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더냐(2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 넓게 퍼져라(2)
김은경이 해월 선생을 만난 것은 신사년(1881년 8월)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오랜 시간 서책에 매달려 살아왔건만 학문의 울림은 없었다. 아니 유학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나라가 유학이 가르치는 도리는 너무 멀어지기만 하는 데에 지긋지긋했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백성들은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어 나가기를 아침저녁 가리지 않는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서원에 모여 사대부 타령이나 하는 것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김은경은 풍문으로 동학이 주장하는 바를 전해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 같았다. 이 조선 땅부터 지상신선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놀라웠고, 적서의 차별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양반과 평민과 천민들까지 평등하게 대한다는 말에 가슴이 열렸다. 민생이 평안해야 힘을 갖고 사대하지 않는다는 것에 절절이 공감했다.
김은경은 수운 대선생의 도통을 이은 해월 선생이라는 분이 너무나 궁금했다. 몇 개월을 기다리던 끝에 해월 선생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해월 선생이 머무는 곳을 은밀히 전해 듣고, 한달음에 집을 나섰다. 개벽세상이라는 말만으로도 떨려 왔다. 세상을 어찌 바꾸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서책을 익히며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어찌하면 동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김은경은 몇날 며칠을 쉼없이 걸어 단양에 도착했다. 해월선생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한시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월 선생이 거처하는 곳은 동구 밖이 훤히 보이고 뒷산이 감싸 안은 고을이었다. 해월 선생의 거처를 알려준 동학 도인의 말대로 주변의 인기척을 살핀 후에 무심한 듯 초가집으로 다가가 싸릿대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황구 한 마리가 김은경을 보더니 짖어대기 시작했다.
김은경은 개 짖는 소리에 누군가 나오려나 했지만, 개만 왕왕 짖어댈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김은경은 짖어대기만 할 뿐 제가 더 무섬증을 드러내는 황구를 달래 가며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초행길 이틀 반나절을 꼬박 걸어온 사내의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길을 떠나기 며칠전부터, 해월선생을 만난다는 기대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그였다. 김은경은 벽에 기대 앉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김은경이 눈을 뜬 건, 귀뚜라미 한 마리가 왼쪽 손등에서 울어대고 있을 때였다. 잠이 덜 깬 김은경은 실눈으로 귀뚜라미를 쳐다보다 오른손에 힘을 모았다. 내려칠 기세였다.
“이 보시오. 그 작은 귀뚜라미를 죽여 없앤들 뭐가 달라지겠소?”
웬 작달막한 체구의 중늙은이가 김은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은경은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해 중늙은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여기, 해월 선생이 계신다던데, 혹시 언제쯤이면 만나뵐 수 있는지 아시오?”
그때 김은경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글쎄요. 무슨 일로 그 노인이 언제쯤 올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배를 채워야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중늙은이는 그 말을 남기고 부엌으로 향했다.
곧 따뜻한 밥상이 들어왔다. 중늙은이는 아랫목을 김은경에게 내주었다.
“혹시, 해월 선생을 아시오? 그분은 어떤 분이오? 할애비 같은 노비들도 극진히 존대한다고 들었소? 그게 참말이요? 매일 학문을 닦는 분인가요?”
김은경은 허기진 배를 급히 채우고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중시하던 체면은 온데간데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해월 선생은 언제쯤 오시오?”
김은경이 다시 재촉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시었소? 왜 만나려 하는 것이오?”
노인은 천천히 새끼를 꼬며 물었다.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이 들어 무엇하오? 듣는다 한들 그 깊은 뜻을 알아들을 수 없거늘….”
김은경이 노인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계속 새끼를 꼬며 말했다.
“방금 선비님은 해월 선생이 노비들에게도 존대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노비들에게도 한울님이 계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동학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찾아 여기까지 오신듯한데, 노비들을 업수이여기신다면 앞과 뒤가 다른게지요.”
김은경은 할 말이 없었다. 부끄러워 낯이 붉어졌다.
“언고행(言顧行) 행고언(行顧言)이라, 말은 행할 것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한 것을 돌아보아, 말과 행동을 한결같이 하라고 했지요.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면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고,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면 비록 해가 다하고 세상이 꺼질지라도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노인이 빙긋이 웃으며 김은경을 바라보았다.
김은경은 그제서야 노인이 해월 선생임을 알아채고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해월도 김은경에게 맞절했다. 그동안 서얼 차별, 신분 차별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얼마나 항변했던가. 개벽 세상엔 만인이 평등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정작 노비에 대한 평등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토록 뵙고 싶은 해월 선생을 노비로밖에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이 부끄러워 몸 둘 바가 없었다.
“스승님, 스승님 계세요.”
상현이네 마당에서 다급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선이다.
“어인 일로 늦은 시간에 온 게냐?”
상현이가 급히 마당으로 나가며 물었다.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스승님, 저희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요. 그런데 의원이 안 온대요. 약값도 없다면서…. 스승님, 도움을 청할 데가 없었어요.”
유선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일곱 살 가느다란 어깨가 더 가냘퍼 보였다.
“그렇구나, 잘 왔다. 걱정하지 말고 같이 가 보자.”
상현이는 유선이를 따라 나섰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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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6 - [소설/변김경혜] - 꿈이 있더냐 (3)-1장-변김경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