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임최소현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회) - 임최소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5. 9. 16:49


1 무릎에 닿는 봄추위가 뼈 속까지 시리다


날은 화창하고 맑았다. 하지만 입춘을 조금 넘긴 날의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갑고 매서웠다. 우마차 여러 대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은 육조 거리에 우뚝 선 광화문은 마치 칼을 찬 장수처럼 고압적이고 위풍당당하다. 어설픈 잡인들은 결코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날 선 공기를 가로지르며, 흰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말총갓을 눌러쓴 헌헌장부 아홉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들어 왔다. 그들은 임금이 계시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쪽을 향해 긴장된 발걸음을 옮겼다. 맨 앞에 선 선비의 손에는 붉은 보자기로 싼, 상소문을 올린 상이 들려 있었다.

광화문 뒤로는 늠름하게 높이 솟은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헌부 정문 앞과 그 맞은편에는 큰 돌로 만든 해태 한 쌍이 서 있다. 눈알이 튀어나온 이 돌사자들은 높은 대 위에 서서 사람들을 쏘아보며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기세다.

그들의 우두머리 박광호는 요동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침착하게 붉은 보자기에 싸인 상소장을 앞에 모셔 놓고, 격식을 갖춰 임금께 배례를 올렸다. 함께 한 여덟 명의 선비들도 박광호를 따라 절하였다. 다음에 자리를 펴고, 엎드려 동학이 창도된 내력과 그 본지 그리고 큰 스승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아뢰고 동학 도인들에 대한 금압을 거두어들일 것을 간절하게 청하는 상소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상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각 도에서 모인 신 박광호 등은 진실로 두렵고 두렵게도 머리 숙여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번 절하면서 정의롭고 공덕이 밝으신 주상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근자에 이르러 실천 행도하는 진짜 선비는 얼마 되지 않고 서로 얽히어 헛된 문장이나 드러내려고 한갓 겉치레만 숭상하면서 경전에서 표절하여 천박하게 이름이나 얻고자 하는 선비가 십에 팔 구나 됩니다. 말로는 선비가 되겠다고 하나 덕성을 기르고 도를 따져 학하는 것을 멸시하니 울분이 사무쳐 통곡할 뿐입니다.

다행히도 천운이 닿아 지난 경신년(1860) 4월에 하늘이 도우시고 조상이 도와 경상도 경주 땅에서 최제우가 비로소 천명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 포덕하게 되니, 최제우는 바로 병자년 공신 정무공 진립의 7세손입니다. 도를 펴고 가르침을 행한 지 불과 3년에 원통하게도 사학(邪學)이란 이름으로 그릇된 비방을 뒤집어쓰게 되어 갑자 3월 초 10일에 마침내 경상감영에서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광경을 상상하면 천지가 참담하고 일월이 빛을 잃은 것 같습니다.

최제우는 말씀하시기를,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이 가르친 바이지만 수심정기(守心正氣)는 내가 다시 정했다 했으며, 또한 공자님의 도를 깨닫고 보니 한 이치로 정해졌으며, 나의 도와 비교해 보면 크게는 같고 조금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조금은 다르다 함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를 경건히 받들어 일할 때마다 반드시 마음으로 고()하고 천지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어찌 도리에 비추어 모자람이 있다 하겠습니까.

이러한 도리는 선성들이 밝히지 못한 것으로써 최제우가 창시한 종지인 것입니다. 하늘님 섬기기를 마치 부모님 섬기듯이 하라는 것으로써 어찌 도리에 어긋나겠습니까. 또한 불도와 선도 중에서 자비와 수련을 합친 이치만을 함께 취한 것이므로 공부자에 모자람이 없이 광명정대한 대도의 이치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란 학의 이름은, 하늘님으로부터 나오고 동에서 창도되었기 때문에 동학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즉 서학으로 돌려서도 안 될 것이며 또한 동학을 이단 아류로 대하여 지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영과 고을에서는 체포하고 가두고 형벌하고 귀양 보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이 도는 마음을 화평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므로 마음이 화()하면 기운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형체가 화하고 형체가 화하면 바르게 되고 사람의 근본 도리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최제우는 선성들이 밝히지 못했던 대도를 창시하여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리의 근본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도는 참으로 무극대도입니다.

전하께 엎드려 빌건대 스승님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시고 감영이나 고을에서 벌 받고 귀양 가 있는 생령들을 살려주십시오.

마침 서울에는 세자 탄신을 경축하는 과거를 보러 수많은 유생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입궐하기 위해 가마를 타고 오는 관료들, 시골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양복 차림으로 궐내에 들어가던 서양인, 일본인은 물론이고 육의전에 물건을 대러 온 상인에 인근의 꼬맹이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엎드려 상소하는 이들 동학도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때는 계사년(1893) 음력 211. 아직 바람이 매서울 때다. 그러나 그렇게 엎드려 궐의 반응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궐내의 하급 관리가 몇 번이고 와서 휘 둘러 보고 들어가기만 할 뿐 좀처럼 웬 일이냐고 물어오는 일도 없었다. 아침부터 흙바닥에 꿇어앉은 무릎과 손바닥으로 한기가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아홉 명 중 한 사람 손병희는 오른손엔 염주를 들고 땅을 짚은 채 다른 사람들과 소리를 맞추어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亡 萬事知)’

주문을 외는 동안 어느덧 몸의 360여 구멍, 혈이 열리고 백회에서 회음까지 척추를 타고 하늘 기운이 들어옴을 느꼈다. 회음에서 명문, 대추, 백회로, 다시 상단전과 중단전, 하단전으로 이어져 임독맥에 묵직한 기운이 뻗어나갔으며, 기경팔맥으로, 온몸 전체로 따듯하고 광대하고 심오한 기운이 돌았다. 뼛속까지 침습해 오던 한기가 점차 사라지고 빳빳하게 마비되어 있던 근육들이 풀려나.

들릴 듯 말 듯 주문을 외우는 그 소리의 진동이 몸 속으로 퍼지면서 우레처럼 큰 진동으로 화하였다. 그 소리에 놀라 달아나듯 온몸의 탁한 기운은 빠져나가고, 맑고 굳센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서, 잠들었던 하늘이 깨어나 어루만지기라도 하듯 온몸이 따뜻하고 중후해졌.

얼었던 몸이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애써 쫓아도 밀려드는 졸음을 물리치고자 의침법(意針法)으로 정수리 백회혈 둘레에 생각을 집중해서 침 10개를 꽂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염주를 돌리며 계속 주문을 외웠다. 한 식경을 집중해서 주문을 외웠을까? 그는 비몽사몽 아득해짐을 느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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