞여 있었지만, 가을에는 천하없어도 알곡으로만 갚도록 했다. 내줄 때는 작은 됫박에 평미레로 깎아서 담아 주었고 받을 때는 큰되로 수북이 담아서 셈하여 받아갔다. 그렇게 해서 남긴 것은 수령과 향리들이 다 빼어 먹으면서 눈꼽만큼의 가책도 받지 않았다. 위로 좌우로 어디에서도 다 하는 짓이었으므로…. 흉작이 들 때마다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유리걸식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부자는 쉽게 땅을 주워 먹었다. 땔나무를 해 오던 산도 권세 있는 작자들이 수령에게 몇 푼 쥐어주고 자기네 산이라는 문서를 받아내어 임자 있는 산 선산이라며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양반들은 너나 없이 문어발처럼 쑤욱 쑥 앞으로 옆으로 뻗어가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온갖 명목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갈퀴처럼 긁어대는 벼슬아치들이 없는 산골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고, 빈 섬으로 숨어들어 호구단자조차 버린 사람 아닌 사람이 되었다. 조정은 대책을 세우는 대신, 남은 사람에게 그 몫을 부과하였고, 보이지 않은 족쇄를 찬 농민들은 산 채로 피를 빨리며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연초에 정선에서 민란이 일어나니 공연히 동학도들을 지목할 것이 염려되어 해월은 도인들에게 서로 왕래도 하지 말하고 일렀다. 그러나 인제에서도 연이어 민란이 터지자 각지의 관아들은 다시 동학에 혐의를 두고 날을 세웠다. 동학도들은 주로 친인척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연원이 있으므로 잡아다가 물고를 내면 연줄연줄 연이어 잡아 들일 수도 있었다. 해월은 지목을 피해 영남, 호서, 인제의 깊은 산으로 전전해야 했고 덕기와 연국을 비롯해서 동학도들은 너도 나도 피신을 서둘렀다. 가을에 서인주를 비롯해서 서울로 갔던 도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어수선한 소식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누구는 사형을 당했고 누구는 바다 멀리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했다. 그 북새통에 손 씨 부인은 젊은 손 씨부인과 윤의 간호를 받다가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44년간 해월의 아내로 살면서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여인. 많이 야위었지만 그녀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 다시 하늘나라에서 온 선동의 안내를 받게 되었을까.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손 소사는 불러오는 배를 안고 윤이와 해월이 보낸 제자들을 따라 강원도 간성 왕곡마을로 가서 겨울을 지냈다. 봄이 되어 지목이 뜸해진 틈을 타서 다시 오라버니 손병희가 마련해 준 충주 외서촌 보뜰에 당도했다. 오래전, 영양에서 손 씨 부인과 딸들을 잃고 지아비 된 도리, 아비 된 도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혹독한 아픔을 견뎌내야 했던 해월은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가족들의 피난길을 애써 챙겼다. 이제는 처남이 된 손병희가 크게 힘을 보태 한결 수월해 지기도 한 터였다. 젊은 손 씨는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들 동희를 낳았다.
해월은 강원도 중에서도 오지인 양구, 인제 등지를 전전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가족을 외서촌에서 공주 정안으로 옮기게 했다. 해월은 늦여름이 되어 공주로 와서 가족을 잠깐 만났는데 다시 한 달 후에는 진천으로 가족을 옮겨야 했다. 손 씨로서는 참말로 윤이 말대로 동학 교주와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젖먹이 아기까지 업고 다니며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이렇게 바쁘게 몰아치는 가운데에도 해월은 나뭇가지 위에서 우는 새의 소리도 시천주 소리라는 설법을 남겼다. 보따리를 메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못하고 수 없이 산으로 들로 쫓기는 길. 그 길에서도 해월은 꽃에서, 나뭇잎에서, 벌레들에게서, 돌멩이에게서 하늘의 향기와 하늘의 힘과 하늘의 사랑을 보았고 이를 전했다.
가족의 거처를 진천의 금성동에 마련한 뒤 해월은 가을부터 영남지역을 돌며 조직 재건을 독려하고 강도(講道)를 잇따라 열었다. 김산에서는 여성 도인을 위한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발표했다. 임신 후의 주의할 점과 여성들이 수행할 때의 요점들을 단아한 경어로 안내했는데 이 글을 읽으며 아낙네들은 귀하게 대접받으며 귀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뿌듯함을 맛보았다. 해월은 모든 도인들의 집에서 어린아이를 치지 말라는 간절한 당부도 덧붙였다.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하날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게 곧 하날님을 치는 것이오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희를 치면 그 아희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을 힘쓰옵소서. 이같이 하날님을 공경하고 효성하오면 하날님이 조와 하시고 복을 주시나니 부디 하날님을 극진히 공경하옵소서.”
해월이 가는 곳마다 포덕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간의 조선 일상이 양반 중심의 가르침으로 권위와 위세를 강조했던 것에 비해 동학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다독여 주고 신선의 관용을 품게 하였기 때문이다. 늘 따듯한 시선으로 따듯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토닥이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니 해월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하늘사람이 된 듯한 벅찬 감동을 주었다.
때리는 놈은 웅크리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는 민초들의 자조 섞인 말도 있었지만 해월이 설파하는 동학에서는 때리는 놈도 있을 수 없고 맞는 놈도 있을 수 없으니 그저 입이 벙실거려졌다.
주1) 조선후기부터 한말 개화기까지 약 200년 동안 2,30년 간격으로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여 한 해에 수만 명~수십만 명이 죽어갔다.
3. 청산, 푸른 산 맑은 물이 피로 물들다 (1892~ )
-합법적 시위에 공을 들였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친인척으로 조직을 늘려가서 ‘처남포덕’이라고 했던 동학은 ‘마당포덕’에 ‘우물청수’라는 말이 돌 만큼 빠른 속도로 교도들이 늘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방에 들어올 새도 없이 마당에서 우물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그 우물을 동학 의례 때에 떠놓는 정화수인 청수 삼아 입도식을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뀔 것이라 했다. 조선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고 했다.
너도 나도 한울을 모시고 있으니 사람사이에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귀하다 했다.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케 하자고 했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이 하늘마음이라 했다.
주문을 외우며 하늘마음을 키우면 병도 오지 않는다 했다.
도움을 주어도 즐겁고 도움을 받아도 기뻤다. 무자년(1888)과 기축년(1889)의 연이은 대흉년에도 동학도들은 서로 나누면 살 수 있다는 생존법칙을 깨달았다. 돈, 식량, 기술, 지식, 힘…. 무엇이든 가진 자와 안 가진 자가 서로 돕는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말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뜻을 가진 것인지 실감했다. 살면서 이렇게 의지가 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동학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니 한동안 뜸하던 유생, 토호, 관원들의 토색질도 덩달아 날개를 달았다. 충청감사 조병식이 다시 동학도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아에서는 동학도들을 잡아다 곤장을 치고, 속전을 받고서야 풀어주었다. 해월은 뻗쳐 오는 지목의 창끝을 피해 상주 윗왕실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충청도의 영동 옥천 청산의 수령들뿐 아니라 전라도 김제 만경 무장 정읍 여산 등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동학도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엄니, 또 무슨 큰일이 생겼나요? 서인주(서장옥) 아저씨랑 모두들 얼굴이 왜 저렇게 굳어있지요?”
아버지의 버선을 만들고 있던 윤이 물었다. 열다섯이 된 그녀는 완전히 성숙한 처녀티가 났을 뿐 아니라 바느질 솜씨는 이제 새어머니 솜씨를 뺨칠 정도가 되었다.
“충청도, 전라도에서 탐관오리들이 못되게 굴어서 도인들이 모두 거리에 나앉을 지경이라는구나. 그래서 저이들이 신원운동을 하자고 졸라대는 모양이야.”
동희의 옷을 짓고 있던 손 씨가 대답했다. 걸음마를 배운 게 엊그젠데 이제는 마구 뛰어다니니 옷이 남아나지 않았다.
“신원이 뭔데요?”
“네 아버지 스승이신 수운 선생님이 30년 전에 무고하게 죄를 쓰고 돌아가시지 않았니? 그걸 다시 제대로 밝혀 달라는 거지. 그래서 서학 믿는 사람들처럼 마음 놓고 동학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야. 서학 믿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수만 명 씩이나 죽어 나갔다잖으냐. 지금은 내놓고 믿는 걸…. 수운 대선생님이 신원이 되면, 동학 한다는 구실로 도인들을 잡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그리 하자는 의논을 아버지에게 드리는 거란다.”
“아버지가 쉽게 결정을 안 하시나 봐요?”
