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2회) - 갑오년의 아침(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5. 14. 09:37



이인한은 마굿간에서 말을 꺼내 타고 부리나케 이웃마을 송천리로 달렸다. 멀리 정동진의 널따란 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송촌리 앞뜰에는 차례를 마친 동네사람들이 풍물을 울려댔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자잘한 장구 장단이 재롱을 떠는 태평소의 늘어진 자락이 섞이어 설날 아침의 풍류를 자아냈다.

장흥에서 제일 처음 도인이 된 이순홍이 마을 앞 정자에서 이인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널따란 들판에서 갯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이순홍의 긴 수염이 날렸다.

나와 계셨군요. 어르신 문안 드리옵니다.”

이인한은 해묵은 느티나무 여남은 그루가 푸짐한 잔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제각 옆에 말을 묶고 정자로 올라가 큰 절을 올렸다. 이순홍도 맞절을 했다.

새해에는 무탈하고 도인들을 더욱 넓혀 가도록 합시다.”

이순홍이 절을 하고 일어서는 이인한의 손목을 잡으며 덕담을 한 후에 안부를 물었다.

그간 얼마나 노로가 많으셨소? 하루에도 몇 백 리를 달려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소. 어서, 집으로 들어갑시다. 여기에 나온 것은 이접주 마중을 나온 것도 있지만 여식이 신행을 온다고 기별이 와서......”

이순홍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이인한도 긴 구렛나루 수염 끝에 잔주름을 패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설날이니 이소사님이 신행을 오겠군요.”

두 사람은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 커다란 솟을 대문 앞에 섰다.

덕도는 얕으마한 구릉이 많아서 우마장으로는 제격이라고 하오. 어렸을 적부터 말 타는 것을 가르쳤더니 시가(媤家)에서 준 조랑말 기르는데 재미를 느낀 모양이라오. 이접주는 덕도에 자주 드나드니 제 여식(女息)을 더러 보았지요?”

그럼요. 내일도 덕도에 포접을 하러 갈 생각이어서 이소사님께 들릴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오늘 친행을 오시니 내일 다시 들려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순홍이 큰 기침을 하자 사내 종이 나와서 대문을 열었다.

어르신, 벌써 오셨습니까?”

떠꺼버리 사내 종은 이소사를 기대한 듯 이인한이 따라들어오자 으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손님을 모셔야지, 입은 왜 그리 벌어지는고?”

이순홍이 마루로 올라서며 이인한을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이순홍의 아내가 안방에서 나와서 이인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차례를 지내고 아직 음복을 못했습니다. 수정과와 식혜로 음복을 하십시오.”

부인은 다과상에 조청과 쑥떡을 차리고 마실 것을 내왔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여식이지만 기특한 아이이지요. 내가 동학을 접한 이후로 그 아이를 남녀차별없이 활발하게 길렀더니 타고난 영특함이 발휘되어서 하루하루 학문을 넓히는 품이 제법 큽니다. 다행히 사위놈이 연하를 몹시 아끼니 결혼한 지 이태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신혼의 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어딜 가나 둘이서 한몸처럼 붙어 다닌다고 하오.”

십여 년전에 동학을 받아들인 이순홍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딸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지요. 연하아가씨가 저 넓은 들판에서 말을 타는 법을 배우고 무술을 익힐 때 제 가슴도 설렜답니다. 이팔청춘이 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훔쳐볼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으니 사위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디 미모만 빼어났던가요? 활달한 성격에 사람을 이끄는 넉넉함마저 지녔으니 필시 도량이 큰 자녀들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이순홍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정과가 담긴 사발을 이인한에게 내밀었다. 이인한이 천천히 수정과 한 모금을 마시며 이제는 이소사가 된 연하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혼인한 후로 더욱 정진을 하더니 덕도의 맑은 기운이 깃들어 신기(神氣)마저 촉발하여 아픈 사람도 치료해 주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게 되었다고 하오. 뜻을 이루려면 삼대가 필요하다고 하더니 내 뜻이 연하에게 이어지고 또 손자가 태어나면 그 뜻을 이룰터이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니겠소?”

이인한이 웃으며 대답 했다.

