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장흥편) 1~12회 / 명금혜정
제1장 갑오년의 아침
이인한은 마을 앞 연못에 서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1894년, 갑오년의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들판 너머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차가운 갯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였다. 그는 하늘님께 심고를 드리고 두 손으로 목검을 잡고 재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내리쳤다. 챙하는 소리가 연못을 흔들었다.
느티나무 고목의 잔가지들이 연못 속에서 미세하게 떨었다. 잔바람에 물살이 파르르 밀렸다. 이태 전에 이웃마을 송촌리 이순홍(李順洪) 도인에게 입도식을 한 후로 그는 날마다 연못 가에서 수련을 했다. 그는 두 입술을 꼭 다물고 날카로운 눈으로 들판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미 입도한 도인들의 발걸음이 저 바다 너머 섬마을의 골목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썰물이 되면 바다가 열리는 덕도에 갈 생각이었다. 요즘 들어서 부쩍 섬마을에 도인들이 늘어나서 가는 곳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올해는 예사롭지 않는 해가 될 터였다. 이미 고부에 가서 전봉준을 만나고 온 후라 그의 가슴에는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장흥고을의 대접주들과 숱하게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은 탓에 그는 대흥면과 인근의 섬마을의 도인들을 조직하고 무기를 마련할 준비를 철저히 해 나가고 있었다.
왼쪽으로 천관산의 잘 생긴 이마에 구름이 한 점 머물러 있다. 그는 다시 목검을 내리고 정자로 올라가서 정좌를 했다. 산기슭에는 정월 초하루의 찬란한 햇살이 고요히 퍼져 내렸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천관산을 향해 다시 심고했다. 뾰족한 봉우리에서 퍼져 나오는 산의 기상은 마을에 그대로 흘러들었다. 대흥면 연지리, 갑오년의 새아침을 맞으며 이인한은 남다른 각오를 새겼다.
고즈넉한 마을에서는 연기가 피어 올랐고 아침 차례를 지내느라 부산한 발걸음들이 사립짝을 맴돌았다.
이인한의 아내인 유씨는 마루에서 서서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느티나무 옆 제각에서 수련을 하는 이인한의 소리가 휘익휘익 집안에까지 서늘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유씨는 날렵한 남편의 몸놀림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 한쪽으로 찬 바람이 불어가는 듯했다. 남편이 목검을 휘두르며 허공으로 발차기를 할 때에 들리는 휘파람 소리는 왠지 석연치가 않았다. 그 소리 끝에 무엇인가 불길한 소식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휘익 휘익 휘이익!”
바람을 가르며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발짓에는 예사롭지 않는 힘이 실려 있어서 살기마저 느껴졌다. 유씨는 그럴 때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심고했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것이 동학이라고 하니 설마 남편이 나쁜 일이야 저지를까 마는불안한 마음은 영 가시질 않았다. 요즘 들어서 남편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어떤 때에는 멀리 약산도에서 한 무더기 도인들이 집을 찾아오기도 했고, 근동의 사람들도 남편의 옷자락만 보여도 고개를 숙였다.
남편은 오뚝한 코에 뾰족하게 내리뻗은 턱선, 그리고 쉽게 열리지 않는 입술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을 지녔다. 유씨는 늘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편이 목검을 들고서 제각에 앉아서 부연 안개가 깔린 들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남편은 올해가 시천주(侍天主)라고 했다. 유씨 또한 남편을 따라 입도식을 했고 유씨의 형제 자매들도 모두 도인이 되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가 녹록하게 보이진 않았다. 유씨는 가만가만 남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시장하시겠어요. 어서 아침 드세요. 설날인데 여기저기 세배도 가야지요.”
이인한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천관산을 머리에 지고 고요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내는 어렵고 힘들 일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인한은 그런 아내가 항상 고마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따라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몇해째 흉년이 이어져서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 고구마와 잡곡으로 끼니를 떼우던 이웃들이 설날이라 곡간 깊숙이 숨겨 두었던 쌀을 꺼내 떡을 만들고 갖은 나물을 무쳐 차례상을 차리고 있었다.
설을 쇠기 위해서 열흘 전부터 바다로 나가서 채취한 굴로 떡국을 끓였다. 골목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흘러 나왔다.
“오늘도 어디로 나가시렵니까? 설날이라 찾아오는 친척들이 많을텐데요.”
유씨도 굴을 끓인 물에 마늘과 떡을 넣어 끌인 떡국에다 김을 잘게 썰어 넣어서 차례상을 차려 놓았다.
“집안에 드는 손님은 당신이 대접하시구려. 일이 다급하게 되어서 출타해야 하오. 대흥면의 이방언 어른을 찾아뵙고 올해 일을 상의해야 한다오.”
그는 식고를 마치고 들이켜듯 순식간에 떡국 그릇을 비워냈다. 유씨는 무슨 일이나 서두르지 않던 남편이 아침마저 이처럼 서둘러 먹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급박한 상황을 느꼈다.
“도인들은 사람을 하늘처럼 여긴다는데 왜 관아 몰려가서 큰 소란을 일으키나요? 당신도 설마 그런 일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지요?”
아내는 수저를 들지 못하고 남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인한은 물그릇을 입으로 가져 가며 아내에게 대답했다.
“도인들이 꿈꾸는 세상은 차별도 없고 굶주림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오. 그런데 지금은 관리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지 않소. 이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백성들뿐이오. 그러자면 동학의 세력이 더욱 강고해져야만 하는 것이요. 그런데 지금 동학에 들어오고 싶어도 관의 탄압이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백성이 한둘이 아니요. 그러니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칼을 쥐고 있는 관리들의 횡포를 우선 물리쳐야 하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백성들을 살릴 수 있겠소.”
유씨는 눈물이 그렁해지면 대꾸했다.
“관아에 잡혀간 어르신들이 환곡의 이자를 내지 못해서 곤장을 맞고 줄초상이 날 것 같네요. 곤장 독을 빼겠다고 며느리들이 오래 묵은 똥물을 받으러 다니던데 참 안됐습니다. 수의도 준비하지 못하겠다고 관이나 직접이라도 짜겠다고 생소나무를 베었어요. 그렇지만 오래도록 그렇게 해 오던 것을 관리 한두 명을 혼낸다고 바뀌겠습니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지요.”
이인한은 유씨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도인들이 관아로 몰려가 난폭한 관리를 징치하는 것은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나랏님에게 고변하자는 것이오. 백성들이 이처럼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를 그냥 두면 안 된다고 경고를 하는 거예요. 나라 전체가 변해야 백성들이 살 수 있지 관리 한 명을 쫓아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도인들이 더 잘 알고 있소. 당신도 도인이 아니요?”
그는 아내에게 합장을 하고 꾸벅 절을 했다. 그러나 유씨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당신 때문에 친정아버님도 그리고 남동생도 모두 도인이 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불안합니다. 당신도 친정식구들도 신변에 위험한 일이 닥치지 않아야 할 텐데,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서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니 저는 도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유씨의 얼굴에는 남편의 안위에 대한 근심이 흐르고 있었다. 이인한은 그런 아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삶이란 유한한 것, 어차피 한 세상을 살다가 돌아갈 뿐이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한 삶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오. 옳은 것을 보고 행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도(道)를 행하는 일이지 않겠소. 죽음이란 성령으로 몸을 바꾸는 것일 뿐 슬프고 안타까운 것은 아니라오.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다 가면 후손들과 후학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삶이 열리지 않겠소.”
유 씨는 남편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안도감이 생겼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어떤 일에도 기운이 꺾이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이십 년이 넘었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남편은 의연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있으면 걱정 근심조차 쉽게 사라져 버리곤 했다.
“좋은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오. 내 안에서 불안한 생각을 하면 아무리 훌륭한 꿈이라도 이룰 수가 없소. 그러나 내가 자신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이뤄낼 수 있단 말이오. 새로운 세상을 만들 기운이 우리에게 내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소?”
유 씨는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을 쓸어 내려 가다듬으며 나직이 대꾸했다.
“요즈음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걱정도 많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거슬려서 되는 일이 없다는데 당신이 하고자는 일이 어쩌면 나랏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요, 변란을 꾀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면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작은 부스럼 따위를 크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무쪼록 몸조심 하시고 다녀오십시오.”
“모든 것을 하늘님에게 맡기고 두려워하지 말아요. 하늘님이 답을 내려줄 것이오. 날마다 수련을 하고 하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그런 두려움도 사라질 테니 일동일정에 늘 심고를 하시오.”
이인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읍내까지는 삼십 리이니 지금 부지런히 걸어도 점심때가 지나야 도착할 수 있었다. 유 씨가 조용히 일어나 솜두루마기를 내주었다.
이인한은 마굿간에서 말을 꺼내 타고 부리나케 이웃마을 송천리로 달렸다. 멀리 정동진의 널따란 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송촌리 앞뜰에는 차례를 마친 동네사람들이 풍물을 울려댔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자잘한 장구 장단이 재롱을 떠는 태평소의 늘어진 자락이 섞이어 설날 아침의 풍류를 자아냈다.
장흥에서 제일 처음 도인이 된 이순홍이 마을 앞 정자에서 이인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널따란 들판에서 갯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이순홍의 긴 수염이 날렸다.
“나와 계셨군요. 어르신 문안 드리옵니다.”
이인한은 해묵은 느티나무 여남은 그루가 푸짐한 잔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제각 옆에 말을 묶고 정자로 올라가 큰 절을 올렸다. 이순홍도 맞절을 했다.
“새해에는 무탈하고 도인들을 더욱 넓혀 가도록 합시다.”
이순홍이 절을 하고 일어서는 이인한의 손목을 잡으며 덕담을 한 후에 안부를 물었다.
“그간 얼마나 노로가 많으셨소? 하루에도 몇 백 리를 달려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소. 어서, 집으로 들어갑시다. 여기에 나온 것은 이접주 마중을 나온 것도 있지만 여식이 신행을 온다고 기별이 와서......”
이순홍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이인한도 긴 구렛나루 수염 끝에 잔주름을 패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설날이니 이소사님이 신행을 오겠군요.”
두 사람은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 커다란 솟을 대문 앞에 섰다.
“덕도는 얕으마한 구릉이 많아서 우마장으로는 제격이라고 하오. 어렸을 적부터 말 타는 것을 가르쳤더니 시가(媤家)에서 준 조랑말 기르는데 재미를 느낀 모양이라오. 이접주는 덕도에 자주 드나드니 제 여식(女息)을 더러 보았지요?”
“그럼요. 내일도 덕도에 포접을 하러 갈 생각이어서 이소사님께 들릴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오늘 친행을 오시니 내일 다시 들려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순홍이 큰 기침을 하자 사내 종이 나와서 대문을 열었다.
“어르신, 벌써 오셨습니까?”
떠꺼버리 사내 종은 이소사를 기대한 듯 이인한이 따라들어오자 으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손님을 모셔야지, 입은 왜 그리 벌어지는고?”
이순홍이 마루로 올라서며 이인한을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이순홍의 아내가 안방에서 나와서 이인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차례를 지내고 아직 음복을 못했습니다. 수정과와 식혜로 음복을 하십시오.”
부인은 다과상에 조청과 쑥떡을 차리고 마실 것을 내왔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여식이지만 기특한 아이이지요. 내가 동학을 접한 이후로 그 아이를 남녀차별없이 활발하게 길렀더니 타고난 영특함이 발휘되어서 하루하루 학문을 넓히는 품이 제법 큽니다. 다행히 사위놈이 연하를 몹시 아끼니 결혼한 지 이태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신혼의 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어딜 가나 둘이서 한몸처럼 붙어 다닌다고 하오.”
십여 년전에 동학을 받아들인 이순홍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딸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지요. 연하아가씨가 저 넓은 들판에서 말을 타는 법을 배우고 무술을 익힐 때 제 가슴도 설렜답니다. 이팔청춘이 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훔쳐볼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으니 사위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디 미모만 빼어났던가요? 활달한 성격에 사람을 이끄는 넉넉함마저 지녔으니 필시 도량이 큰 자녀들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이순홍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정과가 담긴 사발을 이인한에게 내밀었다. 이인한이 천천히 수정과 한 모금을 마시며 이제는 이소사가 된 연하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혼인한 후로 더욱 정진을 하더니 덕도의 맑은 기운이 깃들어 신기(神氣)마저 촉발하여 아픈 사람도 치료해 주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게 되었다고 하오. 뜻을 이루려면 삼대가 필요하다고 하더니 내 뜻이 연하에게 이어지고 또 손자가 태어나면 그 뜻을 이룰터이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니겠소?”
이인한이 웃으며 대답 했다.
“덕도에 들어가면 멀리서나마 이소사님의 댁을 둘러 보고 왔습니다. 꿈에 신녀가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니 예사로운 일은 아니지요. 아들을 낳아도 큰 인물이 될 것이고, 남편을 모셔도 크게 쓰임을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허허, 도인이시면서 여식이 꼭 아들과 지아비를 위해서만 살라는 법이 있겠소. 물론 후손를 키우는 것도 매우 귀중한 일이나 본인 스스로가 세상에 큰 일을 하며 살아갈 게요.
“하하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새해에는 건강한 외손자가 탄생하길 바랍니다.”
이순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입을 반쯤이나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 식혜를 따라 이인한에게 권하며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이다.
“대처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소. 고부에 가서 전봉준 접주를 만났다니 올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거사는 몇 월쯤에 하게 되는지요?”
“어르신! 올해가 바로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전국에서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미뤄 두어서는 안될 상황입니다. 백성들이 고혈을 빨아 먹는 관리들이 횡포가 극에 다랐고 도인들이 아니어도 민란이 속출될 상황입니다. 이럴 때 도인들이 일어서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고을도 새봄에 기포령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매우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구먼.”
이순홍이 수염을 쓸었다. 이인한은 식혜가 담긴 사발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방언 대접주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오늘 장흥지역의 대표 접주들이 모여서 거사를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도인들의 역량을 결집하면 하늘님이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순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노인이란 다만 힘이 좀 부칠 뿐, 뜻은 꺾이지는 않는다오. 우리들에게는 청년들이 못 가진 지혜라는 것이 있지. 이접주, 저 아래 곡간으로 좀 가 보십시다.”