“20년 전에 이필제란 사람이 같은 소리를 하고선 아버지를 끌어들였는데 사람들만 엄청 상하고, 그때 왜 큰어머니랑 식구들도 잃으셨다잖니? 엄청 후회를 하셨더란다. 두 번 다시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으신 게야.”
“그래도 모두들 좀처럼 물러날 기세가 아닌걸요.”
“아버지도 많은 궁리를 하고 계시겠지. 뜻을 밝히되 이쪽이나 저쪽 사람들을 서로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으시려고….”
며칠을 두고 거듭 간청하며 해월의 대답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빛이 퍼졌다. 해월이 드디어 결심을 한 것이다. 공주의 충청감영에 소장을 제출키로 하고, 앞장서기로 한 도인들은 청주 솔뫼(松山) 손천민 집에 도소를 설치하고 빈틈없는 준비를 해 나갔다. 추수가 끝난 뒤인 10월에 1차로 충청감사를 상대로, 11월엔 2차로 전라감사를 상대로 뜻을 밝히기로 했다. 그동안 숨어서만 동학을 하던 사람들이 백주 대낮에 스스로를 드러내야 하는 일이어서 사태가 어찌 흘러갈지 재삼재사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질서를 지켜 평화적인 시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영해에서의 이필제 때와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책임자는 덕과 신의가 있는 접주들로 하고 의관을 갖추고 민폐가 없도록 할 것이며 질 낮은 언행은 절대로 삼가서 동학도의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했다.
10월에 공주에 천여 명의 동학도가 모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이 집무하는 포정사 앞에 무릎을 꿇고 의송단자를 올렸다. 나흘 만에 충청감사는 교조신원은 정부차원의 약속이니 들어줄 수가 없으나 관리들의 탄압을 중지하도록 각지에 명령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닷새 만에 얻은 부분적인 승리다.
11월에는 수천 명이 삼례에 모여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의송단자를 올렸다. 몇 년 전 김덕명 접주의 주선으로 입도한 전봉준이 앞에 나서 무릎을 꿇고 엿새를 보냈으나 묵묵부답. 다시 답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 마침내 열흘 만에 충청감사 조병식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충청감사, 전라감사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산을 위한 입에 발린 약속이라는 것을 알고, 동학도들은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님에게 직접 상소를 하기로 했다.
계사년(1893) 2월 동학도 천여 명이 한양으로 올라가 경복궁 밖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박광호를 소두로 한 대표자들이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렸다. 무릎 끓고 엎드린 지 사흘째, 임금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주리라”는 답변을 보냈다.
동학도들의 예상대로였다. 지방의 감사도 그랬지만 임금 역시 지방 백성들의 애타는 호소에 진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동학도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백성의 신분으로 평화적으로 해 볼 수 있는 최후의 방편까지 모두 다 했다! 저들은 민초들에게 관심도 갖지 않는다! 민초들이 뼛속 깊은 설움과 분노를 토해 놓는데도 저들은 듣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저들은 절벽이다! 좋다. 이제 우리는 우리 식의 방법을 또 다시 강구할 것이다!’ 돌아서는 그들의 눈에 비친 한양은 이미 왜인들과 양인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다.
-해월의 고민
지난 해 10월의 공주 취회를 끝내고 다음 달에 있을 삼례 취회에 참여하려던 해월은 중도에 말에서 낙상한데다 배탈까지 얻어 삼례의 일을 손천민에게 일임하고 청주 서택순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그는 조용히 묵상에 잠겼다.
‘충청감사에 이어 전라감사에게 천여 명 이상이나 몰려가 대선생의 신원을 호소하고 있다. 탐학에 젖어 있는 지방의 관찰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곧 이어 임금에게 상소하자는 말이 나올 것이고, 외세에 의존하며 휘둘리는 무능한 조정 역시 쉽사리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조정까지는 몰라도, 호서 호남의 양반과 관리들은 이제 우리 동도의 세를 어렴풋이 알아채고, 우리를 새로운 눈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깨어나면 지금까지 누리던 이익을 손쉽게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은 저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싹을 잘라 내고 짓밟아 버리기 위해 무력을 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동도는 더 이상 어슬픈 싹 정도가 아닌 것을…. 무력으로 부딪쳐 오면 젊은 도인들이 일시에 세를 규합하여 맞부딪칠 터…. 그리되면 양쪽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생길 것이다. 그 전에 동학도인이 더욱 많이 늘어나서, 하늘이 감응하여 동학의 기운이 국운을, 천운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큰 희생 없이 새 세상이 올 수도 있으련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해월은 그만 고개를 꺾고 말았다.
‘그리되지 않을 것이다. 부산이 개항했고, 원산, 인천이 개항한 것이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도인들에 대한 탄압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관리들의 탐학은 꺾일 줄 모르는데, 이 나라를 넘보는 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일본은 신식병기를 갖추었다고 했다. 욕심을 채우려고 곧 굶주린 늑대처럼 덤벼 올 것이다. 스승이 ‘개 같은 일본 놈’이라며 누누이 일본을 경계하라 하시지 않았던가.
동학도인들은 유례없이 탄압 받으면서도 그러기에 더욱 단단해져가고 있다. 부딪힐 것이다. 머지않아 크게 부딪히리라. 그리고 또 다시 크게 상처 입게 되리라. 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희생자가 많게 되리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시운인 것을… 천운인 것을…. 필요한 상처라면 역사가 그 고통을 안고 갈 것이다. 개벽의 세상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며, 내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랴. 개벽을 향해 걷고 있는 내 발 걸음 하나하나가, 도인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개벽이다. 그들의 발자국에서 이미 개벽의 싹이 트고 있지 않은가? 개벽을 향한 발걸음이 코앞의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개벽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이니 그 길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할 것이고 그 죽음을 통해 역사 속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스러지고 스러지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길이다.’
해월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보은 취회
“엄니, 일이 점점 커지나봐요.”
“그래, 수천 명씩 모여서도 일이 안 풀리니 이제는 수만 명이 모이려나 보더라.”
“연화 언니랑 형부는 벌써 청산 집에서 보은 쪽으로 오가며 준비를 하고 있대요.”
“연화가 고생이 많구나. 여기저기 연통 다니랴 아버님 말씀 받아 정리하랴.”
“정말이에요. 연화 언니랑 연국이 형부가 없었으면 어땠을까요? 아이가 안 생기는 게 걱정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남장도 하고 홀가분하게 이 일 저 일을 맡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에요.”
“그래 수행도 열심히 한다지? 둘이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지.”
“보은 취회 때는 우리도 가야지요?”
“그럼, 전국에서 못해도 수만 명이 모인다니 모두 가자꾸나. 일손을 거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아야겠네.”
“그런데 며칠 만에 어떻게 수만 명을 모아요?”
“글쎄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해 온 걸 보면 힘들 것 같지 않구나. 연화 언니만 해도 여자 몸으로 하루에 100리씩 다닌다잖니. 아버지야 200리길도 다니셨다 하고. 그동안 아버지가 임명한 접주가 수천 명은 될 것 아니냐. 그렇게 한 동네만 전하면 거기도 또 얼른 발 빠른 사람이 다른 동네로 전하고…. 김낙중 아저씨처럼 말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1893년 3월. 취회가 벌어지는 보은 장내리에 도착한 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윤은 태어나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보았다. 공주와 삼례에도 사람이 많이 모였다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도 열 곱, 스무 곱이 넘는 사람들에 장사치까지 몰려들어 온 조선의 사람들이 다 이곳 보은 장내리로 모여든 게 아니냐는 소리도 들려 왔다. 집으로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아버지도 숱하게 나들이를 하셨지만 그래도 이렇게 수 만 명이 모두 동학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형부가, 손병희 삼촌이, 서인주 아저씨가, 덕기 오빠가 늘 바쁘게 어울려 일을 하는 건 알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지는 진짜로 몰랐던 일이다. 척왜양창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케 한다)의 깃발이 멋지게 휘날렸다. 전국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제각기 포별 깃발 아래 집결하여 주문을 외기도 하고 경전을 함께 암송하기도 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동학 세상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좌우의 여러 도인들에게 이것저것 일을 지시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셨다.
임금이 보낸 관리들과 한 치도 물러남 없이 마주앉아 팽팽하게 담판을 하고 있는 병희 삼촌과 서인주, 서병학, 강시원, 황하일, 성두한, 조재벽, 유태홍 접주 어른들도 늠름하였다. 수만 명이 모였지만 대소변이며 머무른 자취는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엿장수, 떡장수, 쌀장수도 동학도들의 정직함과 질서 바름에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조정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면 평안케 할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공주, 삼례, 한양 상소, 보은… 모두 판박이다.