덕도에 들어가면 멀리서나마 이소사님의 댁을 둘러 보고 왔습니다. 꿈에 신녀가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니 예사로운 일은 아니지요. 아들을 낳아도 큰 인물이 될 것이고, 남편을 모셔도 크게 쓰임을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허허, 도인이시면서 여식이 꼭 아들과 지아비를 위해서만 살라는 법이 있겠소. 물론 후손를 키우는 것도 매우 귀중한 일이나 본인 스스로가 세상에 큰 일을 하며 살아갈 게요.

하하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새해에는 건강한 외손자가 탄생하길 바랍니다.”

이순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입을 반쯤이나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 식혜를 따라 이인한에게 권하며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이다.

대처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소. 고부에 가서 전봉준 접주를 만났다니 올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거사는 몇 월쯤에 하게 되는지요?”

어르신! 올해가 바로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전국에서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미뤄 두어서는 안될 상황입니다. 백성들이 고혈을 빨아 먹는 관리들이 횡포가 극에 다랐고 도인들이 아니어도 민란이 속출될 상황입니다. 이럴 때 도인들이 일어서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고을도 새봄에 기포령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매우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구먼.”

이순홍이 수염을 쓸었다. 이인한은 식혜가 담긴 사발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방언 대접주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오늘 장흥지역의 대표 접주들이 모여서 거사를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도인들의 역량을 결집하면 하늘님이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순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노인이란 다만 힘이 좀 부칠 뿐, 뜻은 꺾이지는 않는다오. 우리들에게는 청년들이 못 가진 지혜라는 것이 있지. 이접주, 저 아래 곡간으로 좀 가 보십시다.”

이순홍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을 앞에 널따란 바다 같은 논이 모두 이순홍의 땅이었다. 해마다 넉넉한 갯논의 쌀이 쌓여서 살림이 불어나곤 했다. 갯벌이 섞인 논의 쌀은 다른 쌀에 비해 훨씬 기름지고 맛이 좋았다.

이인한은 곡간에 무엇이 들었을지 매우 궁금한 마음을 누르며 이순홍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순홍이 종을 불러서 곡간의 문을 열게 했다.

아니! 어떻게 저 물건을 구하셨나요?”

이순홍이 활짝 열어 제친 곡간을 들여다 보며 이인한은 절로 소리를 질렀다. 차곡차곡 쌓여진 나락가마니는 기대한 것이었지만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선반에 놓인 것은 백여 개가 넘을 만한 화승총이었다. 그리고 총구 옆에 화약들도 얌전히 진열되어 있었다.

도인님, 어디에서 저걸 구하셨나요?”

이순홍은 종을 물리고 나서 천천히 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새 아침의 해가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 하늘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쌀가마니 팔아서 회진에 머물고 있는 왜놈들에게 매수를 했다오. 돈이면 양반도 사는 세상인데 저딴 것을 왜 못 구하겠소. 전투란 반드시 이겨야 할 말이 있는게요. 도울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도울 테니 말씀을 해 주시오.”

그리고 이순홍은 곡간으로 들어가서 나락가마니를 쓸어 보며 지긋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곡식들이 시천주(侍天主)를 하는데 쓰여야 하지 않겠소. 농사를 지을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벼 한 포기가 내 아들 딸처럼 여기며 키웠지만 사람들 입으로 들어갈 때는 더 귀한 정성이 따라야 한다오.”

이인한은 이순홍의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이인한이 다시 한번 반절을 올렸다.

지이잉 징, 지이잉 징!”

들판에서 풍년을 기리는 풍물굿이 계속 되어 있었다. 깊은 바닷물 속까지 파고 들어갈 것 같은 우람한 징소리가 울려댔다.

어서 가서 읍내의 대접주들을 만나시오. 한 시가 급하지 않소.”

이순홍이 이인한를 바라보며 팔을 흔들었다. 이인한은 안방을 향해 반 절을 올리고 후다닥 대문을 나섰다.

챙기챙기챙기챈!”
들판에서 꽹과리 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전 글

2015/05/11 - [소설/명금혜정] - 갑오년의 아침(2)-명금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