이순홍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을 앞에 널따란 바다 같은 논이 모두 이순홍의 땅이었다. 해마다 넉넉한 갯논의 쌀이 쌓여서 살림이 불어나곤 했다. 갯벌이 섞인 논의 쌀은 다른 쌀에 비해 훨씬 기름지고 맛이 좋았다.
이인한은 곡간에 무엇이 들었을지 매우 궁금한 마음을 누르며 이순홍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순홍이 종을 불러서 곡간의 문을 열게 했다.
“아니! 어떻게 저 물건을 구하셨나요?”
이순홍이 활짝 열어 제친 곡간을 들여다 보며 이인한은 절로 소리를 질렀다. 차곡차곡 쌓여진 나락가마니는 기대한 것이었지만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선반에 놓인 것은 백여 개가 넘을 만한 화승총이었다. 그리고 총구 옆에 화약들도 얌전히 진열되어 있었다.
“도인님, 어디에서 저걸 구하셨나요?”
이순홍은 종을 물리고 나서 천천히 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새 아침의 해가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 하늘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쌀가마니 팔아서 회진에 머물고 있는 왜놈들에게 매수를 했다오. 돈이면 양반도 사는 세상인데 저딴 것을 왜 못 구하겠소. 전투란 반드시 이겨야 할 말이 있는게요. 도울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도울 테니 말씀을 해 주시오.”
그리고 이순홍은 곡간으로 들어가서 나락가마니를 쓸어 보며 지긋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곡식들이 시천주(侍天主)를 하는데 쓰여야 하지 않겠소. 농사를 지을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벼 한 포기가 내 아들 딸처럼 여기며 키웠지만 사람들 입으로 들어갈 때는 더 귀한 정성이 따라야 한다오.”
이인한은 이순홍의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이인한이 다시 한번 반절을 올렸다.
“지이잉 징, 지이잉 징!”
들판에서 풍년을 기리는 풍물굿이 계속 되어 있었다. 깊은 바닷물 속까지 파고 들어갈 것 같은 우람한 징소리가 울려댔다.
“어서 가서 읍내의 대접주들을 만나시오. 한 시가 급하지 않소.”
이순홍이 이인한를 바라보며 팔을 흔들었다. 이인한은 안방을 향해 반 절을 올리고 후다닥 대문을 나섰다.
“챙기챙기챙기챈!”
들판에서 꽹과리 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
탐진강의 강물은 시푸르렀다. 강가엔 살얼음이 얼었지만 강심으로는 흐르는 강물은 유난히 푸르렀다. 매운바람이 한바탕씩 강물을 흔들었다. 관아가 건너다보이는 정자에 도인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화로에 불꽃이 넘실댔다. 이방언은 자루에 솔방울을 가득 채워 놓고 화로에다 수시로 솔방울을 던져 넣었다. 불기운에 세 사람의 얼굴이 번들거렸다. 호방한 얼굴에 자르르한 미소를 담은 이방언이 중심에 앉았고, 그 옆에 나룻이 긴 구교철이 기라죽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방언이 주머니에서 곶감 몇 개를 꺼내어 두 사람에게 권했다. 그리고 호리병에 담긴 식혜를 따라 주었다.
“설날인데 요기라도 제대로 하셨습니까? 제 집으로 모셔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오가는 거리가 멀어서 시간을 아끼자고 읍내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사는 것이 말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죽으로 연명한 사람들이 천지로 널렸을 테지요.”
볼우물이 움푹 팬 구교철 접주가 이방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들이 군입거리를 챙겨 와야 하는데 어르신이 이렇게 가지고 오시다니 황송합니다. 얼른 먼저 드십시오.”
그는 이방언이 내 놓은 곶감을 다시 들어서 이방언에게 권했다. 이방언이 먼저 곶감을 베어 물고 오물거렸다.
“마을마다 군졸들이 닥쳐서 환곡의 이자를 못 내거나 결가를 내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소식은 들으셨지요?”
이인한이 이방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이방언이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을 했다.
“이제 관리들과 세금을 탕감해 달라고 담판을 할 때는 지나고 말았소. 관리들의 횡포는 전국적으로 너무 심해서 동학도인들이 다함께 척결을 해 나가야 할 문제로 발전했지 않았소. 우리 고을의 문제도 마찬가지라오. 먼저 전봉준 접주가 고부에서 관아를 점거하고 일을 벌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것이오. 우리도 거사를 준비해야 하오. 사소한 담판은 그만 하도록 합시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었다. 구교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불이 타는 듯한 강한 눈빛으로 이방언에게 물었다.
“거사를 준비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식량과 무기이죠. 그것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요?”
이방언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을 했다.
“식량은 대줄 사람들이 있소. 고을의 부호들에게 부탁을 했소. 우리 집의 창고에 있는 곡식들도 모두 풀고 마을마다 뜻이 있는 유지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소.”
“그들이 선선히 곡식을 내준다고 하던가요?”
이인한이 의심스러운 낯빛으로 이방언에게 물었다.
“고을의 부호들이란 대대로 학문을 한 유학자들의 자손이오. 조선의 사회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으면 쉽게 가산(家産)을 늘릴 수 없는 법, 그러나 반대로 학자들이 가장 설득하기 좋은 사람들이라오. 유학(儒學)의 목표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니 지극히 이기적인 목표일 뿐이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모두 평등하다는 동학의 이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오. 선비들이란 태생적인 이권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뜻을 받아들이면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는 사람들이오. 우리 고을의 유학자들 중에서 동학의 이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소. 그러나 저같이 당당하게 뜻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정이 다를 뿐, 탓할 일은 아니오.”
이방언은 크고 호방한 풍채답게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넓었고 끌어 들이는 폭도 넓었다. 이인한은 그런 이방언에게 항상 여유가 느껴졌다.
“대접주님께서는 어찌하여 유학을 버리고 동학을 선택했는지요? 늘 궁금한 점이었습니다.”
이인한이 고개를 숙이며 이방언에게 물었다. 이방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유학에 없는 정신이 동학에 있지 않소. 우리가 배웠던 인의예지(仁義禮智)만으로 대동 세상은 결코 실현할 수도 없소. 인의예지를 문제 삼아 거룩한 답안을 제출하고 관리로 등장한 이들이 행하는 짓이란 고작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일이오. 이게 학문하는 자의 목표라니, 우습지 않소. 공자나 주자는 인의예지를 통해 인격을 수양하고 천하를 구하라고 했소. 그러나 조선에서 유학은 천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신양명의 수단일 뿐이오. 그런데 동학은 수심정기로 인의예지의 내실을 회복하고, 성경신의 수련을 겸하여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오. 학자라면 세상을 새롭게 할 살아 있는 학문을 하겠소, 아니면 죽어 있는 학문을 하겠소?”
구교철이 냉철한 눈빛으로 이방언을 응시하며 물었다.
“젊은 시절에 유학을 깊이 하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유학의 한계를 빨리 깨닫게 되었습니까?”
“오래 입은 옷이 반드시 편하다고 말할 순 없소.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오래 입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오. 유학을 대체할 학문이 없지 않았소. 그래서 문제투성이지만 많은 선비들이 유학을 섬기며 살아온 것 아니겠소. 그것은 마치 자기가 서 있는 땅의 성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과 같다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의 됨됨이를 빨리 파악해야 하오. 마른 땅에는 잡곡을 심고 젖은 땅에 벼를 심어야 하듯 조선에는 조선의 학문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뿐이오. 우린 조선의 것이 아닌 청나라의 문물에 의존하며 살아오지 않았소.”
바람이 불어왔다. 화로에 핀 장작불에서 불꽃이 일렁이며 불티가 튀었다. 세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기는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회령진 수군만호를 털면 장녕성 정도는 쉽게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병영성을 터는 거지요. 병영성은 조선의 육군의 집합소이니 꽤 많은 무기가 비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무기를 탈취해 온단 말이오?”
구교철이 한눈을 찡그리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지금 회령진에는 수군이 주둔하지 않습니다. 몇 명의 관리들이 무기고만 지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인한이 자신 있게 회령진의 수군만호 이야기를 펼쳤다. 이인한은 이미 손안에 무기를 쥔 듯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이방언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이접주가 탁월한 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무기들을 준비할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을 보니 거사는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구려.”
이인한이 다시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작전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구역을 나눠야 합니다. 저는 대흥면을 맡고 이방언 대접주님께서는 남면을 맡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교철 접주님께서는 웅치로 들어가야 합니다. 웅치에는 도인들이 많으나 활동력이 있는 접주가 부족해서 우리들 중에서 파견을 나가야 합니다.”
구교철이 고개를 숙였다.
“읍내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도인들이 많은 웅치면으로 가면 초기에 승세를 확고히 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거주지를 웅치로 옮기고 도인들과 각별히 관계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이방언은 고부와 충청도를 드나들며 전봉준과 해월 선생의 활동을 돕고 전체적인 흐름을 타면서 장흥을 중심으로 관군을 제압해 나가기로 했다. 구교철과 이인한은 외부의 출입을 자제하고 장흥 동학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작전을 짜고 준비를 해 나가기로 했다.
“우리가 맡은 고을에서 출정식을 해야 하네. 각자 만 명의 도인들을 모으는 것으로 목표를 삼고 정진하도록 하세.”
이미 보은 취회에 참석하고 온 이방언은 장흥과 주변 지역을 동학의 관할 하에 두는 방안 대해서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풀어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점거해야 할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나?”
이방언이 이인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인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이용태가 역졸들이 800명이나 데리고 와서 고부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죠. 무고한 도인들과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매타작을 내리고, 부녀자들을 겁탈한 간악한 놈들이 벽사역 역졸들입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죠. 벽사역부터 박살을 내야죠.”
이인한의 말에 이방언이 받아쳤다.
“벽사역에서 장녕성, 그리고 강진성, 병영성 그다음엔 나주로 올라가는 것이오.”
구교철이 빠르게 물었다.
“그다음엔 조정으로 가는 것인가요?”
그러자 이방언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 다음엔 북접과 힘을 합하여 외세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지금 조선은 탐관오리가 문제가 아니라 창밖에서 넘보고 있는 외세들이 더 문제입니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프랑스까지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어요. 자칫하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주게 생겼습니다.”
이인한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외적의 발톱을 모두 잘라내고 당당한 조선을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척왜양 하여 창의하는 것이 지난 보은 취회 때 해월 선생께서 제시한 우리의 일차 목표인 것이오.”
이방언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탐진강과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서서히 우리도 각 지역에서 기포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구교철이 이방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방언은 구교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각 지역마다 동학 도인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야 합니다. 우선 동학 도인이 나서야 일반 농민은 물론이고 의기를 가진 양반 사인들도 안심하고 동참할 것입니다. 관군보다 열 배는 많아야 관군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거사는 가을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으니 그 안에는 최대한으로 도인들을 늘려야 합니다. 처남 매부는 물론이고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이방언은 마치 눈앞에 거사가 일어난 것 같은 표정으로 두 접주에게 당부를 했다. 이인한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이방언에게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무기들을 충분히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작전의 지휘는 이방언 대접주님께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이방언이 호탕한 웃음을 허공으로 날렸다.
“싸움이란 덕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오. 작전이 있어야 하고 적을 유인할 만한 술수도 필요하오. 이인한 접주는 명석한 두뇌로 지리적인 특징을 잘 파악하는 장점을 지녔으며 싸움에 능하니 모든 거사의 작전은 접주께서 하시도록 하시오. 나는 전체를 아우르며 이 접주를 돕는 일을 하겠소. 군량미를 비축하고 무기를 점검하고 부상자를 운반하는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이오.”
그러자 구교철이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저도 특별한 재주가 없으니 이방언 대접주님의 곁에서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서 한 사람이라도 포덕을 합시다. 오늘이 마치 설날이니 마을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친척들도 드나들 테니 포덕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오. 농사꾼들은 농한기 때에는 포덕을 하고 농번기가 오면 밭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법이라오.”
이방언이 다음 만날 날짜를 정해 주었다. 세 사람은 아직 타고 있는 화로의 불기운이 아까워서 손을 내밀고 불을 쪼였다. 서로의 눈빛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탐진강이 말없이 흘러갔다. 얕은 겨울 강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제2장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
정월 초사흗날 새벽 당제(堂祭)가 시작되었다. 마을 앞 성황당에는 목욕재계한 제사장이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정중한 자세로 제수를 올리고 있었다. 정초에 제사장(祭司長)으로 지목된 이는 일 년 동안 궂은 곳에 드나들지 않으면 몸을 정결하게 가꾸곤 했다. 천관산 기슭에서 길어온 물로 제수를 새롭게 지었고, 제단(祭壇)에는 잘생긴 말 한 필이 금방이라도 푸른 초원을 달려가려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만든 동상(銅像)이었다. 제주도에서 기른 말이 육지로 들어오는 포구 주변에는 말을 신으로 모시는 당제가 많았다.
대흥면 연지리 성황당에도 마신을 모시는 당제가 진행 중이었다. 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함께 참여한 마을 어른들의 재배와 헌주가 이어졌다. 이인한도 맨 뒷자리에 서서 그들을 따라 절을 올렸다. 한밤중에 시작된 제례는 동이 터올 때에야 끝이 났다. 연지리 앞 들판으로 찬란한 아침 태양이 솟아올랐다. 산짐승, 들짐승을 위한 고시레를 마치고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복 차례가 돌아왔다. 마을의 어른들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한해의 건강을 축원했다.
“징이이이잉!”
제사장이 징을 한번 두들기며 마을을 도는 메귀굿의 시작을 알렸다. 굿패들이 제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제사장은 그들에게 남은 술을 나눠 마시게 했다. 마을의 장정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어린 소년들도 깃발을 들고 따라 나왔다.
‘농자지천하대본(農者之天下大本)’
마을에서 가장 동작이 빠른 최신동이 노랗게 귀를 단 깃발을 흔들며 제각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메귀굿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을의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을 밟아주며 새해의 복을 축원하는 일이었다. 굿패가 집으로 들어서면 집안에서는 맛있는 음식도 내어 오고 엽전 몇 냥도 내어 놓아서 흥을 돋구어 주었다.
굿패들은 제사장을 모시고 마을로 들어가며 신바람이 나는 가락을 품어냈다. 우람한 징소리가 울려 퍼지고 잔바람 같은 장구소리, 그리고 다글다글 자갈이 굴러가는 듯한 쇠소리에 듬직한 큰형님 같은 북소리가 어울려 느티나무 사이로 퍼져 나가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굿패는 마을에서 젊은 장정들이 중심이 되었다. 당제가 나이든 어른들의 차지라면 메귀굿은 마흔이 넘지 않는 젊은이들 차지였다. 어린 소년들에게는 날라리를 불게 하거나 상모를 돌리게 했다. 굿패가 이인한의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어허, 여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이인한 장군의 집일세. 우리 모두 지신을 밟고 어허허.”