일단 입발림을 해서 해산시키고, 담당 관리를 야단치는 듯이 하여 도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리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물론 무위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동학도들의 어마어마한 세력에 놀랐다. 선무사 어윤중은 말이면 말, 글이면 글로 야무지게 응대하는 그들의 논리에 놀랐으며, 그들의 질서의식에도 놀랐다. 이 자들은 비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존재들이며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동학도들에게도 소득이 있었다. 조정은 소통불가의 귀머거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있다. 자기 자신들에게 놀랐다. 수행만 하고 있으면 절로 새 세상이 온다고 생각하는 도인들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우리에겐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가 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무능한 조정 말고, 우리가, 우리 손으로 척왜양창의, 보국안민을 이룰 것이다. 우리 손으로 새 세상, 개벽을 일굴 것이다!!!
윤이, 새어머니, 연화언니, 올케언니는 물론이고 연락이 닿은 일가친척 여자들도 모두 모여 밥을 하고 뒷바라지를 했다. 돌아가신 손 씨 큰어머니의 손녀라는 조카 신태희도 처음 만났다. 이천 앵산동에서 온 태희는 아이들을 돌보는 솜씨가 탁월해서 애기삼촌 동희랑 조무래기들을 간수했다. 조카라지만 윤이보다 한 살 어리니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둘이는 금방 죽이 맞아 떨어질 줄 몰랐다. 한 달여 엄청난 경험을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태희와 함께 상주 왕실로 돌아왔다.
"Meet you in the dark universe of tears" by Sara is licensed under CC BY 2.0
-청산으로 이사하다
무장한 관졸들이 압박하며 다가오고 있었고 탐학은 금지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냈기에 보은 장안에서의 집회는 한 달 이상 지난 뒤에 해산되었다. 해월은 보은 집회 뒤에 아들 덕기와 사위 김연국과 함께 수운 처형 이후 세가 약해진 경상도 지역을 돌아보았다. 성주, 칠곡, 의성, 군위 등을 돌며 도인들을 만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스승님을 잊지 않고 도를 이어 가는 노고를 위로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부하고 수행할 것과 아울러 작금의 세태에 동학도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4월 초순에 떠난 길인데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7월도 다 가고 있었다.
구미 인동에서 금산으로 가는 도중 덕기가 이상한 언행을 보였다.
“아버지, 저, 저게 뭐에요?”
“무엇이 말이냐?”
“검은 손이요. 막 내게 가까이 와요. 어, 어….”
해월은 얼른 아들 앞으로 나와 서서 아들을 안아 주었다. 아, 이게 무슨….
아버지 품에서 덕기는 조금 진정된 듯 했다. 해월은 덕기가 노독에 지쳐 헛것을 보았다 여겨 금산과 황간의 도인 집에 들러 요양을 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가 심해졌다. 8월 초순 해월은 상주 왕실 집으로 돌아왔다.
덕기 오라버니가 마당에 들어섰다. 눈빛이 예전과 달랐고 바지 앞자락은 소변자국으로 얼룩진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윤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오라버니를 불러댔는데 옆에서 자던 태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윤이는 혼절할 뻔했다. 꿈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라버니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빛이 예전과 달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오라버니. 이게 또 한 번의 꿈이 아닌가 하여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 보았지만, 분명 생시였다. 이럴 수는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얼마나 공을 들였던 아들이었던가. 오라버니가 이처럼 낯선 사람으로 변하다니. 그리고 그 꿈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내 꿈에 똑 같은 모습으로 앞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돌보느라 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8월 말, 김연국 내외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청산 문바위골로 이사를 했다.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윤은 강 가운데 솟은 작은 흙 섬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윗저고리를 벗은 몸으로 위쪽에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오고 있었다. 앗! 오라버니다. 윤은 얼른 손을 내밀었다. 오라버니가 손을 뻗어 윤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만 놓치고 말았다. 아악 오라버니!
꿈에서 깨어 벌떡 일어난 윤은 오라버니가 자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밤새 아들의 곁을 지키느라 초췌해진 해월이 이제 막 세상을 떠나는 아들의 눈을 감기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밤을 지샌 올케언니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윤은 아버지의 눈에서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보았다. 그러나 그뿐.
제자들이 달려와 덕기의 주검을 수습할 때나 문바위 뒤의 산기슭에 매장할 때도 해월은 조금도 감정을 흩뜨리지 않았다. 흐느끼는 윤과 며느리에게 해월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슬퍼하지 마라. 한울이 주셨다가 한울이 데려가신 것을 슬퍼할 까닭이 있겠느냐.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똑 같은 일이다. 태어나는 것은 기뻐하면서 죽는 것을 슬퍼할 이유가 없느니….”
장사를 치르고 며칠 뒤 윤의 올케, 덕기의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 겨우 21세. 아이도 없는 며느리가 시집에 남아 살기란 피차 힘든 노릇일 터였다. 윤이 주변이 조용해지자 해월에게 물었다.
“아버지, 두 달 전 오라버니가 낯선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제가 바로 그날 새벽에 똑 같은 모습을 꿈에서 미리 봤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리고 며칠 전 다시 꿈에 물에 휩쓸려가는 오라버니가 내민 손을 제가 놓치고서 놀라 꿈에서 깨었는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윤이 다시 흐느꼈다.
“슬퍼하지 말아라.”
“아버지, 제가 오라버니 손을 꼭 잡았으면 오라버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팔을 더 내밀었더라면…. 제가 오라버니를 잡지 못했어요….”
“네 탓이 아니다. 그러기로 하면 아비 탓이 더 크겠지.”
해월은 젖은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네 영이 맑아지는 모양이구나. 감사한 일이다.”
-청춘은 꽃피는데(청년 김구 청산에 오다)
갑오년(1894)의 새로 떠오른 해가 청산 문바윗골을 비추었다. 세상 구석구석, 하루도 빼지 않고 따듯한 빛을 비추어 뭍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참으로 고마운 해다. 도인들이 계속 문바윗골로 찾아들었다. 공주와 삼례, 그리고 광화문에서의 상소에 이어 보은의 큰 집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신원 운동에도 조정은 식언을 반복하며 눈앞의 동학도들을 흩어 버리기에 급급했다. 더 큰 힘으로 더 세게 조정을 압박하자는 제안을 하는 도인들이 생겨났다.
전라도에서는 지난해 보은 집회 이후 유태홍,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 접주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라도 지역에서 관의 읍폐는 그 어느 지역보다 극심했다. 짚신이 2전, 소 한 마리 값이 6, 70냥 하는 시절임에도 전라 감사 자리는 15만 냥이라고 했다. 곡창이 넓으니 관리들이 야료를 붙일 기회가 많았다. 봉급이 없는 아전이나 임채를 내고 벼슬을 산 자들은 모두 백성을 쥐어짜야만 했다. 탐욕에 눈 먼 관리는 쥐어짜기 바쁘고 권력유지에 눈 먼 조정은 귀 막고 나라의 체통 운운하며 호령하기에 바빴다.
갑오년 새해가 밝자마자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해 고부관아를 들이쳤던 전봉준은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박원명의 순순한 조처에 농민군을 해산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사건을 수습한다며 뒤늦게 뛰어든 안핵사 이용태는 조병갑을 두둔했다. ‘국법의 준엄함을 보이고, 반상의 법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역도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마구잡이 체포, 방화, 약탈, 강간을 자행했다. 안심하고 해산했던 농민들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셈이었다. 농민들이 다시 들썩였다.
전봉준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부 봉기 이후 종적을 감추고 남도를 두루 돌며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의 대접주들을 만나 대대적인 봉기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뜻이 모아졌다. 이들의 움직임은 시시각각으로 해월에게도 전해졌다. 해월은 전면적인 봉기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한번 수십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쌓인 민심에 옮겨 붙은 불은 하늘에 사무치는 불길로 번져 올랐다.
작년 보은 집회에 국왕의 전권을 받고 나온 보은 출신의 선무사 어윤중은 동학도들의 주장대로 80만냥을 부정하게 취한 충청 감사 조병식과 공주 영장 윤영기의 부정을 밝혀내고 해임시키며 탐학의 금지를 약속한 바 있다. 청산 현감 조만희 역시 보은의 민회를 지켜보았으므로 그들의 모임이 민회(民會)이며 비적이 아니라 민당(民黨)이라고 보고한 어윤중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학 도인들이 보통의 백성들보다 훨씬 더 품성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려운 가운데에 그렇게 서로를 도와 가며 격을 높여가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보은 민회를 경험한 떡장수, 엿장수, 쌀장수들이 모두 동학의 전도사가 되었고 동학도들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만났던 백성들이 모두 동학도가 되었다. 보은, 청산, 옥천, 영동 일대는 동학도들이 숨을 쉴 만하게 되었다. 특히 해월이 자리를 잡은 청산은 마음 놓고 동학하기 좋은 곳이 되었던 것이다.2)
이 무렵이었다. 황해도를 출발한 열다섯 명의 도인들이 보은 장내로 해월을 만나러 왔다. 지난 가을 각기 연비(連臂)3)의 성명 단자를 보고하라는 경통이 도착하여 황해도를 떠난 이들은 내려오는 도중 포접도 하고 산사에서 수행도 하며 겨울을 보냈다. 노자를 벌 겸 동네일도 거들며 오느라 봄이 되어서야 도착한 것이다. 일행 15명 중에 나이가 가장 적은 이는 19세의 김구(당시 이름 김창수)인데 17세에 과거에 낙방한 뒤 동학에 입도해 열심히 포교를 해서 연비가 수천 명에 달하게 되어 이 일행에 끼게 되었다.
