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3회) - 1장 1891년 공주(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5. 21. 20:48



1장 1891년 공주

 

 

도망치다시피 상엿집을 뛰쳐나온 동이는 뒤집어쓴 도포를 더욱 몸에 감쌌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죽으려 물속에 들어간 순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약조하라던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선비가 뛰어들었다.

어머니의 바람 때문일까? 동이는 어머니를 생각하자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에 한기를 느꼈다. 그러자 다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포로 아무리 몸을 감싸도 떨림은 멈추지 않고 더욱더 심해졌다.

동이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지도 못하는 목숨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울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힘들단다. 동이야, 동이야. 눈물 젖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람소리마냥 동이의 귓가를 스쳐지나 갔다.

눈물이 말라 버릴 때도 됐는데, 오히려 둑이 무너진 것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내리기만 했다.

 부모를 따라 죽는 것도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순간 동이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떠오른다 싶다가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손을 내밀어 보기도 전에 온몸이 땅으로 패대기쳐졌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놓치는 순간에 어디선가 어머니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살 무렵의 동이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우스꽝스럽게 춤추는 모습을 보며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동이가 그 모습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허공에서 맴돌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눈앞에서 불빛이 일렁이고 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넌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살려 달라고 소리친 거라고!” 소리치던 선비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어 ‘상관하지 말아요. 왜 살려 주었느냐.’고 맞받아 소리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만 맥을 놓고 말았다.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어머니….’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그녀의 온몸이 결박당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간질거렸다.

‘눈을 떠야 하는데, 눈을 떠서 어머니를 봐야 하는데. 그래야 꿈에서 깨어 날 수 있는데, 어머니가 가 버리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데.’

눈물이 났다. 머리 위에 있던 다정한 손길이 동이에게서 멀어졌다.

‘안 돼요. 어머니 가지 마세요. 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너무 무서워요. 어머니 제발, 가지 마세요.’

동이는 멀어지는 손길을 붙잡으려 몸부림을 쳤다.

“얘야, 정신이 드니? 얘야?”

그러자 동이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어디 가신 걸까? 동이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벌써 닷새째 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니다.

‘어머니는 어디 가신 걸까?’ 동이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간간히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그러모았다.

“어디 사는 뉘 집 자식일지, 식솔들이 있다면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까요?”

“이서방을 시켜 은밀히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인근 고을 아이는 아닌 듯 합니다.”

“몹쓸 짓을 당한 걸 안다면 집안에서 내쳐질지도 모르니 차라리 정신이 돌아오고 몸이 회복되면 돌려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헛소리를 하며 우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아무래도 깊은 사연이 있는 아이 같습니다.”

동이는 두 사람의 소근 거리는 말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어서 정신을 차려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오늘도 김 의원이 다녀가지 않았소? 거칠던 숨소리도 제법 좋아진 것 같고, 뱉어만 내던 탕약도 조금씩 삼키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일어날 테니까.”

“어린 나이에 그런 험한 일을 당하다니, 김의원이 진찰하고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여인으로 얼마나 수치스럽고 무서웠을까요? 참으로 가여운 아이입니다.”

한숨처럼 이어지는 부인의 말에 동이의 숨이 가빠왔다.

“몸의 상처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일이 더 문제겠지요.”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동이의 상처 난 몸과 마음을 가만히 매만져 주듯 귓가를 울렸다.

“참, 이 아이를 데려다 주었던 선비가 몇 번이나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유구에서 사는 선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통성명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유구의 오정선이라는 선비라 합니다.”

두 사람의 조근거리는 말소리가 점점 뚜렷하게 들렸다. 동이는 눈을 뜨고 두 사람을 확인하고 싶은데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니 뜨고 싶지 않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다.

다정한 소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죽을 용기도 없는데 어찌 살아가야 하나…. 동이는 눈을 뜨고 누군지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2015/05/14 - [소설/이장상미] - 비구름을 삼킨 하늘(3)-이장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