꽹과리를 잡은 상쇠가 박자를 맞추어서 이인한의 집에 대해서 덕담을 하기 시작하자 풍물패들이 각자 박자를 맞췄다.
“깨갱 깨갱!”
“쿠구궁 쿠구궁.”
“두두둥 두두둥!”
“지이잉 지이잉!”
굿패들이 한 다리를 들어서 박자에 맞추어서 춤을 추었다. 이인한의 부인이 마루에 들어가서 한과 한 쟁반을 내왔다. 마당을 돌던 굿패들이 한과를 나누며 덕담을 하기 시작했다.
“이 댁에는 만수무강하옵시고, 논밭들에 주렁주렁 곡식들이 열리고, 말발걸음마다 도인들이 줄을 이어가고….”
“챙기챙기챙기챈!”
언제 왔는지 동네 할머니들이 마당을 돌면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어댔다. 지붕도 들썩들썩 바람도 들썩들썩 온 동네가 굿판에 휩싸여서 들썩댔다. 이인한이 굿패에게 엽전 두어 개를 내주자 상쇠가 신이 나서 소리를 키웠다.
“이대감님댁에 소원성취 내리소서!”
“어얼쑤!”
얼쑤, 얼쑤 사람들이 마당을 놀고 마루로 올라가서 지신께 인사를 드리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제왕신께 인사를 드리고 장독대로 가서 장독대 신에게 인사를 올렸다. 온 집안을 뱅뱅 돌며 지신을 밟은 행렬이 이어졌다. 최신동과 어린 아이들이 흔드는 깃발도 어지럽게 집안을 흔들었다.
이인한은 아래채 마루에 앉아서 최신동이 흔드는 농자지천하대본이라는 깃발을 대신해서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외세(斥洋外勢)를 읊조렸다. 드디어 정월이 되었고 전봉준 접주는 이제 고부성을 점령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장흥에서도 곧바로 기포령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귀굿의 행렬은 그에게 장흥 전투를 미리 그려보는 연습전이기도 했다.
‘전투란 반드시 이겨야 할 말이 있는 법, 승패는 전사들의 사기에 달린 것이다. 사기를 올리려면 필시 풍물을 이용해야 겠구나.’
그는 임진왜란 때에도 수군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꽹과리, 장구, 북, 징 소리는 그 기운이 커서 적들이 심장을 나약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인한은 메귀굿의 가락을 들으며 심장의 박동을 살폈다. 높다란 꽹과리 소리가 뒤통수를 치며 자꾸만 기운을 치솟게 했다. 이인한은 굿패들이 모두 전투장의 도인들이라 생각하며 상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앞쪽에서 사기(士氣)를 올리고 측면에서 공격을 하면 관군들을 물리치는 것을 식은 죽이다. 동문에서는 꽹과리를, 서문에서는 징소리를, 남문에서는 장구소리, 북문에서 북소리를 울리며 도인들이 성을 쳐들어간다면 관군들은 혼비백산 어디로 도망을 갈지 몰라서 난장판을 이루겠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도인들이 어디인들 못 가랴!
그러나 문제는 관군이 아니라 외세일 터였다. 관군들이나 고작 오합지졸 보부상의 병력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식 무기를 갖춘 왜놈들이 달려들면 상황은 또 달라질 터였다.
메귀굿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집집마다 돌며 술과 음식을 나누며 덕담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정월은 농한기라 특별히 할 일 없는 농민들에게는 좋은 놀이이자, 새날을 준비하는 마당이었다. 이인한은 마을 앞 들판으로 나와서 이웃마을에서 들리는 메귀굿 소리를 들었다. 마을마다 굿판이 벌어져서 풍물 소리가 들려왔다.
‘강강술래를 전투에 이용한 것처럼 농민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는 방법이 저기에 있군.’
이인한은 오래 전부터 들어온 임진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궁리를 거듭해 나갔다. 그는 탁월한 민첩함으로 회진만호에 가서 무기를 빼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군만호에는 분명 많은 무기가 쌓여 있을 것이었다. 그는 들판을 걸어서 바닷가에 이르렀다. 멀리 작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관졸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육지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저 바다 너머 섬에서는 더 많은 착취가 일어났다. 백성들이 잡은 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모두 관졸들 차지였다. 그는 섬사람들이 그가 나타날 때마다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이유를 잘 알았다. 배가 뜰 때마다 그들보다 앞서서 진을 치고 있는 수군들의 정찰선들이 흉어기보다 무서운 것이다.
이인한이 말을 타고 회진포를 찾아간 것은 어느 새 정월도 반쯤이 지난 보름날이었다. 그의 마음은 하루속히 덕도에 가서 포접을 하고 싶었으나 대소가의 친척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메귀굿이 끝나길 기다리자 속절없이 정월이 보름에 이르렀다. 회진포에 도착했을 때는 1월 15일, 포구에서는 보름을 맞이하여 풍어제를 올리고 있었다. 뱃전마다 오방색의 깃발이 휘날리고 풍물소리가 높았다.
“어르신, 새해 복은 많이 받으셨나요? 정초에 이곳에 웬일로?”
낯이 익은 사공이 이인한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이인한은 말을 포구에 묶어 놓고 사공에게 물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리는 어떠하오?”
이인한은 수십 년 동안 나룻배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세간의 소식을 물었다.
“저희 같은 무지랭이들이 무얼 아나요? 접주님이 더 잘 아시지. 고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 섬마을에까지 소문이 밀려오나이까?”
허연 수염을 날리며 사공이 물었다.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뱃전으로 올라탔다. 이인한은 이미 닷새 전에 일어났다는 고부 사건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을 뿐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 소문이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데 참으로 빠르오. 여기에서 봉화를 올리면 며칠이면 한양에 도착할 것 같소?”
사공은 닻을 올리고 노를 바다로 내 놓으며 이인한을 바라보았다.
“봉수대들이 한눈만 팔지 않으면 길어도 하루면 한양에서도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저 봉수대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걸 제 평생에도 본 적이 없어서......”
“하루......”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간대도 거의 보름이 넘게 걸릴 거리가 하루면 소식을 알 수 있다고 하니 이인한의 생각도 번뜩였다.
“그런데 어르신, 덕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이인한은 귀가 번쩍 뜨여서 사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따리를 이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던 아낙이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이상한 양반이 자꾸 덕도에 나타나는데 그 양반이 말도 잘 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늘님이라고 맞절을 한다고 합디다. 양반 상놈 구분도 없고 모두 평등하게 살 세상이 온다고 하니까 우리들은 그 말만 들어도 좋지 않소. 나도 그 양반 얼굴 한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늘 보따리 장사를 하니 만날 수가 없구랴.”
아낙은 섬에서 말린 미역을 가지고 육지 곳곳에 가서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아낙의 보따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아낙이 뱃전에다 보따리를 풀어제쳤다. 반짇고리, 노리개, 비녀 등 온갖 물건이 다 들어 있었다.
“미역을 이고 가서 방물로 바꾸어서 섬에서 파는 군요.”
늙은 사내가 보따리 주변에 쭈그려 앉아서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아낙이 파리를 쫓듯 사내를 쫓아내며 다시 주섬주섬 보따리를 묶었다.
“보부상이 많아서 물건 팔기도 쉽지 않아요. 여기저기 알음알음으로 친척들만 찾아서 팔고 오는 길이오. 그나저나 덕도만 그런 게 아니라 천지에 백성들의 한숨소리만 들리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소리가 높아지니 올해 갑오년이 예사롭지가 않소.”
아낙이 투덜거리며 육지의 소식을 전했다.
“바다에서는 좋은 고기는 모두 관졸들이 빼앗아 가고 육지에서는 먹을 만 한 것은 모두 세금으로 바쳐야 하니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들 합니다. 어디에다 발을 붙이고 살아갈까 참말로 모진 세월이오.”
아낙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인한은 한발 물러서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무도 이인한을 눈 여겨 보지 않았다. 다시 사람들이 모여 들며 왁자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 동학에 입교를 한다고 하지 않겠소? 동학에 들기만 하면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차별이 없고 또 유무상자((有無箱子)라고 해서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고 산다고 하니 없는 사람에게는 살맛 나는 세상 아니겠소?”
늙은 사내가 아낙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낙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여기뿐만 아니고 지금 육지에서는 야단법석이 난 셈이죠. 너나 나나 동학을 하겠다고 나서니 관에서는 동학을 한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혈안이 되었어요. 아무 데서나 동학한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허리가 부러지게 맞고 오니 모두들 입조심 하시구랴.”
아낙이 못을 박자 사람들이 두려움 표정으로 흩어졌다. 이인한은 세간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남실대는 탓에 배는 노를 세게 젓지 않아도 섬으로 잘 밀려갔다.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어느 새 덕도의 포구에 배가 닿았다. 이인한이 배에서 내리자 지난 달 입교한 덕도 접주 윤범식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어서 오시오. 접주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윤범식이 이인한의 짐보따리를 받아 들며 반가운 기색을 했다. 그의 곁에는 눈썹이 까만 소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범식이 소년에게 손짓을 했다. 소년이 나루터에서 큰 절을 올렸다.
“성도라고 합니다. 멀리서 어르신을 자주 보았습니다.”
“몇 살이냐?”
“설을 쇠었으니 이제 열여섯이옵니다.”
이인한은 볼에 발그레한 빛이 흐르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강한 눈빛이 소년에게도 담겨 있었다.
“집으로 드시지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윤범식이 이인한을 안내하며 총총히 마을 길로 들어갔다. 포구에는 풍어제를 준비하는 뱃전에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은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슬슬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고기잡이를 시작해야 하는 철이었다. 날씨가 온화한 탓에 먼 바다에 나가면 아직도 고기들이 그물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런 날엔 꼭 찾아오는 손님이 있답니다. 알고 계시죠?”
윤범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인한에게 물었다. 이인한이 포구를 둘러 보며 턱을 쓸었다. 섬은 얕으마한 구릉으로 이뤄져서 여기저기에 망아지들이 뛰어 다녔다. 반지르하게 빛을 내는 상록수 잎새들은 망아지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인한과 일행은 동백숲이 빽빽하게 들어찬 마을길로 걸어갔다.
“아직 한겨울이나 빼앗아 갈 것도 없는데 이런 날에 뭘 얻겠다고 나타난단 말이오?”
이인한이 섬마을 곳곳에 메여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이야 먹을 것이 있건 말건 그게 상관이 아니죠. 우선 창칼을 들이밀며 죽이겠다고 윽박을 지르면 백성들이야 무엇이건 내 놓게 되어 있어요. 애써 숨겨 놓은 제수들을 꺼내서 풍어제를 지내려고 조심조심 벼르고 있건만 아마 풍어제가 시작되기도 전에 수군들이 나타나서 제상을 엎을 것입니다.”
윤범식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각오가 들어 있었다. 이인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윤범식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늘 밤에는 무슨 대책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이렇게 당할 수만 없다고 해서 이미 입교식을 마친 도인들을 중심으로 작전을 짜 놓았습니다.”
“허어, 그거 아주 궁금한 일이구려. 살짝 귀뜸좀 해 주시구려.”
그러나 윤범식은 입가에 굵은 주름살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다만 커다란 눈망울에는 뭔가 특별한 각오가 들어 있었다. 바다는 아주 맑았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잔바람이 나무 가지들을 들썩이는 숲을 지나서 골목으로 들어서며 이인한이 성도에게 물었다.
“글공부가 좋으냐 바닷일이 좋으냐?”
성도는 마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바람이 나서 대답을 했다.
“저는 글공부 하는 것은 싫습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요. 대신 바다에 나가면 갯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으니 공부하는 것보다 재미가 넘칩니다. 고기도 잡고 고동도 잡고 미역도 따고 파래도 뜯고.”
성도는 손가락을 세며 바닷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접주님 저는 노도 잘 젓습니다. 웬만한 배는 혼자서도 거뜬히 먼 바다로 몰고 나갈 수 있답니다. 저는 뱃사공이 될 거에요.”
이인한은 윤성도의 이야기를 들으며 껄껄 웃었다.
“아니, 왜 뱃사공이 되고 싶니?”
“뱃사공은 오가는 사람들의 사연도 많이 들을 수 있으니 심심하진 않을 것 아니에요?”
윤범식이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뱃사람이 잡은 것은 모두 수군들 차지니 무엇을 한들 남아나는게 있겠소.”
성도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표정을 바꾸며 아버지와 이인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미 삼아 아들에게 노 젓는 법을 가르쳤더니 아예 바다에서 살려고 합니다.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는 모두 수군들에게 빼앗기면서도 성도는 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해서 탈이지요.”
윤성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바다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 저기 보세요. 수군들의 배가 오고 있어요.”
회진 포구 쪽에서 관군의 깃발을 달고 긴 돛을 풀어헤지고 덕도 쪽으로 물보라를 헤치며 다가오는 배들이 보였다.
“오늘은 먹잇감이 많아서 한 척이 아니고 세 척이나 오는구나.”
윤범식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성도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수군들의 배를 향해 주먹질을 해댔다.
“보름달이 떠오를 즈음엔 한바탕 진한 굿이 벌어질 것 같군요.”
윤범식이 싸늘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들려 주었다. 이인한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몹시 궁금했지만 왠지 석연치 않는 윤범식의 표정을 보며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저들은 함부로 건들었다가는 오히려 피해가 막심할 텐데 대책은 마련해 뒀나요?”
이인한이 조심스럽게 묻자 윤범식이 싸늘하게 웃었다. 윤성도도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 입을 꼭 다물고 두 사람의 표정만 살피었다.
“쥐도새도 모르게 우리가 빼앗긴 것을 되찾아 올 겁니다. 미리 작전을 짜 두었지요. 저들이 빠져 나갈 즈음에 물살을 막고 배들이 포구로 들어서게 한 후 포위를 할 참입니다. 섬 구석구석에 배를 숨겨 놓았어요. 꽹과리 소리가 한번 들리면 그 배들이 저 수군들의 배를 포위하는 것이지요.”