일행 중에 젊은 축인 이 접주가 총각 김구를 찔벅거렸다. 젊은이가 수천 명의 연비를 거느렸다니 신통하기도 했고 시험을 해보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2년 전에 과거에 떨어지고 나서 상심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권해주시는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보았지요.”
“어째서?”
“관상에 능한 것도 사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그런데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라는 글귀를 보니 희망을 갖게 되더군요. 관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같지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은 아무데도 쓰여 있지 않더라구요. 그러다가 동학 이야기를 듣고 갯골 오응선 어른을 찾아뵈었지요. 그분의 가르침과 인품을 보고 내가 마침 찾던 것이로구나 하고 입도를 하게 되었지요.”
“동학에선 무엇이 가장 마음에 들던가?”
“빈부귀천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 마치 별세계에 온 것 같았습니다. 내 안에 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무엇이든 가진 자와 안 가진 자가 서로 돕는다는 유무상자(有無相資), 포악한 정치에서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뭐 다 좋은 말 아닌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하. 나 역시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더러워 억장이 무너져서 툭하면 술을 마시고 집사람이나 아이들에게 패악질을 하곤 했다네. 그러다가 법헌께서 부부화순이 으뜸이라며 법설하신 것을 필사본으로 보게 되었지. ‘부화부순(夫和婦順)은 우리 도의 제일 종지니라….’ 이렇게 시작된다네.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 혹 성을 내더라도 남편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한 번 절하고 두 번 절하며 온순한 말로 성내지 않으면 반드시 화할 것이라’고 하셨더군.”
“아니 사내보고 여자에게 절을 하라니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어이구… 저는 아직 장가를 안 가 봐서 모르겠지만 이해되지 않는 말인데요.”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그 글을 읽는 순간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었지. 갑자기 엉엉 울음보가 터지지 뭔가. 아내는 평소에 나를 무서운 짐승 보듯 했었거든. 그게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고. 집에 가서 아내에게 앉으라 하고 큰절을 몇 번 했다네. 집사람이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모르더라고. 내가 그동안 미안했다고 했더니 아내의 눈빛이 대번 달라지는 거야. 집사람도 크게 감동했는지 바로 동학에 입도했지. 아내도 친정 쪽으로, 우물가로 사방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포덕을 했다네. 내가 술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우리 부부 사이도 예전과 달리 다투는 일 없이 진정 화평하게 되었다네. 집안에서 연일 웃음꽃이 피어나니 천국이 따로 없대 그려.”
김구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무리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지만 그래도 어찌 사내가 아녀자에게 큰절을 한다는 말인가?
계사년(1893) 늦가을에 해주를 떠난 지 반년이 지나 갑오년(1894) 봄이 되었다. 보은과 가까운 청산 한곡 문바위골에 대도소가 마련되었다기에 그리로 향하는 동안에도 김구의 가슴 한 쪽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계속 걸려있었다. 청산에 도착하고 보니 도소로 가는 길에 집집마다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놀라웠다. 해월을 찾아오는 무리도 있고 만나고 가는 무리도 있어 문바위골 전체가 북적거렸다.
도소 가까이에 도착하니 키가 큰 장정이 일행을 막아 세웠다. 해월 선생을 만나려는 사람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행은 도소가 바라다 보이는 길가 평상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김구는 도소 주변에서 열심히 안팎을 드나들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처녀를 보았다. 곱게 빗어 뒤로 길게 땋아 댕기를 묶은 머리는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고 앙다문 빨간 입술이 고왔다. 약탕관에서 약을 짜들고 “아버지….”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해월 의 딸인 모양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김구는 슬그머니 일행을 떠나 처녀에게 다가가 물 한 그릇을 청했다. 물을 마신 뒤 그릇을 내밀며 김구는 슬쩍 처자에게 물었다. 눈이며 입매가 다부져 보였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칼이 강하오, 꽃이 강하오?”
처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
“칼은 무 써는데 강하고요, 꽃은 열매 맺는데 강하지요.”
처녀는 물그릇을 받아들고 냉큼 부엌으로 사라졌다. 김구는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처녀에게 그토록 쉬운 답을 나는 왜 며칠 동안이나 가슴에 담고 헤매고 있었던고?
차례가 돌아와 해월 선생 앞에 나아가면서도 김구는 자꾸 눈으로 처녀의 모습을 뒤쫓았다. 그렇다. 꽃으로 무를 벨 수 없듯이, 칼 꽂은 자리에서 호박이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니….
김구가 젊은 처자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을 때,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에 이어 어떤 고을 원이 동학도인의 전 가족을 잡아가두고 가산을 강탈했다는 보가가 속속 들어왔다. 3월 이후 태인, 금구, 부안, 전주, 고부 등지에서 연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4)
해월은 진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는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워야 한다는 결의들이 방안을 가득 채운 대접주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해월은 좌중의 여론을 충분히 들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결기가 더욱 강하게 서렸다.
김구 일행은 각각 연비 명단을 제출하고 갈 길이 먼고로 그곳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다음 날 해월에게서 접주 도첩을 받고는 큰절을 하고 일어섰다. 김구는 도소를 떠날 때 동작 빠르게 부엌 쪽으로 가 최윤 앞에 우뚝 섰다.
“어머, 깜짝이야.”
부엌 문턱을 넘으려다가 놀라 비틀 하는 최윤의 팔을 김구가 얼른 잡아주었다.
“놀라셨다면 미안하오. 어젯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내 주변에선 아가씨 같이 지혜로운 분을 만날 수 없었거든요. 내 옆에 아가씨 같은 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절이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더 머무르면 좋으련만, 시국이 어수선하고 일행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니 너무 섭섭하구료.”
김구는 자기 팔목에 끼고 있던 염주를 빼어 처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지만 가운데에 자수정이 한 알 박혀 있는 것으로 해주에서 내려올 때 들린 사찰에서 스님 한 분이 김구에게 범상치 않은 상을 가졌다며 주머니에서 꺼내어 건네주었던 물건이다.
“어제 아가씨에게서 크게 배웠소. 후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소만….”
김구는 잡고 있던 윤의 손을 아쉬운 듯 놓아주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 했으나 저쪽에서 일행이 부르는 소리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발걸음이 안 떨어져 자꾸 뒤를 돌아보던 열아홉의 김구는 열일곱의 윤에게 그렇게 마음을 주고 떠났다. 한쪽에서 삼촌뻘 되는 다섯 살짜리 동희를 돌보고 있던 태희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킥킥대고 웃으며 다가왔다.
“윤이 이모, 맨날 나이 많은 아저씨들만 보다가 총각을 만나니 기분이 어떻수? 호호 어머, 수정이 박힌 염주네? 가지 말라고 붙잡을 걸 그랬지? 호호”
“계집애가 까불기는….”
“이모나 나나 이제 곧 시집가라는 말이 나올 나이인데 뭘 그러우? 처녀총각이 서로 관심 갖는 거 하나도 이상할 거 없지 뭐. 이모는 어떤 남자가 좋우?”
“그야 동학을 제대로 하는 남자라야겠지. 지혜롭고, 부지런하고, 당당하고, 구차하지 않고, 마음 씀씀이가 자상하면서 통이 크고….”
“나두 나두…. 호호호”
윤은 태희의 뺨을 토닥거려주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목의 염주를 저고리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연화언니도 떠나고)
청산의 거포리 거흠에 거처를 정한 뒤 문바위와 보은을 오가며 묵묵히 장정 이상의 몫을 톡톡 해 내던 연화가 윤과 영동 심천의 장동리에 심부름을 가던 중 갑자기 아랫배를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윤이 급히 가까운 의원을 물어 찾아갔다. 그새 연화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었다.
“언니, 이게 웬일이우?”
“고르게 있던 달거리가 이번 달엔 한참 없기에 혹시 수태했나 생각했지. 그런데 새벽부터 하혈이 있으면서 아프기 시작했어. 참아보려고 했지만….”
