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꽃(6회) - 다들 보은 취회로 가세
조기를 다 떼어 담은 후 다시 그물을 내렸다.
어느덧 한밤중이다. 앞으로 두 달 간은 잠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이 따로 없다.
법성포 박중양이 조기를 받으러 배를 타고 나왔다. 김유복도 함께 왔는데 그는 금방 손종인과 형님, 아우가 되었다. 박중진이 궁금하던 동학 소식을 박중양에게 물었다. 입도하지 않은 사람들도 한양 소식에 귀를 쫑긋 세웠다.
계사년(1893년) 2월에 한양 광화문 앞에서 동학의 주요 두목들이 상소를 올렸다. 묵묵부답이던 임금은 마지못해 ‘각귀안업(各歸安業)’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 일은 그렇잖아도 동학으로 쏠리던 민심의 흐름에 새로이 물꼬를 터준 셈이 되었다. 동학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크게 돌아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날로 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두목들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의 답변이라면 대선생 신원의 일은 여전히 만만찮은 일임을 절감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박중진 일행이 조기잡이를 나와 있는 동안에 동학을 둘러싼 정국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팔도의 도인들에게 충청도 보은으로 모이라는 해월 최시형의 지시가 이미 내렸다고 했다. 박중양이 진도 도인들에게 함께 갈 것을 권하자 손행권이 팔을 걷어부치며 말했다.
“워메, 그라믄 우리도 싸게 싸게 가야재. 광화문 앞에서 일이야 대두목들이 앞장서서 허는 일이라 우리가 참예를 못했재마는, 보은취회에는 가야재. 마지막 싸움이란디 이것 저것 개릴 때가 아니구마. 이참에 빠지믄 안 되재.”
“그려 그려. 전라도 끝에서부터 쩌 웃 지방 함경 평안까지 모탤라믄 열흘은 걸리재. 열하루부터 스무날까지 모태락했응게 우리는 아직 시간이 있단 말시.”
"그랑가? 여그서 배로 가믄 충청도까지 얼마나 걸리까?"
“밀물 타고 금강으로 들어가서 공주다 배를 대야재. 여그서 보은까지는 한 삼백 리 나웃 될랑가? 하루 반이믄 가것네.”
가만히 듣고 있던 사공 김씨가 깜짝 놀라 물었다.
“조구 잡다가 자네들이 가불믄 동학도 아닌 우리는 어짜라고?”
동학도 아닌 화장 안씨가 박중양과 김씨를 번갈아 보더니 결단을 내리듯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같이 가 보세.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 아녀? 교조 신원, 그것이 반란도 아닌디 우리를 쥑이것는가?”
다른 사람들도 김씨를 설득하였다.
“동학도들이 아니라 우리 아랫녘 뱃놈들이 일본놈 몰아내 주라고 더 싸워야 될 판 아닌가? 왜놈들이 우리 바다를 지 멋대로 넘나듬서 괴기를 잡은디 우리 조정에서는 뭣을 해 주든가? 우리도 이참에 가서 우리 바다를 지켜주라고 하세야.”
“동학도들이 요구하는 것도 ‘척양척왜 창의(斥洋斥倭 倡義)’여라우. 남녘 바다도 일본 놈들 땜시 힘든 모양인디 강경이나 법성포도 일본 상인들 땜시 죽을 지경이라요.”
김유복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김씨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랍시다. 나도 이 나라 백성인디 할 일은 해야지라우.”
가장 완강했던 김씨가 따라가겠다고 하자 다른 노군들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라믄 사리 물때까지 잡을 만큼 잡고 법성포로 오시게. 나도 그 날 같이 감세. 우리 접 사람들도 한 오십 명 나랑 같이 갈 것인게.”
박중진 일행은 이틀간 조기잡이를 더 하였다. 그물코마다 조기가 걸려 일행들은 신이 났다.
“뭔 일이당가? 조구새끼가 연통을 했능가? 어째서 우리 그물로만 다 모인다냐?”
“조구들도 동학을 한갑소야. ‘얼렁 잡고 가쇼.’ 하고.”
박중진이 이틀 만에 만선을 하여 법성포항으로 가니 박중양이 영광접 사람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우선 군산 포구를 향하여 바람을 탔다. 김유복이 박중진의 배로 옮겨 탔다. 김유복은 박중진과 손행권에게 인사를 하고는 손종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은 어느새 친형제간 같았다. 종인이 먼저 말을 냈다.