이인한의 손에 땀이 배였다.
“수군들은 서로 연락망이 잘 짜여져 있을텐데 구원을 요청하면 어떻게 할 테요?”
“그럼 정면으로 한판 붙는거지요.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빼앗길 것은 모두 빼앗겼으니 이판사판이지요.”
윤범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만 윤성도의 눈썹이 꿈틀꿈틀 흔들거렸다. 이인한은 짧게 심고를 올린 다음에 짙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며 말꼬리를 돌렸다.
“오늘 밤에 입교식을 치를 분들은 몇분이나 되나요? 노력도에서 오겠다고 기별을 보내왔던데.”
윤범식이 턱을 쓰며 가만히 읊조렸다.
“명절 때 처가에 가서 포덕을 했습니다. 두 명이 배를 타고 넘어 온다고 했으니 풍어제가 끝날 즈음에 저희 집 마당에서 입교식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도 입교식을 치르겠습니다.”
성도가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을 잡으며 이인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도인이 되어서 더 이상 바다에서 수군들이 우리가 잡은 것을 빼앗아 가는 일이 없도록 싸우겠습니다. 하늘님이 주신 세상은 백성들이 제 먹을 것을 빼앗기지 않는 세상이옵니다.”
윤범식이 두루마기 자락을 잡고 있는 아들의 손을 빼내며 조용히 타일렀다.
“넌 아직 어리니 어른들이 하는 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거라.”
그러나 윤성도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윤성도는 이인한을 바라보며 외쳤다.
덕도 앞 바다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달이 천천히 떠오르자 수면 위로 은빛 물결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이인한은 윤접주의 마당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포구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인한은 골목을 살폈다. 이제 곧 앞 섬에서 입도식을 치르러 도인들이 올 터였다. 그런데 윤범식이 아들 성도와 마루에서 뛰어 나와서 포구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짚이는 게 있는데 내려가 보십시다.”
윤범식이 먼저 골목길을 내다르며 이인한에게 길을 터주었다. 성도가 이인한과 윤범식의 사이로 파고 들며 속삭였다. 밤바람이 돌담사이로 스치며 성도의 말을 가르고 있었다.
“오늘 밤에 나타난 수졸들은 메두기타작을 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었어요.”
윤범식은 뒤로 쳐지며 성도의 뒤통수에 대고 재빨리 대꾸 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수군들의 귀에 그 소리가 들어가면 너부터 곤장밥이 될 터이니 말조심을 하거라. 도인이 되려면 우선 입조심부터 해야하는 것이야. 하늘의 뜻은 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니 함부로 입밖으로 내서는 안된다.”
성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묵묵히 이인한의 뒤를 따랐다. 이인한은 풍물소리가 들리는 포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꽹과리 소리가 간간히 들리긴 했지만 풍물가락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담판이라도 짓고 있는 양,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닷물이 넘실대는 포구에 내려서니 여남은 척의 배가 정박 중이었고,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그 중에서 가장 큰 배에 모여 있었다. 관군의 깃발을 단 배가 한 척 떠 있는 것이 수군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이인한도 윤범식과 더불어 그들 사이로 끼어 들어갔다. 두 명의 수군이 동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군 포졸이 허리에 칼을 차고 몽둥이를 들고 사람들을 노려 보고 위협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들은 수군을 괴롭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을 터! 빨리 길목을 터라. 그리고 풍어제를 지낸 후 제수는 여기 이 자루에 담아라. 수군대장의 명령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당장 관으로 불러 곤장을 내리치리라!”
그런데 수군을 둘러싸고 있는 장정들은 누구 하나 기가 죽지 않고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배 주인인 듯한 늙수그레한 사내가 깃발을 매어 단 장대를 하나 뽑아 들고 수군들을 당장이라도 때리겠다는 시늉을 했다. 두 명의 수군들은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을 쳤다.
“흑, 오늘 이 자리에서 제삿밥이 한번 되어 볼테냐! 오늘을 우리가 벼르고 있었다. 너희 수군대장에게 가서 일러라. 이 덕도에서 더 이상 생선을 빼앗아 가지 말라고, 이제 우리들이 똘똘 뭉쳤으니 너희들에게 애써 잡은 갯것들을 빼앗기기 않을 것이다.”
노인은 일부러 배가 휘청거릴 정도로 장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장대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휘익휘익 나며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자 키가 작은 수졸이 허리에 찬 칼을 꺼내서 휘두루기 시작했다.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칼소리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피하며 뱃전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퍼런 칼날이 달빛에 은빛으로 부서졌다. 날이 어찌나 새던지 누구 하나 맞으면 금방 팔다리가 잘릴 것만 같았다. 다른 수졸도 기가 살아서 허리 춤에서 칼을 뺐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감히 수졸들을 괴롭혀서 너희들이 얻을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빨리 풍어제를 마치고 제수를 여기에 넣어라. 특별히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니 오곡밥과 부럼으로 쓸 과일들도 여기에다 쏟아 넣으란 말이다. 나라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병졸들을 위로해야 하지 않겠나?”
두 명의 수졸들이 칼춤을 추자 기가 죽은 동네 사람들이 이러저리 뱃전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인한은 두 주먹을 꼭 쥐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장대를 뽑아들고 두 놈의 수졸들의 어깨를 내리칠 심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리며 수졸들이 뱃전에 나동글아지고 말았다.
“아얏! 이 파렴치한 관졸들 같으니라고. 내 너희들은 벼르고 있었느니라.!”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이인한은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새 뱃전으로 달려와서 장대로 수졸들을 내리치고 칼을 빼앗아 바다로 던져 버리고 있는 여인. 이인한은 흐음! 절로 미소를 지었다.
“이소사다!”
성도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이소사는 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여전히 장대로 수군들을 후려 치고 있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도 달려 들어서 수군들을 발로 차고 욕을 해댔다. 두 명의 수졸들이 납작하게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손을 싹싹 빌었다.
“천하에 못된 놈들, 섬사람들이 애써 잡은 갯것들을 보기만 하면 빼앗아 가더니 이제 제수까지 빼앗으러 왔단 말이냐. 오늘 너희들을 아예 고깃밥이 되거라.”
수군들은 아무리 빌어도 매질이 멈추지 않자 고개를 들고 독이 오른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빨리 매질을 멈추어라. 관졸을 혼내고도 목숨을 건질 것 같으냐! 너희들은 당장 내일 모두 관아로 잡혀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령진 수군만호에서 싹쓸이를 해 가서 송장이 될 터인즉 빨리 이 일을 멈추란 말이다.”
그러자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 치마를 끈으로 동여맨 이소사가 당찬 발걸음으로 수군들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덕도에 나타나서 노략질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살려보내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보복을 하면 덕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수군만호에 불을 질러 버릴 것이다. 목숨은 살려줄테니 가서 대장에게 말하거라. 덕도를 쳐 들어오면 모두 불쏘시개가 될 거라고.”
이소사가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수군들을 둘러싸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던 마을 장정들이 물러섰다. 수졸들은 엉금엉금 기어서 관선으로 올라갔다. 장정들이 관선을 밀어냈다.
관선의 돛이 팽팽하게 열리며 서서히 덕도를 빠져 나가자 이소사의 남편인 김양문이 마을 사람들에게 조용히 외쳤다.
“다시 풍어제를 지내도록 합시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잡은 것을 빼앗기지 말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쇠잡이가 꽹! 하며 신호를 보내자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덕도의 앞바다에 달빛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인한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 이소사 곁으로 다가갔다.
“몸을 피하시오. 내일이라도 수군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이 근동의 섬으로 피해야 하오. 아니,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단 말이오. 아녀자의 몸으로 잡혀가면 살아나오기 힘드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오.”
이인한의 목소리를 풍물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승리감에 취해서 풍어를 기리는 제를 다시 올리고 바다를 향해 힘껏 풍악을 울려댔다. 윤범식이 김양문을 찾았다.
“내 이런 일이 오고야 말 거라고 생각했소. 안 사람이 패기가 넘치니 물불 안 가리고 수졸들을 혼을 냈으니 뒷감당을 해야하기 않겠소. 빨리 부인을 데리고 피하시오. 배는 내가 내어 주리라.”
그러자 뒷전에서 묵묵히 구경을 하고 있던 성도가 아버지를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아버님, 이 분들을 제가 솔섬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바위 틈에 오두막도 있고 샘물도 있으니 당분간은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찾지 않는 한 밖에서는 오두막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성도는 이미 인근의 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노를 젓는 법을 익히자마자 섬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이 오늘 밤에서는 수졸들을 혼구멍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소사가 그 일을 대신해 주니 속이 후련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장 내일부터 아마 보복이 시작될 터인즉 빨리 손을 쓰도록 합시다. 내가 장정들을 모아서 회령진성을 쳐들어가서 화승총과 화약을 빼앗아 오겠소. 거사를 치르기 전에 무기부터 갖추려고 했소이다.”
이인한은 이소사를 바라보며 김양문에게 빨리 떠날 준비를 차리라고 했다. 저벅저벅 골목길이 부산해지며 김양문과 이소사가 사라졌다. 성도도 재빨리 집으로 달려가서 솜두루마기를 입고 내려왔다.
달빛은 여전히 바다 위로 쏟아지고 저 멀리에는 수군들의 배가 떠 있었다. 성도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라도 몇 장 떠 있어야 솔섬으로 가는 길을 가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밤하늘엔 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대낮같은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서둘러라. 수군들이 출발을 했으니 소식을 전해 들으면 오늘 밤에라도 쳐들어올 게야. 저기 떠 있는 배들이 모두 관선이지 않더냐?”
윤범식은 뱃전으로 올라가서 노를 꺼냈다. 성도가 노를 잡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뱃전에 앉아서 노를 잡았다.
“다행히 바람이 세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밀려가진 않겠구나.”
보따리를 든 이소사와 김양문이 후다닥 윤범식의 배로 뛰어 올라갔다. 마을 사람들은 풍물에 젖어서 윤범식의 배가 포구를 떠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인한만 팔짱을 끼고 무거운 표정으로 밤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소사의 단정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말수가 적은 김양문의 뒷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잔바람이 출렁이는 바다로 배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점점 높아져 가는 풍물소리에 노 젓는 소리는 묻혀 갔다.
다시 포구로 들어오는 배가 한 척 있었다. 장정들은 모두 긴장하여 새로 들어온 배로 몰려갔다.
“이 밤중에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장정 한 사람이 새로 들어온 배를 향해 외쳤다. 배에는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타고 있었다.
“우린 저 앞 섬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인한은 벌떡 일어나 뱃전으로 달려갔다. 달빛 아래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맞으며 이인한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솟아 올랐다.
솔섬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며칠간 망을 보느라 바위 굴에 숨어 있었던 이소사와 남편은 바다에서 별 기척이 없자 아침 저녁으로 슬슬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바다에 배가 한 척도 뜨지 않는 날이 되면 두 사람은 양지바른 곳을 찾아 오래도록 심고를 드렸다. 바위틈으로 비쭉이 쑥이 새싹을 내밀고 바람도 매운 기색이 가시고 살갗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어디 멀리 떠나야 하지 않겠소? 관졸들이 우릴 잡으려고 한다면 이곳이야 금방 눈에 띄는 곳이오. 마을 사람들이 알려주기만 하면 우리는 그냥 발각이 되고 말 것이오.”
김양문은 이소사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벌써 며칠째 같은 질문을 해대도 이소사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쪽을 진 머리에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꼭 닫힌 입술로 생각에 젖어 있기만 했다. 김양문은 말이 없는 아내의 표정을 살피다가 가만히 주문 13자를 외우기 시작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그러자 이소사와 혼인말이 오가던 시절이 떠 올랐다. 영특하고 무예가 뛰어나다는 연지리의 이연하아가씨에 대한 소문은 인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인한이 덕도를 드나들 때부터 총각들은 어떻게든 이인한에게 잘 보여서 이연하와 혼인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러나 감히 그 댁에다 중매장이를 넣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김양문은 연하아가씨를 한번만이라도 보는 게 소원이어서 이인한에게 도인이 되겠다고 선언을 했다.
연지리에 사는 미모의 아가씨가 도인의 딸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말을 타고 무술을 익힌다는 그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김양문은 입도식을 마치고 마땅해 하지 않는 부친을 설득하여 중매장이를 보내게 했다. 이소사는 김양문이 공을 들이고 들여서 얻은 배필이었다.
“하늘의 기운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져 옵니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당신과 제가 부부 연으로 만나서 짧은 시간을 보냈지요. 이 섬에서의 생활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방님은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이소사가 넘실대는 파도를 내려다 보며 김양문에게 입을 열었다. 김양문은 황급히 이소사의 손목을 잡으며 애원했다.
“무슨 말이오? 이렇게 함께 있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여기에서 마지막이라니 난 그렇게 할 수 없소. 선비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조용히 식솔을 지키는 것도 도리라고 생각하오. 반드시 싸움터에 나가서 싸워야만 나라를 사랑하는게 아니란 말이오.”
김양문이 이소사의 어깨를 두 손으로 흔들며 무어라 대꾸하려고 한 입술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집안에서야 모셔야할 어른들이 층층히 계셔서 부인께 내 맘을 전할 수가 없었소. 지금 비록 쫓기는 처지이지만 단둘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 나랏일은 잠시 놓아두고 지금 이 시간을 잘 보내도록 합시다.”
이소사는 맑은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벌써 며칠째 바위틈새에 띠풀을 깔고 자야 했고, 밥을 지을 수가 없어서 가지고 온 쌀을 씹어서 먹어야 했건만 남편은 이소사를 탓하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수군들을 발길질로 날려 버리고 쫓기는 몸이 되었으니 남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기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김양문은 도리질을 하며 이소사에게 속삭였다.
“설령 거사가 시작된다고 해도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나선 안되오. 어떻게 맺은 인연인데 우리가 헤어진단 말이오. 당신이 가는 곳이면 나도 함께 가겠소. 지금 여기에 온 것처럼 말이오.”
이소사는 김양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섬마을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바람이 돌고 있었다. 이소사와 김양문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둘은 손을 잡고 섬 기슭을 천천히 돌았다. 섬은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바위틈에서는 맑은 샘물이 흘렀고 양지바른 곳에는 동백숲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해안가로 내려가지 바위마다 고동들이 붙어 있었고 찰박찰박 물이 차 있는 틈새에는 주먹만한 소라와 해삼들도 떠다녔다. 두 사람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닷물로 들어가서 갯것들을 잡기 시작했다.