맥을 짚어보던 의원이 말했다.
“수태가 맞습니다만…. 이걸 어쩌누…. 뭔가 잘못된 것 같구료.”
연화를 딱하게 바라보던 의원은 주섬주섬 침 도구들을 치우며 말했다.
윤이 다급하게 물었다.
“의원님, 무슨 일이에요. 네? 우리 언니 살려주세요. 살아야 해요.”
의원은 윤을 따로 불러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애기집 근처 어딘가가 터져 피가 새고 있을 것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려.”
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연화 언니는 아버지는 달라도 덕기 오라버니, 윤과 함께 한 어머니의 배를 타고 태어난 자매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연화 언니는 윤에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의지처가 되었다. 덕기 오라버니도 자식 없이 홀연히 떠나더니 반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언니마저도 떠날 것이라 한다. 아, 엄니…. 엄니, 이를 어째요. 왜 이렇게 빨리 불러 가시는 거예요? 나만 남겨놓고 다들 어딜 가나요?
의원집 가까운 곳에 사정을 하고 방을 빌려 연화를 눕히고 연국에게 기별을 했다. 저녁이나 되어 도착한 연국은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연화를 보고는 넋이 나갔다. 처음 만난 의붓아버지 눈에서 그리워하던 생부 배씨의 눈빛을 보아 울었다던 11살짜리 계집아이. 20년간 자기 곁에 누이로, 아내로, 때론 어머니로 존재했던 연화다. 늘 주문을 입에 달고 살던 아내. 꽃을 보면서 탄성을 지르던 아내. 꽃향기를 맡으며 한울님 향기라고 미소 짓던 아내. 해월의 법설을 필사본으로 정리해 주던 아내.
연화의 식어가는 손을 연국과 윤이 양쪽에서 잡고 함께 밤을 지새웠다. 연화는 다음날 아침을 맞지 못했다. 1894년 6월 11일.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농민들은 폭풍전야와 같이 긴장하여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픔에 오래 잠겨 있을 수도 없었다. 연국은 아내를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지고 앞산으로 올라가 진달래나무 무더기 아래 묻어주었다. 봄이 되면 진달래가 그녀의 친구가 되어 주리라.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르는 윤은 이제 어머니 시신을 잡고 울부짖던 열 살 꼬마가 아니었다. 덕기 오라버니를 보내고 나서, 다시 어제 연화언니의 손을 잡고 밤을 지새우며 아버지 말씀대로 태어남과 사라짐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 오빠, 언니 모두 밝은 빛 속에 세상만물을 향해 사랑과 축복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벼 위에 쏟아지는 햇살 속에도 그들이 있을 것이오,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에도 그들이 있을 것이며, 눈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에도 그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내 몸과 마음속에 이미 그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슬플 일이 어디 있으랴. 윤은 뜨거워지는 햇살을 받으며 세상 모든 존재에 감사를 보냈다. 빈 지게를 지고 붉은 눈시울로 산을 내려오는 연국에게 윤이 말했다.
“형부, 나중에 나 죽었다는 소식 들리걸랑 슬퍼말고 대신 박수를 쳐 주실라오?”
“그게 무슨 소리야?”
“힘들게 살았다면 고생이 끝날 터이니 박수쳐 주고, 감사하며 잘 살았다면 또 잘 살았다고 박수쳐주고….”
“열일곱 살 처자가 하룻밤 사이에 도통한 거 같네 그려.”
김연국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모처럼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리고는 급박해지는 사태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청산이 붉게 물들다
3월에 전라도 무장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태인, 금구, 부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4월 2일 진산에 모여 있던 농민군이 금산 보부상들의 기습을 받고 114명이나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호남에서 모두 죽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다. 6일 청산 소사전으로 모두 모이라는 통문을 보내겠오. 이틀 뒤인 8일 회덕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확보할 것이오.”5)
해월의 동학군은 예고한 대로 청산 소사전에서 봉기하여 8일 회덕(대전)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확보해 진잠으로 향했다. 진잠뿐만 아니라 연산, 옥천, 공주, 이인, 문의, 금산 등에도 수천 명의 농민들이 모였다.6) 충청감사 조병호가 해임되고 4월 말 새로 임명된 충청감사 이헌영은 조정에 ‘공주 이하 지방은 나라의 소유가 아니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7)
호남 쪽에서는 정읍, 태인, 원평에 이어 전주성을 장악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정부가 청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5월 5일 청군 9백 명이 아산에 상륙했다. 이틀 뒤에는 청군과의 조약에 따른 것이라며 일본군 4백 명이 인천에 상륙했다. 동학지도부는 외세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으려고 집강소를 설치해 민원을 해결토록 하고 전투를 접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은 수 년 전부터 호시탐탐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며 치밀한 준비를 해 왔으므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청나라와 시비가 붙어야 했다.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는 조선정부가 철병을 요구하자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청병 격퇴를 일본에 맡기도록 하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하여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8) 오토리(大鳥) 공사와 모토노 이치로 참사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9) 여단장이 긴밀하게 움직였다. 6월 21일(양력 7월 23일) 0시 30분 일본 보병 21연대는 경복궁의 영추문에 폭약을 터뜨리고 도끼로 찍고 톱으로 절단하고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오전 4시부터 오전 7시반까지 조선병사와 총격전을 벌였다. 고종은 일본의 사실상 포로가 되었다.10)
일본의 왕궁 점령 소식은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해월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는 일본의 왕 궁점령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수운 선생이 ‘개같은 일본 놈을 조심하라’고 수차 당부했지만 이토록 일본이 대담하고 뻔뻔스러울 줄이야. 일본은 며칠 뒤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승리한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조선을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시켰다고 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조선반도를 완전히 자기 수중에 넣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일본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 동학당이었다.
(모두들 죽음을 각오하다)
“선생님, 5월에 청국군대, 일본군대가 들어왔을 때 우리가 빌미를 줄까 봐 정부와의 싸움을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일본놈들은 철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군대를 부산에 상륙시키고 있습니다. 전신선을 가설한다면서 일본군이 수십 명씩, 수백 명씩 몰려다니며 우리 양민들을 못살게 굴고요. 이미 왕궁은 완전히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일본놈들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청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기세라면 머지 않아 완전히 조선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청군과 싸우는 일본군의 무기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폭탄이며 총탄을 소나기처럼 퍼붓는데 그 성능도 대단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게다가 청국은 일본군 상대에 전력을 쏟을 형편도 되지 않고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이 많아 일본에게 오히려 밀리는 형국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청군을 내몰고 나면 곧바로 조선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할 겁니다.”
추석이 지나 가을걷이를 마치고 청산 거포리 거흠의 김연국 집에 모인 접주들이 각자의 생각을 쏟아 내었다. 해월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각자의 마음에 한울을 모신 것을 깨닫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아지면 조용한 혁명으로, 평화로운 혁명으로 새로운 개벽 세상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을…. 그런데 무능한 조정 관료들과 탐욕스러운 일본 때문에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이렇게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인가. 지난 30여 년간 공을 들여왔는데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해월은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며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들을 이길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저들의 총을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왜 싸워야 하는가?”
“우리는 2년 전부터 공주, 삼례, 광화문 상소, 보은 민회를 잇따라 열어서 눈물로 엎드려 조정을 설득해 보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저들은 우리의 간절한 요구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요지부동. 백성을 위해 지혜를 내려고 하거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탐욕에 길들여진 무능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새 세상에 대한 우리의 꿈을 저들의 탐욕 아래 짓밟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벌레 같은 왜놈들은 이미 경성의 궁을 침범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일어나면 엄청난 숫자가 희생이 될 터인데도?”
“왜적을 치다가 죽는 건 오히려 비굴하게 살아남는 것보다 현명하다 할 것입니다.”
“남겨진 처자식들의 삶도 고단해질 것일세.”
“탐관오리들도 지금 죄를 묻지 않으면 남은 처자식인들 언제 편안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일어서야 할 때일까?”
“이미 탐학 때문에 삶을 위협받았던 우리 백성들입니다. 일본놈들은 탐관오리들보다 더 야비하고 모질게 굴 터이니 앞으로 그 밑에서 누구도 안전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일 터이지요.”
“모두 죽을 각오로 저항을 할 텐가?”
“동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요.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을 포기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겠지요. 우리 후손들은 비굴하게 오래 산 선조들보다 벅찬 감동을 안고 기꺼이 죽어간 선조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모두들 고맙네.”
해월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듯 결연한 각오를 하고 있다면 희생을 각오하고 떨쳐 일어서야 했다.
- 일본군의 작전-모조리 살육하라!
