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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마, 돌나물이 신기하네
여섯 살 윤이
겨우내 휘몰아치던 칼바람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더니 북쪽의 흰봉산과 도솔봉에 더 많은 햇살이 머무르고 높은 하늘에서 새소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집 뒤의 삿갓봉에서는 다다다다닥 부지런한 딱따구리가 새 집을 장만하는 모양이다.
나뭇가지에 물이 올라 연두색으로 변해가고 지난 가을부터 가지 위에 쌀알만 하게 달려있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봉오리의 노랑 빛이 진해지더니 개나리가 피었고 분홍빛이 진해지더니 진달래가 폈다.
날씨가 따듯해지자 윤이는 부쩍 밖에 나와 노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김 씨는 마당 한쪽의 흙을 손가락으로 헤치며 윤에게 와서 보라고 했다. 김 씨가 흙을 헤친 곳에는 연두색 싹이 뾰족이 드러났다.
“아아...”
윤이는 그 뿐. 입을 벌리고는 동그란 눈으로 김 씨를 쳐다보았다
“왜?”
“얼마 전까지도 여기에 눈이 있었는데...”
“빨래터 큰 바위 옆 소나무도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했단다.”
“어엉? 저 큰 나무들도 이렇게 작게 시작했던 거라구요?”
“그럼!”
“아웅... 세상에...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울타리 밖 양지바른 곳에도 이미 흙 위로 돋아난 싹들이 지천이었다.
“내일이라도 윤이랑 나물을 뜯으러 성지골이나 구지막골로 가 볼까 봐요.”
연화가 파를 다듬다가 일어나 치마폭의 흙을 털며 말했다.
“그래 배나무골이랑 생양재에도 참나물, 취나물, 고사리 따위가 많이 난다더라.”
“엄니, 그런데 윤이는 다른 애들이랑 참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연화는 열네 살이나 어린 동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 닮지 않았느냐?”
김 씨는 연화를 보고 미소 짓다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배연화, 최덕기(아명 솔봉, 묘비명 봉주), 최윤...
모두 자기가 낳은 자식이다. 김 씨는 연화 아버지 배 서방과 살던 때를 떠올렸다.
배 서방은 부모 때부터 영월 윤진사의 노비였다.
김 씨는 농민의 딸이었지만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져 농사를 못 짓게 되자 경신년(1860) 봄에
딸이라도 굶지 말라며 윤진사네 노비 배 서방에게 인연을 맺어주었다.
배 서방은 외거노비로 살 수 있도록 청을 넣어 가까운 곳에 나가 살게 되었다.
삼년 동안 아이 소식이 없더니 4년째에 아기가 들어섰고
갑자년 (1864) 정월에 드디어 딸아이가 태어났다.
배 서방은 기다리던 아이여서 그랬는지 시도때도 없이 들여다보며 예뻐하였다.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제쳐놓고 뛰어와 아기를 안고 나갔는데
여름에 연꽃이 만발한 연못으로 데리고 나가면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깔깔대고 웃었다.
아기 이름을 연화로 지은 까닭이다.
몇 해 전 윤진사는 중국에 다녀오는 역관에게서
뜨거운 여름에도 덩굴을 따라 꽃을 피운다는 귀한 나무를 선물 받았다.
능소화나무라고 했다.
몇 년은 잎을 피워 덩굴을 올리더니 3년쯤 되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꽃들이 우르르 폈다가 다 지고 푸른 나뭇잎조차 축늘어지는 뜨거운 여름이 되었는데
과연 능소화는 제 철을 만난 듯이 꽤 커다란 주홍색 꽃을 탐스럽게 피우던 것이다.
윤진사는 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중국 황족들이 즐기는 꽃이라며 거들먹거렸다.
연화의 재롱이 점점 늘어날 때쯤,
배 서방은 꽃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봄에 능소화 줄기 하나를 베어다가
울타리 밑에 심어 두었다.
줄기가 점점 자라나 연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이듬해에는 울타리를 쑥 넘어올라 꽃이 피었다.
연화는 아침에 눈을 뜨면 문을 열어 꽃부터 보려들었고
딸의 웃음에 배 서방의 입은 귀에 걸렸다.
어느 날 윤진사가 말을 타고 시회에 다녀오다가
배서방네 울타리 위로 핀 능소화를 보게 되었다.