“하하 부인의 생각이 언제나 앞서니 나는 따라가기가 힘드오. 그렇지만 부지런히 수련을 해서 나도 도인들이 느끼는 바를 하루 빨리 깨치도록 하겠소.”
김양문은 찰박거리는 물살을 피하며 손에 잡히는 파래를 뜯기 시작했다. 때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이소사의 붉은 뺨 위로 번지고 있었다. 이소사는 허리를 세우고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렇게 하옵서소. 그런데 저는 거사가 닥치면 분연코 일어나 싸움터로 향할 것이옵니다.”
김양문의 이소사의 볼에 흐르는 결기를 느끼며 갑자기 한기가 닥쳤다. 이소사를 잡을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김양문은 두 손에 들고 있던 파래뭉치를 바다에 버리고 저벅저벅 땅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솔섬을 향해 달려오는 두 대의 관선이 보였다. 김양문은 다시 후다닥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이소사의 손을 잡아 끌며 소리쳤다.
“포졸들이 들이닥치고 있소. 빨리 피합시다.”
둘을 재빨리 바위 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 화로를 들어서 바닷속에 집어 넣었다. 푸지직 연기를 내품으며 화로가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굴 바닥에 깔아 놓은 띠풀로 짠 돗자리를 들고 둘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이르자 사람 한 몸을 숨길만한 공간이 나왔다. 둘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심고를 올렸다.
수군들은 이소사와 김양문이 이미 말을 타고 대처로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연지리 친정에도 이소사는 머물지 않았고 마땅히 찾아갈 친척도 없어 보였다. 관졸들은 이리저리 이소사가 숨을 만한 곳을 탐색하고 다녔다.
인근의 섬에는 빽빽이 들어찬 동백숲 때문에 사람이 숨어 들어갈만한 곳이 많았다. 관졸들에게는 섬이란 참으로 성가신 곳이었다. 한번 숨기만 하면 사람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곳이 기 때문이었다. 가파른 바위 틈새나 우거진 나무숲에는 숨은 사람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날마다 섬을 지키며 불을 피우는지 살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숨어 있는 사람들은 낮에 불을 피우지 않았다. 달도 없는 아주 깜깜한 밤에만 불을 피우고 불씨를 살려서 화롯불을 이어나가게 마련이었다.
수군의 배들은 커다란 바위에 닻을 감아 놓고 섬으로 기어 올랐다. 아직 봄바람이 살랑거린다고 해도 바닷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네 명의 수군들은 섬 꼭대기로 올라가서 이곳저곳을 살피었다. 거친 바위로 둘러싸인 섬에는 사람이 숨을만한 곳은 동백숲 밖에 없었다.
“저 숲에 숨어 있을 수도 있어.”
“아닐세, 저 숲에는 아무리 봐도 물이 없어 보이네. 물이 없는 곳에 사람이 오랫동안 숨을 수는 없는 노릇일세.”
수군 포졸들이 서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동백숲으로 향하였다. 동백나무에는 붉은 동백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었다. 매캐한 동백향기에 취한 포졸들이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버렸다.
“아니 이소사라는 여자는 어쩌자고 관졸들을 괴롭힌 거야? 여자가 그렇게 사나우면 그 남편은 어찌 살까?”
얼굴에 마마자국이 가득 찬 포졸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어이, 자네는 그 자리에 없었구만. 그 여자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었어. 오랫동안 훈련을 한 몸이지 보통 아녀자의 몸이 아니라네. 우리들이 꼼짝도 못하고 당한 걸. 아이고, 아직도 옆구리가 아프네 그래. 내가 풍어제때 차린 말린 낙지찜좀 빼앗아 먹으려고 이소사에게 발길질을 당했지 뭔가.”
늙수구레한 포졸이 옆구리를 내밀며 하소연을 했다.
“그 여자는 절세의 미인이라고 하던데 미인에게 맞은 것이 영광이지 왠 푸념인가? 나도 그런 미인에게 한번 맞아 보았으면 좋겠네.”
마마자국 포졸이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봄바다는 한껏 푸르렀다. 넘실대는 파도를 내려다 보며 나이 든 포졸이 넋두리를 퍼부었다.
“맞은 것도 분한데 이제는 찾으러 다니는 것도 힘드네 그려. 아무래도 여긴 아닌 듯 하니 돌아가세. 날도 슬슬 풀렸으니 저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그물질 하는 배에서 고기나 몇 마리 빼앗아서 회 쳐 먹으면 딱 좋겠네. 이 동백숲에 숨을 데가 어디 있겠나?”
“글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누가 이 솔섬으로 이소사가 들어왔다고 귀뜸을 해주었나?”
그러자 한쪽에서 여기저기 섬을 둘러보고 있던 포졸 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그런 소리 말게. 내가 그날 대장에게 얼마나 혼이 난 줄 모르나. 얼마나 모자라서 아녀자에게 맞고 들어왔냐고 밤새 매질을 당했네. 난 그냥 못 돌아가네. 꼭 이소사를 잡아야 하네. 아마 이 섬에 있을 것이네. 내가 화약 두 꾸러미를 주고 덕도사람을 매수해서 얻어낸 소식이야. 이소사는 남편과 함께 이 섬으로 도망을 쳤다고 하네. 아무도 몰래 밤중에 이소사에게 곡식을 대주는 섬사람들이 있다고 했다네.”
세 명의 포졸들이 입을 좌악 벌리었다. 그들은 이 작은 섬에 이소사가 숨을 만한 곳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줄기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 숲에 있는 모든 나무들을 타고 올라가서 살펴야 겠구먼.”
“허허, 여기 동백나무가 몇 그루나 되게 보이는가? 수백 그루일세. 우리 넷이서 나눠서 올라간다고 해도 한 나절은 걸리겠네. 그런데 물도 가지고 오지 않고 주먹밥도 없이 한 나절동안 이 섬을 뒤지자는 말인가?”
마마자국이 난 포졸이 화가 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포도대장이 벌떡 일어나 차고 있는 칼을 빼서 허공에 쩡! 소리가 나게 휘두르며 대답을 했다.
“이소사를 잡아 가지 않으면 내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네. 잔소리 말고 동서남북으로 나눠서 나뭇가지를 살피도록 하세.”
세 명의 포졸들이 엉덩이를 들며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대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방향을 틀며 동백나무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소사, 기다려라. 이제 독 안에 든 쥐이다.”
포졸 대장은 잔가지가 잔뜩 퍼져 있는 고목나무부터 샅샅이 나뭇가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소사 내외가 솔섬으로 떠난 후 덕도에는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이소사에게 걷어 채인 수졸이 병사를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김양문과 이소사가 이미 도피했다는 것을 알고 김양문을 아버지를 잡아 갔다. 그리고 김양문이 있는 곳을 대라고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쉰 살이 넘은 김양문의 아버지는 수졸들의 매질에 못 이겨서 산 송장이 되어 종에 등에 업혀 왔다.
덕도 사람들은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모두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밤중에 살금살금 장독에 특효라는 똥물을 거두어서 김양문의 집 앞 대문가에 두고 가곤 했다. 이소사의 시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타들어가는 입술에 맑은 똥물을 흘러 넣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치자를 밀가루에 개서 장독이 난 허벅지에 바르고 손발을 주물렀다.
“도인들은 목숨을 부지 하기 어려우니 어서 피하라.”
김양문의 아버지는 꿈 속에서도 어서 도망을 가라고 외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자지러지곤 했다. 마을 사람은 담 밖으로 전해오는 소식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누구도 관졸들의 눈에 낫다가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소사는 수졸들을 때려 엎었으니 우환을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이소사를 찾지 못한 수졸들이 차례로 도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거의 날마다 회령진성에서 나오는 수졸들이 두어 명씩 덕도에 들렸다. 그리고 도인이라고 의심되는 집에 들려서 온갖 까탈을 부리며 쓸만한 것을 거두어 갔다.
“저 악독한 수졸들을 혼을 내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인들끼리 모여서 덕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서 바다에다 처박아 버려야 겠어요.”
윤범식은 포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궁리에 젖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수졸 두어 명을 수장을 시켜 버릴 계획이었다. 그러면 제 목숨이 아까워서도 덕도에 들어오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낌새를 알아챘는지 윤범식도 수군만호로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덕도에서 도인들을 모아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잔당들을 조직하고 있다는 죄목이었다.
윤범식은 소리 없이 동백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동백숲은 밖에서 보아서는 사람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린 아들 성도를 재빨리 큰 집으로 보내고 숲에 숨어서 망을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인한을 찾아가서 이 사태를 의논하고 싶었지만 그는 말을 타지 못했다. 걸어서 연지리까지 가려면 꼬박 이틀이 걸리는 먼 거리였고 그 사이에 포졸들의 눈에 뜨여서 잡혀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수졸들은 거의 날마다 덕도에 들이닥치며 윤범식을 찾아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덕도 접주 윤범식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도인들을 모두 색출해 내겠노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윤범식이 이소사처럼 어디론가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했다. 바다는 숨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줄줄이 늘어선 섬들 어디에 사람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인한이 덕도에 들어왔다. 그날 밤은 덕도의 도인들이 모두 윤범식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 2월의 초생달이 희미하게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이인한이 도인들에게 위엄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회령진성에는 수군들이 구비해 놓은 무기들이 아주 많이 쌓여 있소. 화승총과 화약이 무기고에 가득 들어 있을 것이오. 다행히 수군들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그들을 바다로 유인한 후에 무기들을 빼앗아 오기로 합시다.”
이인한은 확신에 차서 무리를 향해 외쳤다. 도인들의 마음은 단박에 희망에 차 올랐다.
“그들은 화승총을 들고 있고 저희들이야 고작 죽창 몇 개뿐인데 이길 수 있을까요?”
윤범식은 김양문의 아버지가 초주검이 되어서 돌아온 이야기를 전했다.
“그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들어온 것이오. 염려는 마시오. 우리에게도 미리 준비한 화승총이 수십 그루 있습니다. 내 그것을 나눠 드릴터이니 오늘 밤에는 동백숲으로 들어가서 훈련을 하도록 합시다.”
스무 명이 넘는 도인들이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동백숲으로 들어갔다. 이인한은 이미 동백숲에 숨겨 놓은 화승총을 풀어서 총을 쏘는 연습을 시켰다.
“내일 회진으로 가서 수군만호을 덮칠 것이오. 함께 갈 사람들은 나룻배를 건너서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그러면 두어 필의 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이인한은 좌중을 둘러 보며 위엄있게 말을 건넸다. 몇 사람이 따라가겠노라고 손을 들었다. 이인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였다. 안개가 칠흑처럼 찾아들어서 오후부터 눈 앞에 떠 있는 섬조차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이인한은 윤범식에게 배를 타고 회령진성 앞에 가서 포를 쏘라고 했다. 윤범식은 덕도의 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안개 속으로 익숙하게 배를 몰았다. 수십 년동안 배를 몰고 고기를 잡고 살아온 그에게 회령진 앞바다는 자기 손바닥처럼 훤히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수군만호 앞에서 정면으로 포를 쏘아 올렸다. 만호의 처마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놀란 수군들이 토끼몰이를 당하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이 관사로 옮겨 붙자 안개 속으로 바다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관선에 올라서 바다로 배를 몰아갔다. 배는 안개 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어디로 나아갈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수군만호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인한은 장정 다섯 명을 데리고 익숙하게 무기고를 털었다. 이미 준비해 간 화약으로 자물쇠를 터뜨리고 창고에 그득히 들어 있는 화약을 꺼내 말에 실었다. 그리고 단단히 묶어둔 화승총 자루를 풀어서 장정들에게 나눠 들게 하였다. 미리 준비해 놓은 여남은 필의 말이 휘이잉 울음 소리를 냈다.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에서 이뤄졌다. 보이지 않는 속에서 장정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알아차리며 신속하게 무기들을 말에 옮겼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기 전에 무기를 숨기기 위해서 죽는 힘을 다해서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못 나온다는 수군 만호가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몰랐습니다.”
윤범식이 수군들의 배를 따돌리고 무기를 받으려고 산굽이를 돌아 외딴 포구에 다다라 있었다. 축축한 안개 속에서 횃불을 들고 달려온 도인들이 윤범식의 배에다 무기를 옮겨 실었다.
“덕도는 위험하니 정남진으로 갑시다. 정남진에 무기를 내려 주면 육로를 통해 천관산 동굴에 보관하도록 하겠소. 거사를 위해서는 중간 지역이 무기를 숨기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오.”
그들은 밤새 작업을 계속 했다. 윤범식이 익숙한 솜씨로 방향을 잡고 정남진을 향해 노를 저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게 칙칙한 안개가 바다를 덮고 있었지만 윤범식은 육감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날이 새면 수군 만호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오. 무기를 잃어버렸으니 만호장은 이제 목이 건질 수가 없을 걸.”
윤범식이 어둠 속에서 껄껄 웃어제꼈다. 수졸들은 자신을 잡아 갔더라면 지금쯤 고기밥이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동백숲에 숨어들어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 때를 만난 것이었다.
천관산 기슭에 무기들을 숨기고 나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인한은 연지리를 내려다 보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덕도의 도인들에게 천관산의 맑은 물을 떠서 건넸다.
“이제 시작이오. 싸움이란 작전이 중요하오. 수군들에게 당하지 말고 수군들을 몰아낼 궁리를 해야한단 말이오. 언제까지 당하고 있어야 겠소?”
윤범식은 밤새 노질을 해서 뀅한 두 눈으로 이인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접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어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치면 관졸들을 몰아낼 일은 식은 죽 먹기군요.”
이인한은 말이 없었다. 똑 닫힌 두 입술, 날카로운 눈매에는 숱한 생각이 담겨 있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윤범식을 건너다 볼 뿐이었다.
“이게 사실이라고 믿어집니까?”
덕도의 도인들도 윤범식을 바라보며 무기를 쌓아둔 바윗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강한 결기가 흘러 내렸다. 이인한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거사를 치르기 위한 계획들이 세세하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윤범식은 더 이상 덕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인한을 바라보았다.