9월 18일 총력 기포가 결정되고 이 소식은 빠르게 옥천, 영동, 보은, 황간, 충주, 괴산, 청주, 청안, 덕산, 목천, 서산, 공주, 당진, 안면도, 염천, 태안, 양지, 여주, 양근, 수원, 안성, 음죽, 원주, 홍천, 횡성으로 전달되었다. 20만 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동학당을 모조리 잡아 없애기 위한 병력을 따로 파견하는 일이 당장 급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천황의 인가하에 이미 살육진압경험이 있는 야마구치현 히코시마(彦島) 수비병 19대대를 동학당 진압 전담부대로 파견하고 러시아의 간섭을 피하고자 ‘동학당을 서남구석으로 내몰아 모조리 살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0월 9일 인천에 상륙한 19대대는 15일부터 세 부대로 나누어 서로, 중로, 동로 세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서남향인 전라도 해안으로 ‘토끼몰이’를 시작하며 조선군의 지휘권을 확보하고 동학관련 모든 문서를 확보하는 대로 서울의 일본공사관으로 보내어 수집 정리하도록 했다.
동학군의 사령탑이 청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 중로군은 10월 중순 청산을 불바다로 만들고 이어 19일엔 후지타(藤田)부대가 들어와 청산 오리동을 다시 불바다로 만들었다. 11월 6일 문바위를 기습해서 서류를 압수하고 수십 명을 사살한 뒤 이틀 뒤 다시 한밤중에 문바위의 80호에 불을 질렀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수괴’ 해월을 잡기 위해 동학지도자들의 본부가 차려진 청산과 보은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목천 세성산에서 수많은 동학도들이 희생되었고 효포에서 청산현 석성리에서 큰 전투가 벌어져 농민군들이 쓰려져 갔다. 증약에서, 양산에서, 우금치에서, 능치에서, 괴산, 보은, 성주에서, 연산에서, 논산에서, 태안에서, 서산에서, 전주에서, 태인에서, 금구에서 돌멩이와 죽창과 화승총을 든 동학군 수만 명이 화승총보다 수백 배 성능 좋은 일본의 무라다총 앞에서 가을낙엽처럼 우수수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사람을 죽이는 기계인 무기를 손에 쥐었다. 동학농민군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인 동학도를 가슴에 지녔을 뿐이다. 수만 명의 동학군은 10월 11월 내내 관군과 대량학살전문집단인 일본 후비보병 19대대의 협공으로 그렇게 사라져갔다. 12월 2일 남쪽에서 전봉준이 잡혔고 이어 손화중, 김개남이 체포되었다.
청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던 일본군 조사대와 상주 소모영장 김석중은 청산에서 안소두겁, 김유성, 박기준, 지상록, 박부만, 이치오, 김순천, 여성도(대성리), 부성철, 강경중, 허용(법화리), 서오덕(삼남리), 김경연(작은 뱀티/소사동), 정윤서(영동 고관리), 이판석, 김태평, 김철중, 김고미, 배안순, 이관봉, 박추호를 포살했다. 인정리의 접주 최인관을 포살하고 그의 전답 80두락도 모두 몰수했다. 김성원 송병호 등은 끌려가 뒤에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병정들의 토색질이 끊이지 않았다. 온 마을이 동학농민군이었던 옥천에선 일본군에게 공격을 당해 6리를 가도 민가에 사람이 없고 수백호가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사체가 노상에 버려져 개와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인질로 잡히다)
옥천 지역의 유림으로 구성된 민보군 지도자 12명 중에 매의 눈을 한 박정빈이라는 자가 있었다. 내무주사로 있던 그는 가까운 곳에 동학의 최고 우두머리인 최시형이 거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혼자 기민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전라도 지역에서 시작된 전투는 지금 목천, 효포, 우금치 등지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해월에게는 젊은 마누라와 딸, 어린 아들이 있다고 했다. 같이 전장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투는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벌어지고 있다. 괴수의 무리들은 언젠가는 청산으로 다시 올 것이다. 괴수를 잡으면 청산현감은 물론이요 충청감사 자리도 넘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청산현감으로 있는 조만희라는 작자는 믿을만한 위인이 못된다. 조만희는 동학비적들에게 흠뻑 빠져있는 눈치다. 현감 모르게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
그는 눈치 빠른 세작 박가와 그 사촌 동생 정가를 풀어 문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인정리에 가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괴수가 돌아오기 전에 조용히 가족들을 빼돌려야 한다!’ 그는 숨어있던 괴수의 부인과 어린 아들, 두 처녀를 한밤중에 끌어내어 청산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별티의 외딴 농가 광에 손발을 묶어 숨겨놓고 박가와 정가에게 철통같이 지키게 했다. ‘괴수’의 부인은 만삭의 몸이었다.
“작은할머니, 여기가 어딜까요?”
잔뜩 겁을 먹은 태희가 물었다.
“글쎄다. 보름달이 오른쪽 산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계속 걸어왔으니 팔음산 쪽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요?”
“우리를 이용해 네 아버지를 잡으려는 수작이야. 그러니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라.”
어린 동희는 불안한 가운데에도 세 여자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놓였는지 크게 보채지 않았다.
저녁에는 추위가 엄습했다. 문 밖에서는 칼바람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보초 중 젊은이가 가마니를 몇 장 들여놓아주기는 했지만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가 딱딱거려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이렇게 추운데 아버지는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어디서 무얼 하실까? 추위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엄동설한에 짚신이나 제대로 신고 다니시려나. 무얼 먹고 어디서 주무시려나. 보초들의 감시가 엄중한 것을 보면 아직 살아 계시는 것은 확실하다. 천지부모시여... 수많은 병사들을 보호해주소서. 평생 핍박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평생 빼앗기며 짓밟히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굽어살피소서...
밥 한 덩이를 세 여자와 동희가 나누어 먹었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만 주는 것을 윤과 태희가 젊은 총각에게 사정사정해서 세 번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하루 이틀 지나자 남자들이 처녀들을 보는 눈빛이 묘해진 것을 눈치 챈 손 씨 부인의 마음이 급해졌다.
“윤아, 태희야...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아기는 어찌 생기는 줄 아느냐?”
“우리가 어찌 알겠어요. 다만 꽃은 비가 와서 벌 나비가 못 날아다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지 않나요? 벌 나비가 다리에 꽃가루를 붙이고 다니며 옮겨주어야 열매가 달리지요.”
“그래. 윤이가 역시 보는 눈이 다르구나. 아이가 태어나매 어미도 닮고, 아비도 닮는 것은 어미의 정과 아비의 정이 섞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내 어머니에게 가르쳐주시고 내 어머니가 또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니 이제부터 잘 들어야 한다.”
윤과 태희는 왜 지금 이곳에서 손 씨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지 몰랐지만 그 표정으로 보아서 무척 중요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부부가 함께 산다고 언제나 아기가 생기는 건 아니야. 또 일 년에 한 번을 만나도 아기가 생길 수 있단다. 달거리가 시작된 날부터 다음 달거리가 시작되는 날의 딱 중간날짜가 수태 되는 날이지. 그러니까 만약에 보름에 달거리가 시작된다면 다음 달에도 보름에 달거리가 시작되겠지? 그러면 언제가 수태 되는 날일까?”
“그믐이요.”
“초하루요.”
윤과 태희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 그믐, 초하루 언저리가 수태가 되는 날이지. 만약 수태를 원한다면 그 날을 택하면 되고, 수태를 피하려면 그 날을 반드시 피하면 될 것이야. 하루 이틀 앞뒤로 달거리가 움직일 수 있으니 가운데 날짜들을 유념해야 해.”
며칠이 지난 저녁 무렵 손 씨 부인이 배를 움켜쥐고 아랫니를 깨물었다. 진통이 시작된 모양이다.
4. 어거지로 시집을 가다 (1895~ )
-고문당하는 여자들
두 번째 출산은 처음보다는 수월하다고는 해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며 밤새 진통에 시달리는 손 씨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아기가 태어났는데 순간 손 씨는 혼절하고 말았다.
윤이 광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우리 엄니가 아기를 낳았어요. 탯줄을 끊을 가위랑 더운 물 좀 주세요. 예?”
웬일인지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윤과 태희가 문에 달라붙어 소리치고 두들겨 봤지만 밖에 빗장을 지른 채 둘 다 사라진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머, 이모... 이 애기가 이상해. 왜 안 울지?”
“이를 어째.”
윤이 어설픈 솜씨로 아기 궁둥이를 쳐 보았으나 아기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여자 아기였는데 숨 한 번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가 버린 것이다.
밖의 남자들은 그날 하루종일 기척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도 마찬가지. 산모에게 따듯한 물이라도 한 그릇 먹여야 하는데... 이놈들이 우리를 여기에 가두고 영영 모른 척 하려는 걸까? 굶겨 죽일 심산인 거야? 어린 동희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지푸라기를 씹어 먹었다. 아... 한울님!