“형님은 언제부터 동학을 했소?”
“내가 조실부모하고 오갈 데가 없응게 최경선 대접주님 댁에서 거둬 주셨재. 그 댁에서 마부 일을 하는디 대접주님이 나한테 동학을 갈쳐 주셌어. 어느 날 나한테 한울님이람서 그동안 하대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여. 내가 어찌할 줄을 모릉게 동학을 차근차근 갈쳐 주심서 동학 심부름을 시키신 것이 지금까지여.”
보은 장내리는 충청, 경상, 전라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고, 동학도들의 한양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드는 동학도들, 사람 입을 보고 모여드는 장사치들의 물결이 끝이 없었다. 사통팔달 뚫린 길마다 대기를 앞세우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내리는 그야말로 장안이었다.
큰 산자락 아래 석성처럼 돌담을 쌓은 자리에 본부가 세워졌다. 들어 앉아 주문을 외는 동학도들의 모습이 각 포별로 질서정연하였다. 박중진이 영광접, 무안접 사람들과 함께 들판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고, 진도접을 나타내는 깃발을 세웠다. 손종인과 김유복은 각 포의 깃발을 따라 구경하였다. ‘척양척왜’, ‘보국안민’이라 쓰인 거대한 깃발들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깃발과 깃대를 만드는 사람들, 돌성을 쌓고, 솥자리를 거는 사람들, 둥글게 둘러앉아 주문을 외는 사람들로 장내리는 활기가 넘쳤다.
“동학도들이 이렇게 점잔하게 취회를 한디 어째서 반란이라고 한당가? 새복부터 저녁까지 주문 외움서 깃발에 써진 대로 해 주라는 것밖에 없는디 말이여.”
“동학도들이 이렇게 수만 명 모태도 티거리 잡을 것 없이 행동한께 쩌 위에서는 더 성가셔락한디야.”
“어째서?”
“요래요래 깨끗하게 행동을 항께로 사람들이 벌떼같이 동학에 입도해 부러. 동학을 사도난정이라고 해 놨는디 사도난정답게 깽판을 치믄 확 쓸어 불 것인디 말이여. 생각해 봐라, 얼마나 성가시것냐?”
“성 말을 들은께 그란갑다 한디, 참말로 애통 터져 못살것소. 임금님은 백성들 뜻을 어째서 몰르까?”
“하이고, 임금이야 알든지 몰르든지 냅둬부러라. 이 한한 백성들이 말을 해도 귓구녁 꽉 틀어막고 있는 임금이 임금이다냐?”
최시형이 보은의 장내리에 도착한 날은 청산에서 교조 제례를 마친 다음날인 삼월 열하룻날이었다. 장내리는 해월 최시형의 도피처였고, 동학 교단의 대도소가 있는 명실상부한 동학의 중심지였다.
이때 최시형을 보필하며 보은 취회를 주도한 두목들은 손병희, 김연국, 서병학 등이었다. 보은 취회가 일 년 전인 임진년(1892년)의 공주, 삼례 취회와 다른 점은 지금까지의 교조신원운동과 달리 보국안민, 척양척왜와 같은 백성들의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광화문 복합상소를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나라 형편이 생각보다 위험한 지경임을 실제로 보고 들은 데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기도 했다.
한편 그 시각 전라도 금구의 원평에도 만여 명이 모였다. 보은 장내리 취회에 하도 많은 사람이 모인지라, 장소 문제나 오가는 시간, 물자 조달 문제로 보은에 오지 못한 동학도들이었다. 그들은 보은을 오가며 상황을 주시하면서 함께 척왜양을 부르짖었다.
보은과 금구 취회를 통해 얻은 중요한 성과는 이들 각 지역의 대두목들이 자기의 조직을 드러내놓고 지도 통솔한 것이었다. 또 동학도들이 소문으로만 접하던 전국 동학도인의 위세와 두목들의 면목을 실제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취회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각지에서 모여든 동학도들이 서로 동도(同徒)의 우의를 다지면서 살 맛 나는 세상을 맘껏 누린 기회가 되었다.