이인한이 회령진에서 무기들을 빼앗자 수군들은 당황했다. 만호는 무기를 잃어버린 죄가 무서워 굳이 이인한을 잡아들이지 못했다. 수졸들은 덕도에 쳐들어와서 도인이라고 의심이 되는 사람들은 한명씩 차례로 잡아가기 시작했다. 윤범식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회령진으로 잡혀간다는 소식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 했다. 빨리 덕도로 돌아가서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이인한은 윤범식을 천관산 깊은 골짜기에 숨겨 두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시냇물이 촬촬 불어 나면서 들녘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갔다. 춘궁기에 누렇게 뜬 백성들이 아직 설익은 보리를 베어다가 끼니를 떼웠다. 보리단 타는 냄새가 들판에 그득하게 퍼져 올랐다. 동네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대고 못자리를 돌보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인한도 연지리 앞 논을 갈아엎었다. 써레질을 하고 논둑을 새로 만들고 보리를 거둬들일 준비로 하루하루가 쉴 틈이 없었다. 이인한은 가솔들과 더불어 농삿일을 하다가도 천관산을 바라보며 길게 심호흡을 하곤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은 심상치 않았다. 고부에서 시작된 도인들의 항거는 이제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에 맞서서 동학군에 대한 탄압도 날로 극심해 지고 있었다. 급한 대로 낮에는 농삿일을 하고 밤이면 수십 리를 달려서 인근의 접주들을 만나서 주변의 소식을 들었다. 부안에서 정읍에서 전주에서 밀고 내려오는 동학군들의 세력이 날로 커져간다는 것은 이인한에게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이인한은 당장이라도 농삿일을 집어 치우고 장흥 들판을 달리며 도인들을 집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었다. 그는 솔섬에 있는 이소사를 한밤중에 데려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기별을 띄우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회령진 수군만호는 이인한에게 당한 수모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덕도의 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소사의 시아버지인 김노인은 다시 회령진으로 잡혀 들어갔다. 그는 포구에서 수군의 배를 타며 부인에게 당부를 했다.
“이번에는 살아오기가 힘들 것이오. 그러니 살기를 꾀하려면 멀리 섬으로 달아나도록 하시오. 아들 내외에게 반드시 이 소식을 전하길 바라오. 내가 며느리 대신 죽으러 간다오.”
김노인은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짧은 한 생애를 돌아보았다. 시절을 잘못 만났으니 사람을 탓해서 뭣 하랴! 이소사는 김양문에게 과분한 부인이었다. 일찍이 신학문을 받아 들인 이순홍이 애지중지 기른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이 너무나 이연하를 좋아하니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단 한번 뿐인 것을, 세월이란 지나고 나면 찰나에 불과하지 않던가? 김노인은 아들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며느리에게서 달덩이 같은 아들만 하나 얻는다면 자신이야 죽어도 한이 없는 인생이었다.
때마침 늙은 수졸은 이소사에게 걷어 채이고 나서 병을 앓다가 회복되어 다시 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며 김노인을 잡아가는 일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김노인의 상투를 잡고서 이리저리 흔들며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신 며느리가 그렇게 똑똑하오. 그런 며느리를 둔 값을 오늘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오.”
김노인은 모멸감으로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었다. 상것으로 살아오지도 않았고 덕도에서는 그래도 전답이 꽤 쏠쏠하게 많아서 종들을 거느리며 편안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일찍이 서당에 다니며 학문을 익혔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어서 일가친척들과 더불어 그만그만하게 살아가는 것이 생의 목표였건만 그마저도 누릴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며느리가 한 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동학은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함께 잘 살아가는 정신이랍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마음을 열면 누구나 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답니다.”
김노인은 눈을 질끈 감고 바람을 타고 달려가는 배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늦은 봄날, 바다에는 고기들이 활개를 칠텐데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이제는 어장질조차 할 수 없게 될 신세를 받아드려야 할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두고 저승길로 가야 할 시간. 그는 며느리에게 배운 심고를 올리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리라. 살고 죽는 것도 하늘의 뜻이러니 원망하지 말라’
그러나 한줄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그의 의식은 다시 못 볼 고향땅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뱃길을 따라 흘러갔다.
솔섬에 숨어 있던 김양문과 이소사는 한밤중, 동굴로 스며드는 노 젓는 소리에 후다닥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예감이 불길했다. 관군에게 숨어 있는 곳을 들켰거나 동네에 큰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았다. 이소사는 숨겨 놓은 화승총에 화약을 넣어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도 칼을 차고 총을 들고 살금살금 입구로 나갔다.
열사흘 달 아래로 비춘 것은 집에서 쓰고 있는 종선(從船)이었다. 큰 배가 포구에 닿지 못할 때 종선으로 물건을 나르곤 하였다. 이소사는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오?”
종선에서 몸종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서방님 큰 일 났습니다. 빨리 배에 오르십시오. 관아에 잡혀간 어르신이 목숨줄을 놓았다고 합니다.?”
“뭐라고?”
김양문은 바위굴에 우렁우렁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소리를 지르며 배가 채 바위에 닿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뱃전으로 기어 올라가서 이소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가서 초상을 치르겠소. 아버님이 우리 대신 돌아가신 거요. 부인은 여기에 머물던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시오.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부인은 뜻이 크게 있으니 반드시 이루도록 하시오.”
김양문은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내며 몸종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고 했다. 이소사도 바다에 몸을 던져 재빠르게 종선을 향해 헤엄을 쳤다. 뱃전에 이르니 김양문이 이소사의 손을 잡아서 배 안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저도 가야 되옵니다. 저 혼자 남아서 무슨 뜻을 이루겠습니다. 아버님이 이렇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 치졸한 관졸들이 제 대신 귀중한 생명을 한 명 빼앗아 가다니.”
이소사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해결되지 않을 울분이었다. 자기 때문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그러자고 동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지러지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뱃전을 부둥켜 안았다.
“서방님, 저는 떠나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집안 식구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 집에서 희생은 아버님 한 명으로 그쳐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세상을 개벽할 꿈을 키우며 자랐으니 산으로 올라가서 도인이 되겠습니다.”
이소사는 뱃전에서 남편에게 큰 절을 올렸다. 김양문은 어리둥절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지금 관아에 있다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아올 궁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건만 부인이 떠난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떠나더라도 초상이나 치르고 떠나도록 하시오.”
그러나 이소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니되옵니다. 아버님 초상을 치르기 위해서 우리가 관아에 나타나면 저들은 우리 둘을 모두 잡아들일 것입니다. 부디 서방님께서도 앞에 나서지 마시고 뒤에 숨어서 초상을 치르도록 하십시오.”
김양문은 이소사를 바라보며 침울하게 대꾸 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거사가 닥치면 당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은 이미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이번 일을 마무리 하고 떠나도록 하시오. 우선 아무도 모르게 동백숲에 숨어서 초상을 치르게 하겠소.”
김양문은 혀를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소사도 다시 정좌를 했다. 온몸에서 바닷물을 뚝뚝 흘러내렸다. 봄날이라지만 새벽 기운이 차가워 입술을 덜덜 떨리고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러나 이소사는 밤 하늘에 떠 있는 샛별을 보며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위기가 아닌 순간이 있으랴! 위기 속에서도 더욱 찬란한 빛을 찾아야 하리라.”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웠다. 뿌연 새벽안개 속에서 덕도가 눈에 들어왔다.
제3장 이인한 기포령을 올리다
“접주님, 저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인한이 천관산에서 윤범식을 만나고 내려오는 새벽, 한 마을에 사는 열네 살 최신동이 사립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아직 미성년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거라.”
이인한은 뺨에 분홍빛 기운이 흐르는 최신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올시다. 저도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접주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최신동의 가는 눈에는 벌써부터 각오가 들어 차 있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도인들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도 않는 애들더러 싸우라고 해서는 안 된단다. 싸움이란 스무 살이 넘은 사람만 해야 하는 일이지.”
“아니옵니다. 저는 접주의 재주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가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도 죽음 목숨이나 마찬가지이죠.”
이인한의 손을 붙들고 애원하는 최신동은 이미 몇 달 전부터 혼자 이인한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마을 앞 제각에 정좌를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어깨 너머로 익혀둔 동작을 몸으로 펼쳐 보이곤 했다. 지난 해에 환곡의 이자를 못 내서 잡혀가서 곤장질을 당하고 들어온 아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때마침 닥친 전염병으로 죽고 말자 어미마저 따라 죽어 버린 탓이었다. 한때 최신동은 정신을 잃고 부모의 묘가 있는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올해 들어서 눈빛이 가라앉으며 차분한 기색을 되찾았다.
“기다려 보거라,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이니 반드시 쓸모가 주어질 테니까.”
이인한은 최신동의 등을 두들겨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러나 최신동은 먹을 것을 보채는 어린 아이마냥 이인한을 가로 막으며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아니되옵니다, 접주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다시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때린 옥졸을 제 두 손을 목을 졸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아버님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저를 전투에 참가하게 해 주십시오.”
이인한은 여전히 표정 없는 목소리로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동학은 치사한 관졸들을 때려 눕히는 것이 목표가 아니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관졸들과 벼슬아치들, 욕심꾸러기 양반들이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 말이야.”
최신동이 이인한의 손을 잡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안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저렇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벼슬아치들과 나누며 살라고요? 저들은 모두 탐진강에 쳐 박아야 한다고요.”
최신동은 눈앞에 관졸들이 늘어선 있는 양 소리를 치며 날 뛰고 입가에 허연 거품을 물었다. 이인한은 최신동의 분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이인한은 최신동을 말에 태웠다. 그리고 채찍을 휘두르며 연지리를 빠져 나갔다.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자, 가자!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노라.”
들판에는 가을이 오고 있었다. 누릇누릇 익어가는 벼이삭들이 살랑거렸다. 더위도 가시고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하루하루가 달랐다. 윗녘에서는 이미 관군들과 전투가 시작되었고, 해남과 장흥에도 특별 군대가 파견되어서 동학군을 잡아들일 준비를 착착 해 오고 있었다.
이이한은 삼십 리 길을 달려서 장녕성 아래로 갔다. 그리고 최신동에게 네 개의 문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부사의 목을 칠 것이다. 너의 각오가 그러하다면 너는 부사의 목을 칠 수 있겠느냐?”
최신동이 깜짝 놀라 자기의 목을 잡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쳐 댔다.
“저에게 시켜주시기만 한다면 아비의 원수를 기꺼이 처단하겠습니다.”
최신동은 장녕성의 곳곳을 올려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인한의 장녕성의 지세를 꼼꼼하게 살폈다. 탐진강으로 이어지는 동문과 서쪽 산으로 이어지는 서문, 그리고 평평한 남문은 아마 민보군이 지키게 되리라.
“우리의 적은 관군만이 아니란다.”
이인한은 바위산으로 덮인 동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성 밖에서는 민보군과 보부상이 우리들을 공격할 거야. 이미 민보군도 세력을 우리만큼 넓히고 있으니 그들이 관군보다 더 강한 적일 수도 있다.”
최신동은 이인한의 하는 소리를 마치 다 알아듣는 양 묵묵히 성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이인한에게 물었다.
“정령 싸울 마음이 있다면 먼저 싸움터를 둘러 보아야 한다. 어디로 공격을 해야할지 물러날 때는 어디로 피해야 하며, 적을 쫓아내기에 적합한 곳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느냐?”
최신동은 이인한의 말을 들으며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투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총알이 튀고 포가 터지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관군들을 모두 동문으로 쫓아서 탐진강으로 빠져 들어가게 할 참이었다.
동문은 바위투성이로 이어진 절벽이어서 관군들을 몰아넣기만 하면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질 방법밖에 없었다. 절벽 아래는 시퍼런 탐진강이 흘러 내렸다. 사람 깊이의 몇 배가 되는 깊이의 강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인한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건산으로 갔다. 건산을 지나면 강진읍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지세를 따지자면 장녕성은 우리에게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강진성이나 병영성을 우리에게 불리할 수도 있어. 다만 구원군이 오기 전에 점령을 하면 식은 죽 먹기이지. 이미 회령진의 수졸들은 전투를 치를 수 없는 만큼 나약해져서 쥐방울 드나들 듯 남은 무기를 탈취할 수 있으니까 그 소문이 강진성인들 날아가지 않으리오만.”
이인한은 소리를 내어 껄껄 웃었다. 최신동은 이인한의 등 뒤에서 강진성과 병영성을 돌아보며 전투를 치를 날을 머릿속에 그리며 혼자 고함을 쳐 댔다.
이인한은 다시 말을 돌려 묵촌으로 들어갔다. 이방언이 묵촌의 느티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이인한을 맞이했다.
“대접주님, 기포령을 내리도록 합시다.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에게는 불리합니다. 전국의 도인들이 이미 들고 일어나서 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장흥에서도 빨리 날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방언은 수염을 내리 쓸으며 호방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이미 조직을 끝냈소. 빨리 다른 지역의 도인들에게 거사를 준비하도록 하시오.”
이인한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갑오년이 밝아오자마자 준비하기 시작한 거사는 이제 인원동원이 다 이뤄졌고 식량도 비축되었으며 무기도 마련되었다. 각 지역에서 참가할 도인의 숫자를 파악하고 진열대를 정비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방언은 이인한에게 평상에 앉도록 하고 멍석을 깔아 주었다. 그리고 이인한은 멍석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인한은 장흥의 산들을 멍석 위에 그리고 쓰윽 탐진강을 그리고 나서 지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서 도인들이 모이려면 일단 가을걷이가 끝나야 하오. 그리고 보름간의 말미를 줘서 섬마을에서도 배를 타고 포구를 건너서 산길을 넘어와야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미리 기별을 띄우도록 합시다.”
최신동은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서 이방언과 이인한이 머리를 맞대고 나누는 이야기를 정신을 팔고 들었다. 그에는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였지만 이인한이 자기를 데리고 온 것은 전투에 참가해줄 뜻이 있는 것이리라 여기며 홀로 실실 웃고 있었다.
남원집회 이후 전라도 남서부 일대에는 요소요소에 동학농민군 부대들이 혹은 운집하고 혹은 이동하며 고을고을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 전역을 통틀어서, 아니 어쩌면 전국을 통틀어서 동학농민군에게 목에 가시 같은 나주성이 인근에 있어서 이를 믿고 항거하는 몇몇 양반 중심의 민보군 부대도 만만찮게 세를 규합해 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본군과 관군이 곳곳에서 동학군을 대패시키며 남하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웅치면에 모인 수천 명의 동학군들은 머리에 황건을 쓰고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이미 전주성을 함락하고 내려온 외부의 동학군들도 함께 참석을 했고, 인근이 보성과 강진에서 들어온 도인들도 합세를 했다.