셋째 날 밖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남자는 밥 두 덩이와 찬 물 한 바가지를 들이밀며 오늘 하루치라고 말하고는 급히 사라졌다. 산모 이야기를 할 새도 없었다.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모, 저들의 거동이 수상하잖우? 혹시 동학군들이 청산에 돌아온 것 아닐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우리 크게 소리를 질러볼까?”
어제 문틈으로 열나흘 날 달이 보였었다. 이곳에 갇힌 지 벌써 한 달이 된 것이다. 둘이는 서로 눈짓을 하고 젖 먹던 힘을 다해 함께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
“아버지이~”
“삼초~온~”
급히 빗장문이 열리더니 두 남자는 주먹으로 처녀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년들이 어디서 까불어!”
남자들은 윤과 태희의 손을 뒤로 돌려 새끼줄로 묶고는 지푸라기 뭉치를 처녀들의 입 안에 밀어 넣고 새끼줄로 재갈을 물렸다. 그들은 피범벅이 된 치마를 두른 채 한쪽 구석에 누워 있는 손 씨 부인과 짚단으로 덮어놓은 물체를 보고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던지 잠시 후 망태에 아이의 주검을 담고는 눈알을 부라리며 나갔다. 그 중에 나이가 든 박가라는 놈이 소리를 질렀다.
“이 년들아, 조만간 결판이 날 터이니 얌전히들 굴어!”
여자들을 빼돌려 광에 가둔 장본인 옥천 민보군 박정빈은 12월 11일 이후 상주 소모영 유격장 김석중과 일본군과 함께 청산, 영동, 옥천, 황간에서 최시형, 손병희가 이끄는 1만 여명의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쫓았다. 김석중이라는 자는 상주 담당인데도 경계를 넘어와서 닥치는 대로 포살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형씨는 청산현감 조만희를 아쇼?”
박정빈이 물었다.
“나야 잘 모르지요만 좀 이상한 구석이 있더군요. 내가 풀어놓은 세작 박정호 말대로 배학수와 김경연을 잡아들였는데 조만희가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서 동학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고 풀어주라 하지 않겠수? 그래서 내어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나중에 다시 잡고 보니 그 놈들이 운량도총관에 팔로도집강이라는 거괴들이더라고요.”
“그러니 조만희가 저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구려.”
박정빈은 자기도 얼마 전에 조만희에게 속은 사실을 떠올렸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들어보기로 했다. 조만희는 적을 분주히 뒷바라지하고는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못 믿을 작자임이 분명했다.
“또 뭐 내가 청산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고 조정에 상소를 하기도 한 모양인데, 청산은 모두 비적들 투성이인 걸 보면 보은취회 이후 여기가 온통 물이 든 모양인 것 같수다. 그런데 그 해월인지 뭔지 수괴라는 놈은 굴을 세 개 파 놓는 토끼처럼 어떻게 잘 내빼는지, 정말 귀신같은 놈이요. 내가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안 보이니...”
“대체 그 잡았다는 거괴들은 다 어찌하셨수?”
“오래 끌 거 있소? 사방천지에 비도들인데 이럴 땐 공초고 뭐고 빨리빨리 없애는 게 상수요. 비적을 놓치지 말고 공을 세워야 출세도 할 거 아뇨? 나는 상주에서부터 줄곧 그렇게 해 왔수다.”
“아, 그렇지요.”
박정빈은 맞장구를 쳤지만 김석중이 출세길에 방해가 되는 귀찮은 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해월과 손병희가 이끄는 군대는 임실까지 후퇴했다가 12월 9일 무주에서 북상하고 있었다. 청산을 거쳐 보은으로 향하는 행군이었다. 전라도 무주의 설천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충청도 영동 용화면의 달밭고개. 20여 차례의 대소전투를 치룬 그들은 달밭재에서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이고 가곡리에서 전투를 벌인 다음 용산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12월 11일 용산장터에서는 손병희의 군대와 김석중의 상주 부대가 하루 종일 밀고 당기는 전투를 했다. 그러나 동학군의 수가 워낙 많아서 관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눈이 날리고 운무가 둘러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12일, 청주 옥천의 관군이 합세했으나 손병희의 군대는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13일에는 청산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손병희는 사람을 풀어 해월의 가족이 간 곳을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만삭이 되었을 누이동생, 어린 동희와 윤, 태희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동학군을 책임지고 있는데 가족을 찾기 위해 그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일. 그들은 청산에서 사흘을 머물고 16일 보은으로 출발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석성을 지나 삼승산 줄기를 오른쪽으로 두고 걸었다. 그들의 머리는 수피(현 탄부면 대양리)에 있었고 꼬리는 원암(현 삼승면 원남리)에 있어 그 길이가 30리에 이르렀다.
용산전투에서 동학군의 기세에 관해 보고를 들었던 박정빈은 동학군이 청산에 들어와 있는 동안 몸을 잽싸게 피해야 했다. 숨겨놓은 인질들을 들킬까 애간장을 졸이며 그들의 철수를 고대했던 그는 동학군이 보은으로 떠나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보은으로 떠난 동학군들이 일본의 화력을 당하지 못하고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총을 가진 일본군인 하나가 동학군 2-300을 상대할 수 있다니 동학군들은 정말 무모한 놈들 아닌가. 17, 18일 양일간 북실에서 죽은 수백 수천의 동학군 시체가 들과 산을 덮었다고 했다. 교조 최시형은 이번에도 여우처럼 도망갔다지만 남녘에서는 호남의 괴수들도 이미 다 잡혔다고 하니 이 싸움은 이미 정리가 되어가는 판이다. ‘이제 내 계획을 제대로 펼칠 때다.’ 박정빈은 얇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박정빈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보은취회 이후 충청감사와 청산현령이 동학도들을 느슨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적들을 뒷바라지까지 한 정황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충청감사가 조병호, 이헌영, 박제순 등으로 바뀐 이후에도 비적들은 방자하게 굴고 있습니다. 무리들이 남쪽에서 다 체포되었다고 하나 여우같은 최고의 수괴 최시형은 잡히지 않았는바 본인은 이미 이를 내다보고 청산에서 그 가족들을 비밀리에 잡아놓고 있습니다. 제게 그들을 문초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조정은 급히 12월 30일자로 옥천의 내무주사였던 박정빈을 청산현감으로 임명하였다.
(출세에 밝은 박정빈은 인질을 고문한 뒤 옥졸에게 내어 주는데...)
아침이 밝았을 때 문이 열리더니 두 남자는 거동 못 하는 손 씨를 끌어내어 밖에 대어놓은 소달구지에 태웠다. 매서운 북풍이 몰아쳤다.
“아저씨, 산모 몸에 찬바람이 들어가면 안 될 터이니 우리가 모두 달구지에 탈 테요.”
윤이 동희를 먼저 태우고 달구지에 올라타더니 손 씨에게 가마니를 덮어주고 그 옆에 누워 한기를 막아주었다.
“태희야 너도 얼른 올라와서 그 쪽으로 누워.”
나이는 비슷한데 윤이 머리 쓰는 것이나 당차기가 보통은 넘었다.
“아저씨, 어디로 가는 거지요?”
“가보면 알 거요.”
키가 크고 더 젊은 총각이 퉁명스레 말했다. 앞으로 모진 고초를 겪게 될 것을 저 여자들이 짐작이나 할까? 그의 표정에 딱하다는 빛이 언뜻 스쳐갔다.
“정초부터 이게 무슨 짓이람.”
눈이 매운 박가가 말했다.
“그래도 이제 창고지기는 면하지 않우?”
총각이 말했다.
“아, 이제 을미년(1895년)엔 좀 조용히 살고 싶은데...”
박가가 여자들을 원망의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손 씨 말대로 그들이 갇혀 있던 곳은 팔음산 아래 별티계곡이었던 모양으로 이제 소달구지는 팔음산을 뒤로 하고 예곡다리를 지나 청산현으로 가고 있었다.
“동학군들은 어찌 되었나요?”
“그것도 가보면 알게 될 거요.”
“우리 아버지는요?”
박가가 눈짓을 하자 정가총각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청산현의 옥. 옥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손 씨는 윤과 태희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만약 동희 아버지가 무사하시다면 갈만한 곳을 대라고 너희들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우리는 진정 가신 곳을 모르니 그저 모른다 하면 된다. 만약 돌아가셨다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부디 잘들 견뎌다오. 특히 태희는 일가친척에 대해 물어보면 부모 없이 떠돌다가 보은취회 때 만났다고 하고 일체 아무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그러나 현감이 제일 먼저 옥에서 불러낸 것은 일어설 기력도 없는 손 씨였다.