오랜 줄다리기 담판 끝에 선무사 어윤중이 지방 수령과 관속들의 침탈을 지적하고, 빼앗겼던 토지와 재산을 돌려줄 것을 약속하자 해월 최시형은 4월 2일자로 동학도인들의 해산을 지시하였다. 해산에 따른 불만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도인들은 벅찬 감격을 안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보은 취회에 다녀온 후 박중진 일행도 모두 동학도인이 되었다. 열사흘 간 취회에 참가하며 입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들은 박중진에게 입도식을 부탁하였다. 박중진은 펄쩍 뛰었다.
“내가 아직 동학을 잘 모른께 법성포에 가서 최경선 그 양반한테 헙시다.”
“그 양반은 태인 사신담서 어뜨케 또 오라고 허것어? 하조, 관매, 나배에서도 입도할란다고 떼거리로 달라들 것인디 인자 자네가 해사재.”
박중진은 이제 도를 전하는 이가 되어야 했다. 떠밀리듯 맡게 되었지만 그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희열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재삼재사 심고하였다.
보은취회 뒤로 관에서는 동학 도인들의 눈치를 보았다. 무턱대고 잡아 가둔 후 뒤로 돈을 요구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과중한 조세는 여전했다. 무능한 조정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세에 밝은 이들은 이 평온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근심했다. 터지기 직전의 화약처럼 불안한 정국이었다. 대도소로부터는 관과의 마찰을 극력 피하라는 첩지가 연일 내려왔다. 동학도인들은 몸고생에 더하여 맘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럴수록 오직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것은 서로를 한울처럼 대하는 동학도인들의 풍속이었다.
박중진은 망종살까지 한 달간 더 조기를 잡아 박중양에게 넘기고 진도로 떠났다. 김유복이 박중진을 따라 진도 구경 좀 하고 오겠다고 박중양에게 사정했지만 저 많은 조기를 보고 놀러간다는 말이 나오느냐는 말에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대신 두 달 뒤에 민어 넘기러 올 때 따라가라고 하자 입이 벌어져 군말 없이 눌러앉았다. 두 달간 씻지도 못하고 조기를 잡은 일행들은 상거지 꼴이었다. 식수로 쓸 물도 부족한 판에 몸을 씻을 염은 아예 내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손종인이 바가지 물에 세수를 하다가 들켜서 ‘물 떨어져서 어장 포기하고 법성포 갔다 올라믄 만 하루가 걸린디 책임 질 거냐?’ 하는 말에 그 후로는 씻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밤마다 머리에서, 몸에서 설설 기어 다니는 이 때문에 잠을 설쳤다. 어찌나 벅벅 긁어댔던지 온몸이 벌개졌다. 화장 안씨가 밤마다 옷을 뒤집어 입는 것을 보고 손종인이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집에 갈 때 가르쳐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생각 나 손종인이 물으니 안씨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때문이여. 퉁퉁 살찐 뚱니가 옷 솔기마다 뻑뻑하게 들었는게 뒤집어 입은 것이재. 그것들이 추와서 다 딴 사람들한테 갔을 것이여.”
“이 땜시 그랬다고라우? 그랑게 할아부지가 집에 갈 때 갈케 준닥 하셌구마.”
“원래 조구잡이 배에는 이가 돛대 꼬작까지 올라간다는 말이 있어야. 추운께로 다들 멫 겹썩 껴 입었으니 이들이 얼매나 많것어?”
“워메. 뚱니 이약 잔 그만들 해. 말을 항게 그란가 아조 온몸이 설렁설렁하니 개라 죽것네.”
노꾼 김씨가 몸을 배배 틀며 등이랑 옆구리를 긁더니 이번에는 열 손가락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이것들이 즈그 말 하는 중 아는 모냥이여, 아이고 개란거.”
임씨가 서너 겹 껴입은 윗옷을 한꺼번에 가슴께까지 들어 올려 탈탈 털었다. 옆에 있던 김씨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성님, 고만 터쇼. 뚱니들이 시컴하니 떨어지네.”
“아이고 통통한 것이 톡 볼가졌네. 이것이 엊저녁에는 니 뽈아 묵든 놈인지 어찌 알 것이냐?”
임씨가 엄지손톱으로 뚱니를 꾹 누르자 ‘툭’ 터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