장흥부사 박헌영은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웅치면에 웅거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길로 병영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영은 병영대로 수성할 병력조차 태부족이니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박헌영은 일대의 양반사족들에게 민보군을 장흥성으로 보내라는 통문을 잇따라 내보냈다.
이인한은 11월 25일 고읍면에서 본격적인 기포령을 내렸다. 발호하는 민보군을 제압하고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봉준, 김개남 대접주 등도 지원해야 할 형편이었다. 한편으로는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서진하며 하동을 지나 전라도를 넘본다는 소식도 전해져 왔다.
이인한의 부대의 기세는 더 장렬했다. 장흥만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섬에서 올라온 동학군들만 수천 명이었다. 도인들은 머리에 황명주 수건을 두르고 무릎에도 황명주 수건을 둘렀다. 들판에 온통 노란 꽃이 피어난 듯 황색깃발이 휘날렸다.
대장기 아래 청수를 모시고 이인한의 고래 같은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자 수만의 도인들이 주문을 세우기 시작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구름떼 같은 도인들이 주문을 세 번 외우자 흙먼지가 하늘로 오르며 강산초목이 흔들렸다. 대흥면의 넓은 들판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이미 천관산을 훌쩍 넘어 먼 바다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인한의 주도아래 심고를 올리고 나자 긴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인들은 네 곳으로 나뉘어서 동서남북을 가르며 진군을 시작했다. 이인한 진영에서 나팔을 불어대자 동쪽에서, 서쪽에서 차례로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거대한 산맥이 흐르듯이 도인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이인한이 말을 타고 제일 앞에서 진군을 지휘했고 최신동 역시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대흥면을 한 바퀴 돌고 곧바로 회령진성으로 향했다. 황색 두건을 쓰고 황색 천을 무릎에 두르고 깃발을 흔들며 진군하는 모습은 수만의 새떼들이 들판을 건너는 모양인 양 웅장하고 끝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회령진성으로 들어가자 만호는 벌써 도망을 가고 없었다. 예전에는 회령진을 지키는 수군들이 400여 명 있었으나 지금은 관리 몇 명이 무기고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인한은 회령진 무기고를 열고 하나도 남김없이 무기를 탈취해 버렸다. 대포와 화승총과 화약 등의 무기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무기를 훔친 대열은 사기가 출중해서 대흥면에 모여서 돼지를 잡고 장기자랑을 펼쳤다. 풍악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마을마을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도인들을 구경했다.
이인한의 기세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장흥 부사 박헌양은 대흥면의 기포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장흥의 도인들이라고 해야 고작 관군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웅치의 도인들을 잡아들일 일로 이미 혼이 반이나 나가 있었는데 대흥면의 소식은 그에게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는 병영성에 또다시 사신을 보냈다. 동비들이 장흥성을 공격할 것 같으니 원조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병영성에서는 답이 없었다. 씁쓸한 분노가 치솟으며 애써 장흥부사 자리를 회피하고 충청도 부사로 가 버린 박제순이 원망스러웠다.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우직함을 탓했다. 아무도 차지하려고 하지 않는 장흥부사의 자리를 덥석 문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헌양 부사는 떳떳하게 싸우다 죽으리라 각오를 했다. 성을 내주고 도망을 치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비록 유학을 통해서 관직에 들어왔으나 비겁한 도피를 할 수는 없었다. 이인한은 제일 먼저 벽사역을 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이방언에게 제안을 했다.
“벽사역 역졸들은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용태 부사의 명령 아래 백성들이 재산을 빼앗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더 참혹한 것은 부녀자들을 강간한 것입니다. 그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어 이용태의 만행을 경고해야 합니다.”
이방언은 두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한번 까닥일 뿐이었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이방언을 따라다니는 구교철이 입을 열었다.
“벽사역을 사면에서 포위해야 합니다. 첫 전투이니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을 물론이지요. 건산의 모정등에는 이인한 접주께서 주둔하고 김방서 접주가 벽사역 뒤의 평원에 진을 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행원 앞 평원에는 부사면의 접주이신 이사경 접주가 맡아야 합니다. 저는 모정에서 이인한접주를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언 대접주님께서는 동쪽의 평화 송정등에 주둔하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러자 이방언이 껄껄 웃음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평화는 고씨들이 사는 마을로 이미 군량미를 대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나는 송정등으로 정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무고한 백성들은 죽이지 않도록 미리 도망을 하라고 해야 한다.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것은 동학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니 각별히 조심을 해야 되지 않겠나?”
이인한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벽사역을 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그는 몸집이 큰 사람들을 모아서 기수를 시켰다. 백 명에 한 개씩 대장기를 나눠 주며 기수에게 흔들며 걷도록 했다. 그리고 구국항왜(救國抗倭),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깃발을 만들었다.
그가 기포령을 내리고 수만의 도인들과 회령진성을 점령하고 대흥면으로 돌아오자 이소사와 최신동도 대열에 함께 끼여 있었다. 그는 이소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여기는 아녀자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싸움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지요. 집으로 돌아가서 도인들을 넓히는데 노력을 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소사는 고개를 저었다.
“동학에는 남녀 차별이 없다고 했으면서 여자에게 전투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저도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인한은 당당하게 말을 타고 나타난 이소사를 보며 당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신동도 마찬가지였다.
“접주님, 저도 전투에 나가도록 해 주십시오.”
“아니다. 너는 아직 어려. 전투는 스무 살이 넘어야 참가할 수 있어. 아직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으면 안 되지. 멀리서 구경만 하도록 해라.”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싸우도록 해주십시오.”
이인한은 이소사도 최신동도 전투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쉬운 듯 후방에 남아서 전투를 지켜보기로 했다.
드디어 12월 4일 도인들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미 3일에 맡은 바 지역에 진을 친 도인들은 아침 7시가 되자 벽사역을 포위하고 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방언이 이인한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들은 2천 명 정도이나 무장도 하지 않았고 이미 고부군에 가서 지은 죄 때문에 잔뜩 얼어 있으니 도인들을 많이 동원할 필요가 없소. 원한이 맺힌 사람들만 자원해서 공격에 나서도록 하시오.”
이인한은 이방언의 지시에 따라서 급히 네 곳에 통문을 보냈다.
‘각 지역의 공격수들은 자원해서 3백 명만 나오도록 하라.’
진시(辰時)가 되자 건산을 출발한 이인한 부대는 벽사역 전방에서 길게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포탄이 쏟아졌다. 성으로 에워싸지 못하고 평원에 자리하고 있는 벽사역으로 불꽃으로 날아들었다.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튀었다. 벽사역에 있는 관사들이 포탄에 맞아서 불에 타기 시작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역졸을 이리 튀고 저리 튀어서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농민군에게 잡혔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소문으로 들은 터였다. 찰방 김일원도 어젯밤부터 벽을 포위하며 진을 치는 농민군들에게 겁을 먹고 아침이 밝자마자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며 역을 빠져 나가 버렸다.
역졸들은 이미 고삐가 풀린 망아지였다. 그들은 들판을 향해 뛰었고 탐진강을 건너서 장녕성의 앞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백성들은 모두 역사(驛舍)를 빠져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방언은 화염에 쌓인 여염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염려 마십시오. 민가를 태울 작정은 아니었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만 불길이 옮겨진 것입니다. 이미 역사 주변의 백성들은 400여 호가 모두 피난을 갔습니다.”
말을 타고 나타난 최신동이 소식을 전했다. 허공으로 희뿌연 재가 날아올랐다. 벽 주변의 건물들은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성난 도인들이 벽사역으로 뛰어갔다.
“고부에서 이용태에게 당한 백성들이옵니다. 저들의 가족들이 역졸들에게 죽임을 당했지요. 저들의 분노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천여 명의 도인들이 벽사역을 습격하고 이미 타 버린 관사를 뒤지며 주변에 숨어 있는 관리들의 가족을 찾아서 보복을 가하고 있었다. 이방언은 뜨거운 숨을 내리쉬었다. 비록 탐관오리들을 척결해야 하지만 가족에게까지 보복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쫓기는 역졸들의 고함 소리와 쫓아가는 도인들의 함성이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장흥 부사 박헌양은 동문에 서서 벽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녕성은 산 위에 있어서 평지에 있는 벽사역이 손바닥처럼 다 보였다. 이리저리 콩을 볶아 대듯 터지는 대포소리와 역졸들이 도망을 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또다시 병영의 병마절도사에게 분노를 느꼈다.
제4장 비와 구름을 몰고 온 여인
“꽝! 꽈아아앙!”
흐린 하늘로 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탐진강가에서 장녕성을 향해 서 있던 도인들이 함성을 지른다. 이미 전날 벽사역에서 승리를 맛본 도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하룻밤 사이에 여름 장맛비처럼 불어난 도인들의 숫자를 눈으로 헤아려 보며 이소사는 말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최신동이 행렬의 맨 앞에서 나팔을 불었다. 나팔소리가 고요하던 장안으로 울려 퍼지며 성 주변의 사람들을 깨웠다. 도인들은 일제히 장녕성을 향해 전진했다.
가파른 산자락을 타고 올라야 하는 남문 공략은 이방언 대접주가 맡았고, 탐진강 줄기에서 올라오는 동문을 향하는 동학군은 이인한 대접주가 지휘하고 있었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홍조를 띤 볼, 형형한 눈빛의 젊은 여인, 이소사가 이끄는 농민군은 북문을 치기로 하였다. 동문 앞에는 이미 보부상들과 민보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동문으로는 구교철과 이사경이 민보군의 뒤에서 공격을 하기로 했다.
벽사역 쪽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다시 짙어졌다. 누군가 새로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매캐한 냄새가 고을을 덮었다. 어제부터 타던 가옥들도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었다. 연기는 안개와 섞여서 이상야릇한 기운을 자아냈다. 동학군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서 접을 이름을 대며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안개가 좀 더 농밀하게 밀려들면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것은 동학군들에게 불리한 것인지 유리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말을 타고 장녕성 전투에 전면으로 나선 이소사는 젊고 예뻤다. 게다가 신기(神氣)까지 지녔다고 하니 이미 도인들 사이에서 이소사에 대한 소문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도인들은 이소사의 지휘를 받으며 새로운 기운이 차올랐다.
이소사는 말 위에서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동문에서 남문에서 서문에서도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추어 도인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장녕성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보따리를 들고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앞으로, 앞으로 나가라! 이제 우리에게 오는 것은 한울님의 세상, 살아있는 생명들이 존중받는 새 세상이 열린다!”
“켄지켄지 켄지켄!”
“두우웅 두우웅!”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신호음으로 떠오르자 북소리가 뒤를 따르며 도인들이 장녕성 성문을 부스고 있었다. 서쪽에서 내려오던 동학군들은 산에서 성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맹수처럼 외쳤다.
“한울님의 새 세상이 열린다. 장흥 부사 박헌양을 죽여라.”
긴 여운을 끌며 징이 울렸다. 지잉징 울려대는 그 소리가 자꾸만 농민군을 자극했다. 북소리가 이어지고 잔바람 같은 장구소리도 급하게 다가왔다. 이소사는 말 위에서 북문을 바라보았다. 관군들과 민보군까지 성곽에 빽빽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늘 해는 뜨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미 동이 틀 시간이 지났는데도 하늘은 몹시 흐렸다. 이소사는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관군과 민보군들은 옷차림이 달라서 어둠 속에서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징소리가 급하게 몰아쳤다. 서둘러야 했다. 전날 벽사역을 점령했을 때 역전을 지키는 찰방은 도망을 가고 없었다. 찰방 김일원이 강진 병영에 구원을 요청하러 떠났다는 소문이 이미 농민군에게 알려졌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성을 점령해야 했다.
“앞으로!”
그녀는 소리 높이 외쳤고, 벽력 소리가 나더니 화포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성안으로 떨어졌다. 성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북문으로 다가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미 동학군들은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성벽을 기어서 성안으로 진입한 터였다. 서쪽 산으로 이동을 하는 동학군들이 줄을 이었다.
새벽안개 속에서 장흥부사 박헌양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는 으스스 온몸을 떨며 스멀스멀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을 털어 버리려 애썼다. 어제 벽사역이 농민군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그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다만 한번 죽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만 명이 넘은 농민군이라 할지라도 장녕성은 천연요새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서 평지에서 올라오는 동문만 막아내면 수성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문은 담벼락에 붙어 있어서 쉽게 드나들 곳이 못 되었다. 민보군과 보부상을 보강하였으니 성문 세 개를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동학군이 득실거리는 나주성도 아직 함락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승산은 있었다.
그는 밤새 작전을 짰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벽사역에서 도망 온 관군이 수십 명, 성을 지키는 수성군이 기백 명은 되었다. 무기 창고에 들어 있던 온갖 무기들을 꺼내서 관군에게 지급을 마쳤다. 민보군에는 미리 무기를 전달했다. 수성군이 성안에서 공격을 하고 민보군과 보부상들이 성 밖에서 공격을 하면 저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한들 호락호락 당하기만 할 판국은 아니었다. 그는 성 안에 있는 돌들을 성곽으로 모아놓고 농민군들이 들이닥칠 때 가차 없이 돌멩이를 굴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제 도망 쳐 온 관군의 장교들은 그에게 싸우기보다는 피신하기를 강권하고 있었다. 동학군의 군세가 오합지졸은 아니며, 무엇보다 그 숫자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상황은 끝이 났다고 말했다. 농민군들과 싸워서 이긴 부사는 없다는 것이었다. 김원일 찰방은 전투를 준비하는 그를 비웃었다. 그는 찰방에게 말했다.
“벽사역을 지키는 관군은 불과 기백 명이었다. 장녕성 안의 우리 상황은 숫자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다. 민보군이 들어오고 보부상들도 협조를 하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이다. 벽사역과는 상황이 다르다.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벽사역을 지킬 방법은 없다. 어제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터이니 성에 모인 역졸들에게 다시 한 번 엄명을 전하라. 만약 역졸들의 신분으로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을 친다면 엄벌에 처하리라.”
그러나 찰방은 김일원은 고개를 저었다. 부사의 눈길을 피하며 슬그머니 외쳤다.