“저 년을 형틀에 매어라!”
“이보시오. 나는 갇혀있는 동안 낳은 아기도 그냥 잃고 말았소. 죽이려거든 그냥 어서 죽이시오.”
“저것이 주리를 틀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박정빈은 형방에게 눈짓을 했다. 양쪽에서 나무막대에 힘을 주자 손 씨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덜컥 검붉은 핏덩이가 치마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산후조리도 못한 채로 있다가 지혈이 되지 못한 채로 다시 하혈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옥 안에서 손 씨의 비명을 듣고 있던 윤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를 내 가시오. 우리 엄니 대신 나를 치시오!”
박정빈은 잠시 생각했다.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송장 치우고 살인냈다는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는 손 씨를 들여놓고 윤을 옥에서 내왔다. 그가 형방에게 나지막히 지시를 내리자 포졸들이 이번에는 긴 형틀을 준비했다. 그들은 윤의 두 팔을 뒤로 꺾어 손목을 꽁꽁 묶은 뒤 형틀에 눕히고 다리를 꽁꽁 묶었다. 포졸 하나가 가슴 위로 올라 타 어깨를 내리 찍었다. 머리맡에 서있던 포졸이 윤의 얼굴에 보자기를 덮더니 코를 막고 입에 물을 계속 쏟아 부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게 이렇게 큰 고통일 줄이야. 윤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고 고개를 돌려보려 했으나 우악스러운 남정네들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네 아비가 갈만한 곳을 대라.”
“푸하... 푸...푸... 모른다. 설령 내가 안다고 해도 말해줄 성 싶으냐?”
“어라, 이것이?”
그가 다시 눈짓을 하자 형방이 또다시 물을 부었다.
“그래도 대지 않겠느냐?”
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리질을 했다.
“푸... 푸하... 모른다.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고문을 받는 동안 윤은 아버지의 무사함에 감사했다. 고문을 받아 죽음으로 끝이 난다면 이 고통의 순간도 끝이 날 것이다. 죽지 않는다해도 이 고통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순간이 결국은 지나가리라. 윤은 순간순간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을 외우며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물이 쏟아지기를 몇 차례.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옥사의 작은 창문으로 새벽빛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여기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동희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한울님, 저를 살려두셨군요. 지독히 고통스러운 순간에 외웠던 주문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스승 수운이 강조했다는 주문. 아버지가 한시도 쉬지 않고 외우셨던 그 주문, 오... 그것이 나와 한울님을 잇는 통로였군요. 윤은 이제야 주문의 가치, 주문의 존재이유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백성이 수시로 맞닥뜨리는 지독한 절망의 순간, 지독한 위기의 순간, 지독한 아픔의 순간에 내 안의 한울, 내 밖의 한울은 주문을 통해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시는구나. 나를 견뎌내게 하셨구나.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옆에 누운 태희가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일어나 살펴보니 얼마나 이를 악물었었는지 입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놈들은 윤이 고문을 받고 혼절한 후에 이어서 태희를 고문했던 모양이다. 이놈들이 대체 태희한테는 무슨 짓을 했던 걸까? 그녀의 눈에 태희의 퉁퉁 부은 손이 들어왔다. 양쪽 엄지손톱 밑으로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태희야... 태희야...”
윤이 태희를 안아 올렸다.
깨어난 태희는 윤을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자기의 부모와 고향을 물으며 손가락에 쇠막대를 끼우고는 발로 밟더란다. 양쪽 엄지손톱 밑에는 대나무 바늘을 박기도 했다. 말하는 태희의 얼굴이 다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이모, 그래도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박정빈은 밤새 머리를 굴렸다. 계집들을 족쳐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렇다면 30여 년을 여우처럼 피해 다녔다는 수괴를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을까? 청산현감 자리로 만족할 수는 없다. 다음날 아침 그는 옥천에 사는 세작 박정호를 불러들였다.
“수괴를 잡으면 내 한턱 함세. 자넨 저 여자들을 어찌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박정호가 다가와 박정빈의 귀에 소근 거렸다.
“마누라와 어린 자식은 옥에 가두어 감시를 잘 하고, 처녀들은 사또 주변의 총각들에게 데리고 살라고 주고 감시를 시키시면 어떠오리까?”
“옳거니!”
박정빈이 무릎을 쳤다.
“그래 통인 정주현, 열아홉 살로 장가갈 나이도 되었고 한 달 이상 여자들을 감시했으니 앞으로도 눈치껏 잘 해낼 것이다. 또 하나는?”
“아, 예, 제 사촌동생으로 예곡에 사는 박재호가 지금 열여덟이니 역시 통인으로 데리고 계시면서 여자를 감시하라 시키시면 될 것이올습니다.”5)
-인질이 된 신부들
박정빈이 정주현과 박재호를 불러들였다.
“주현아, 너는 둘 중에 누구를 가지려느냐?”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 저 두 년을 네들에게 내어주려 한다.”
두 남자는 기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나는 동학 수괴 최시형의 딸이고 어린년은 일가쯤 되는 것 같은데 통 말을 않는구나. 수괴의 마누라는 좀 더 두었다가 몸이 회복되거든 다시 문초를 하기로 하고 젊은 년들은 네 들이 데리고 살면서 이리저리 구슬르고 달래든지 겁박을 주든지 해서 수괴의 행적을 캐어내란 말이다. 알겠느냐?”
“예, 사또. 그럼 저는 큰 년 윤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럼 저는 작은 년을...”
“언제 데려갈깝쇼?”
“어미 년이 눈치 못 채게 조용히 그리고 빠를수록 좋다.”
슬쩍 옥사로 다가간 두 젊은이에게 윤이 하소연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우리 엄니 돌아가시겄소. 우리는 안 먹어도 좋으니 미역국에 밥 한 덩이만 넣어주오. 벌써 며칠째 먹지도 못한 몸으로 아이 낳고 못된 꼴 보고 고문까지 당하셨으니 당신들 잔인하기가 어찌 이리 심하오?”
남자 둘이 한숨을 쉬며 돌아서더니 잠시 후 더운 미역국에 차디차게 식어 떡이 서로 엉겨붙은 떡국 두 사발을 가지고 왔다.
“고맙소.”
윤이 그릇을 받아 누워있는 손 씨를 일으켰다. 더운 미역국에 찬 떡 몇 개를 넣어 손 씨의 입에 넣어주고 옆에서 입맛을 다시는 동희에게도 먹여주었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는 태희 입에도 넣어주었다.
“동희야. 이제 떡국 먹었으니 너도 이제 여섯 살이 된 거다.”
손씨, 동희, 태희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정작 윤은 제 입에는 떡 한 숟가락 넣기도 힘들었지만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누이는 몇 살이야?”
“우린 같은 호랑이 띠잖아. 열두 살 많으니 열둘에 여섯을 더하면 열셋,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여덟이지!”
윤이 손가락을 곱아가며 동생에게 숫자를 헤아려주었다. 먹을 것이 들어가서 기운이 나는지 모처럼 넷은 서로를 다독여주었다. 옥사 기둥 뒤에서 이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정주현은 자기의 선택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에서 그릇을 한쪽으로 치우기가 무섭게 옥의 빗장이 열렸다.
“어이, 거기 두 사람, 사또가 물을 것이 있다고 하시니 잠깐 나와보슈.”
따듯한 국물이 들어가 기운을 차린 손 씨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윤과 태희의 손을 잡았다.
“내가 한 말 기억하고들 있지? 그리고 우리를 살려둔다는 건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뜻이니 그렇다면 언젠가는 우리를 찾으러 오실 거다.”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우린 이제 다 컸잖아요.”
“작은 할머니, 다녀올게요.”
옥에서 나온 윤과 태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주현과 박재호였다. 정주현은 태희를 박재호에게 건넸다. 박재호는 벌어지는 입을 애써 단속하며 태희의 팔을 나꿔채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이모, 아니 언니.. 언니...”
“태희야, 꼭 다시 만날 거야. 주문 외우고, 수행하는 거 잊지 말어.”
태희는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관계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 태희야. 지혜롭게, 당차게 이 모진 세월을 버텨내자. 너를 위해 기도하마.
정주현은 윤을 데리고 한참을 이리저리 끌고 돌아다니더니 인적이 드문 산길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당산나무와 당집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아마 그리로 끌고 가는 듯싶었다. 아... 어머니, 아버지...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인터넷 공개는 여기까지. 출판작업이 끝나는 대로 여러분들에게 책의 모습으로 공개될 것입니다. 현재 30% 정도만 공개된 것이며 이후에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사실들이 소설 속에 녹아 드러날 것이오니 많은 관심 놓치지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