“나리, 빨리 상황 판단을 다시 하소서. 저들 또한 어제의 숫자가 아니올시다. 어제는 천 명이었는데 이미 강진과 보성, 해남에서 합세한 병력이 만여 명을 넘었다고 하옵니다. 기껏해야 천 명 될 동 말 동한 성안의 병력이 만 명을 당해낼 수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어제 강진병영에 군사요청을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주로 가서 청병을 하여 오겠습니다.”
찰방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박헌양은 어제 전투로 아들을 잃은 찰방이 안쓰러웠다. 그는 이미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아들까지 잃고서 장녕성에서 농민군들의 손에 죽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눈가에 두려움과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스스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적이 몇 만 명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음에서 이미 졌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사라지는 것이니라. 적들은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이고 역졸들은 이미 고부에서 농민군들을 진압한 경험이 있지 않으냐? 무장한 군인들이 어찌하여 싸우지도 않고 역을 내주었느냐?”
박헌양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찰방을 쏘아 보았다. 찰방은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사또, 사람의 생명이란 단 한 개뿐, 한번 죽으면 그만이요. 천 명으로 만 명을 당해낸다는 것을 새 발의 피입니다. 빨리 몸을 피하소서. 어제 벽사역이 허물어질 때 이미 장녕성도 사라진 셈입니다. 지원군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몰살당할 것입니다. 어서 도망을 가시고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일본군이 남하하고 있으니 지금 몸을 피했다가 세를 보아 다시 이곳으로 들어되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죽음을 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찰방의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부사는 김일원이 한없이 얄팍하다고 생각했다. 처자식을 버리고 제일 먼저 역을 빠져 나온 관리의 목을 베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군이 시급했다. 만여 명의 농민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천여 명의 관군으로는 끝끝내 감당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찰방에게 일렀다.
“그대가 보다시피 목숨이 경각에 달렸느니라. 빨리 말을 타고 나주로 가서 서찰을 전하라. 장녕성이 무너지면 적들은 이제 나주로 향할 것이다. 여기에서 저들을 막아내는 것이 나주 관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니 가서 원군과 함께 내려오라. 그것만이 찰방이 공을 세울 수 있는 길이다. 이미 벽사역을 지키지 못하고 내준 것은 조정에서 벌을 받아 마땅하나 장녕성을 지킬 구원군을 얻어 온다면 그 죄를 사하게 되리라.”
찰방은 뒤도 안 돌아보고 부사의 면전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곧 관복을 벗어던지고 솜저고리의 평복차림으로 성을 빠져 나갔다.
서쪽에서 산으로 들어오는 농민군의 함성이 들려왔다. 평지에서 장녕성으로 들어오자면 성문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성곽은 높고 튼튼해서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쪽 산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산에서 내려오는 동학군들에게는 오히려 안정적인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동학군들이 줄을 지어 성곽을 걸어서 성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부사는 동헌이 서서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갔다. 이제는 길이 없었다. 성벽을 헐어서 마련해 놓은 돌멩이들은 던져 보지도 못하고 성을 내주게 생긴 것이다. 그는 수성군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서문에 비도들이 들어오고 있다. 서문을 방비하라!”
화승총이 불을 뿜어댔다. 그러나 밀물처럼 밀려드는 동학군들은 대포 소리와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을 넘어 들어왔다. 수백 명의 동학군들이 입성하자 제법 전열을 갖추어 대응하던 수성군들은 이내 겁에 질려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부사는 수성군들에게 외쳤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적을 두고 도망을 치는 자들은 모두 목을 베리라.”
그러나 농민군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화승총 몇십 자루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관군들이 총을 쏘아서 눈앞에서 쓰러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서 또 농민군들이 밀려 왔다. 그 거대한 숫자에 놀란 관군들은 농민군들이 코앞에 나타나자 총을 버리고 도망을 치니라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혼이 나간 것이다. 부사는 동헌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가진 것은 고작 죽창일 뿐인데 총과 칼을 가진 관군들이 밀리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는 서문의 상황을 피해서 동문을 향해 갔다. 다행히 동문은 닫혀 있었다. 수성군과 민보군이 아직까지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농민군들이 뒷전에서 공격을 시도하려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동문의 군사들을 서문 쪽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동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인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박헌양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장흥 고을 부사의 목숨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고작 농민군의 반란에 목숨을 내주려고 공부를 하여 출사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학문에 힘을 썼던 그는 관리가 되어서도 청렴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억세게도 관운이 안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비겁하게 농민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저들이 가진 것은 고작 죽창일 뿐이었다. 저들이 꿈꾸는 세상도 단지 며칠 만에 무너질 게 뻔했다. 그 며칠을 견뎌야 했다. 박헌양은 손으로 얼굴을 비벼 가며 애써 정신을 수습했다. 며칠이 아니라 단지 오늘 이 순간만 넘긴다면 내일은 청병이 도착할 수도 있었다.
‘단지 며칠이야. 며칠만 견디면 다시 수습이 되는 거지. 일본군이 내려오고 있지 않는가? 오늘 전투만 이기면 내일은 병영성에서 지원군이 도착한다. 오늘이 중요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동문으로 허우적허우적 달려갔다. 그리고 관군과 민보군에게 외쳤다.
“저들은 무기가 없다. 우리에겐 화승총과 포가 있다. 저들이 성벽 밑에 도달하면 돌들을 밀어뜨려라. 저 역도들 몇 놈의 머리만 깨부수면 놀라서 모두 흩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내주면 갈 곳이 없느니라. 싸움은 마음에 달린 것,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부사는 그 함성이 공허하게 들렸다. 이미 슬금슬금 성을 빠져 나가고 있는 병사들이 눈에 띄었지만 잡으러 갈 수 없었다. 우선 눈앞의 상황이 급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사또의 모습을 보며 사기를 회복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어제 벽사역에서는 찰방이 먼저 도망을 쳤다는 소문은 병사들에게도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관리들이란 목숨을 부지할 길만 찾을 뿐,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병사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로 남문으로 달려갔다.
“오늘 이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면 곡식창고를 열어서 그동안 모아 놓은 쌀들을 전부 너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오늘의 싸움에 함께한 누구든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목이 터질 듯이 관군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은 이미 수적 농민군에게 밀려서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었다. 부사의 제의가 달갑지 않았다. 눈앞에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포상을 받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그는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의외로 반응이 없자 성문을 바라보며 서성였다.
북문 쪽에서 첨병이 달려왔다.
“사또 나리, 지금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이 여자라고 하옵니다.”
“여자라고? 아니 어느 집 아녀자가 농민군을 지휘한단 말이냐?”
첨병은 북문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였다.
“저기를 보옵서소. 안개 속에서 말을 타고 앞장서서 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소사라는 여자인데 절세미인이랍니다. 신기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인다고 합니다요.”
그는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는 성곽을 바라보며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세상이 망하려니 별 해괴한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여자가 어떻게 남정네들 싸움터에 끼인단 말이냐.”
대답은 없었다. 찬바람이 훅 끼치며 온몸에 또 소름이 돋았다. 오늘 죽는단 한 들 여한은 없었다. 다만 이제야 누리기 시작한 영화를 포기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청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던 날의 영화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던 이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고작 농민 반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 것인가? 그는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각오를 다졌다. 내 공간은 내가 지키리라.
“병사들은 들어라, 농민군이 가진 것은 고작 죽창일 뿐이다. 너희들이 가진 화승총에 장전을 하고 각 성문에서 다가오는 농민군들을 쏘아야 하느니라. 한발도 헛나가면 안 된다.”
찬 기운이 몰아온다. 오늘이 섣달 초엿새, 이 해를 못 넘기고 저승사자를 맞이할 것 같은 불안감이 찾아든다. 그런데 해는 왜 뜨지 않는가? 어제까지 말짱하던 날씨가 오늘따라 겨울비라도 내릴 듯 하늘이 잔뜩 내려앉아서 부아를 돋우었다.
“에잇, 쯔쯧. 쨍하고 맑은 날 싸우는 게 낫지, 스멀스멀 귀신같이 내려앉는 물안개는 저 역도들보다 더 재수가 없구나.”
그는 두 손을 들어서 주변을 물리쳤다. 아무도 남기지 않고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신기가 있는 여자의 소문은 이미 성 안까지 퍼져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신기하다고 했다. 그녀가 나타난 곳엔 언제나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 여자가 역도들을 지휘하며 다가오고 있다고…?”
그는 길게 호흡을 늘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 여자의 손에 최후를 마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공부한 보람이 한낮 여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니.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자 외쳤다.
‘한낮 아녀자의 손에 사나이 대장부가 도망을 치랴! 내 비록 이 성에서 최후를 마치더라도 당당하게 싸우리라. 인생이란 다시 올 수 없는 것이지만 살 때보다 죽을 때가 더 중요하다.’
“그래 봐야 여자인 걸. 여자가 뭘 안다고 말을 타고 농민군을 지휘해.”
그는 천천히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함성이 들려오는 북문 쪽을 바라보았다. 산골짜기를 타고 농민군의 행렬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화승총을 장전하고 북문을 향해 쏘았다. 총알은 북문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탐진강 가로 몰려든 농민들이 동문 쪽으로 진군을 하고 있었다. 산이 가로막고 있으나 남문 쪽에서 이미 많은 농민군들이 올라오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문제는 북문이었다. 북문 쪽으로 다가오는 농민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단전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사지는 어쩔 수 없이 덜덜 떨렸다. 그는 재빨리 병졸을 불러서 관군들을 모두 북문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민보군을 이끌고 있는 유생 김한섭의 소식이 당도하길 기다렸다. 김한섭이 이끄는 민보군은 강진에 있었다. 한나절이면 도착하고도 남는 거리에 있는 그가 그립기 한량이 없었다.
농민군들이 한 차례 밀려왔다가 완강한 저항에 밀려 썰물지듯 물러간 틈에 김한섭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 듣는 만 못한 절망적인 것이었다.
“김한섭의 민보군은 아직 전투 준비를 갖추지 못하여 오늘 전투에는 참가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 장녕성이 무너지면 적들이 내일은 병영성을 공격해 올 거라고 해서 병영성 전투를 준비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서찰을 가지고 떠난 군졸은 흙투성이의 허름한 농민복 차림으로 반절을 하며 소식을 전했다. 서찰도 없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박헌양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애써 솟아오르는 분노감을 누르며 물었다.
“이곳을 지키면 강진성은 무사할 게 아니냐. 그렇게 어리석은 판단이 어디 있단 말이냐. 벌써 이곳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강진성을 지킬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군졸은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또 나리, 외람될 말씀이오나 강진병영에서도 이미 높은 양반들은 모두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사옵니다. 수만의 역도들이 몰려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떠나야 한다고 이미 성안은 텅 비다시피 되었다 합니다.”
“뭐라고?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부터?”
목울대를 심하게 꿈틀거리며 박헌양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단전에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 보지만 스멀스멀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동문으로서는 이방언이, 북문으로는 신녀인 이소사가 접근하고 있다고? 그럼 남문은 보나마나 이인한이 맡고 있겠구나. 이런 빌어먹을 놈들. 한 곳이라도 뚫리면 안 되니라.”
병사들은 북문에 집중적으로 집결이 된 듯 북쪽에서 함성소리가 울려 퍼진다. 꽹과리 소리가 박자를 빠르게 달구며 점점 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징징징 울리는 징소리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더 숨가쁘게 만들었고, 도둑고양이처럼 쇠와 징 사이를 뚫고 쳐대는 북과 장구소리에 박헌양은 이미 혼이 나가고 있었다.
“아, 저놈의 꽹과리 소리. 저 소리를 죽여야 하는데.”
꽹과리와 북소리는 싸우기도 전에 적의 사기에 눌리게 했다. 억세게 파고드는 꽹과리 소리에 농민들의 원망과 분노가 담긴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엊그제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주리를 틀었던 농군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식솔이 많다고 엄살을 털며 세금을 감해 주라던 그 늙은 농부는 곤장 몇 대에 파르르 떨며 숨이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동헌에 앉아서 그가 혼줄을 냈던 농부들이 모두 농민군이 되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엊그제까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농민들이 이제 자기 머리를 노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 목숨을 내놓고 저들과 싸워 이기리라. 이곳이 내 무덤 자리가 될지라도, 내 기필코 저 역도들을 징치하고야 말 것이다.”
그는 어제 저녁 내내 갈게 한 칼을 꺼내 들었다.
“누구든지 오기만 해라. 그러면 단칼에 목을 베어 줄 테이니.”
“와아아아아.”
농민군들의 함성이 또다시 커졌다. 한 차례 물러났다가 금세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북문에 도착한 농민군들이 굳게 닫힌 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북문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박헌양은 소리를 질렀다.
“모두 화승총을 쏘아라. 적의 머리에 제대로 맞도록 쏴야 한다. 돌을 던져라. 농민군들의 머리를 겨냥하라!”
화승총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선두에 섰던 농민군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주춤하던 농민군들이 이내 더 큰 함성을 울리며, 장마에 불어나는 계곡물처럼 마구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헌양은 무너진 성문으로 들어오는 농민군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가 한 사람의 농민군의 가슴을 찔렀을 때는 이미 수십 명의 농민군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그는 다가오는 농민군에게 칼을 휘두르며 접근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를 에워싸고 있는 농민군들은 수십 명에서 이제는 기백 명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소사는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북문 안으로 들어갔다. 수성군들이 정신줄을 놓고 발포한 화승총알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폭죽에 불과했다. 선발대로 달려 나간 농민군들의 죽창을 휘두르며 수성군들의 화승총을 빼앗아 버렸다. 수성군들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군에게는 독안에 든 쥐였다. 성안 어디서건 그들을 숨어 들어간 곳은 농민들이 다 뒤지고 있었다.
육탄전이 벌어졌다. 수성군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높은 성곽에서 아래로 뛰어 내렸다. 한편으로는 남문 쪽으로 달려 산 속으로 도망을 시도했지만 남문도 이미 농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동문으로 들어오는 이방언 장군의 병사들은 탐진강으로 뛰어 드는 민보군을 잡아 죽이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수성군 한 명이 잡힐 때마다 농민군 수십 명이 달려들어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화가 난 농민군들은 성안 곳곳에 숨어 있던 백성들을 찾아내 공터로 모이게 했다. 농민군을 피해서 성 밖으로 도망을 치는 백성들을 쫓아가는 농민군도 여럿이었다. 이방언 장군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연재는 이번 회를 끝으로 마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곧 출간될 책에서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