그는 말머리를 관아로 돌렸다.
연화를 나무 그늘에 앉혀놓고 김을 매던 배 서방 내외는
멀리서 육모방망이를 들고 달려오는 포졸들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자기들을 향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육모방망이패들은 다짜고짜 배 서방을 포승줄로 꽁꽁 묶어 관아로 끌고 갔다.
수령은 영문을 모르고 무릎을 꿇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배 서방을 향해 호령했다.
“네가 윤진사댁 머슴놈 배가냐?”
“그... 그런뎁쇼.”
"네가 윤진사댁 귀물을 훔쳤다는 게 사실이렷다!”
“예? 무슨 말씀을... 도무지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그럼 네 놈 집 담장 위로 솟았다는 능소화는 어찌된 것이냐?”
“아, 예... 그건 우리 딸이 꽃을 하도 좋아해서
몇 년 전에 작은 가지 하나를 베어다가 꽂아 둔 것이 그리 큰 것이올시다.”
“이놈아, 그 꽃이 무슨 꽃인 줄 아느냐? 그 꽃이 양반 꽃이니라.
너 같은 천한 상것들 보라고 피는 꽃이 아니란 말이다.
네놈들 즐기라고 윤진사가 중국에서 어렵사리 모셔왔겠느냐 말이야!
당장 저놈 볼기를 쳐라!”
형리들은 형틀 위에 묶인 배 서방의 바지를 벗기고
양쪽에서 볼기와 넓적다리에 곤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넷이요.”
엉겁결에 벌어진 일에 아야 소리 하느라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배서방이
서너 대 매질을 당하고서야 이러다 죽겠다 싶어 겨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놓다.
“잠깐만요. 나으리. 나무를 뿌리째 뽑아간 것도 아니고
가지 하나 잘라다가 심어 키운 것이 무어 그리 큰 죄라고 이러십니까요, 나으리”
“어허... 저놈 주둥이질 좀 보게.
아니 조선의 근본은 강상의 도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못 들어보았느냐?
하기사 너 같은 놈들이 삼강을 알겠느냐, 오륜을 알겠느냐. 쯧쯧...
가끔 상놈들이 양반 흉내를 내느라
쥐새끼처럼 숨어서 몰래 족보를 만드네 제사를 지내네 하는 놈들이 있더라만
발각이 나는 순간 관에서 잡아다가 죽도록 물고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줄 아느냐?
양반과 상놈은 그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이 인간을 내실 때 양반이 시키면 아랫것들은 받자와 시키는 대로 하도록
애초에 그렇게 이치가 지어졌느니.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려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고 마는 것이다.
모름지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것이 하늘의 정한 이치이며
그렇게 각자 하늘이 정해준 이치대로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가리켜
강상의 도라 하는 것이다. 이놈아!”
곤장 몇 대에 피가 맺히더니
곧 살점들이 터져나갔다.
뒤따라 온 김 씨는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고
연화는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울면서 쓰러진 어미를 흔들어대었다.
남편 배 씨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뒤 한 동안 김 씨 모녀는 깜깜한 동굴 속에 갇힌 것 같이 살았다.
숨이 막히고 눈물만 쏟아졌다. 모녀는 하루 종일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정신을 추스린 김 씨가 연화의 마음을 돌리려 꽃을 따다 주어도
연화는 그전처럼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손에 올려놓고 이슬방울만 떨어뜨릴 뿐,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깔깔대던 연화도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기이하게도 배 서방이 떠난 지 얼마 뒤에
윤진사가 말을 태워준다며 안고 탔던 열 살 난 손자가
말에서 미끄러져 등이 굽어 버렸다.
또 4년이 지나고서는 마나님이 풍을 맞아 반신을 못 쓰고 자리보전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 집 하인들은 배 서방이 억울하게 잘못 되어 이 집에 동티가 난 것이라고 수군대었는데
그런 수군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필이면 윤진사는
연화 어미 김 씨를 불러다가 마나님시중을 들게 하였다.
어느 날 김 씨가 마나님을 씻기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어느 결에 왔는지 윤진사가 김 씨의 뒤태를 묘한 시선으로 훑고 있는 게 아닌가.
김 씨는 그 길로 짐을 꾸려 친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친정붙이들에게 개가자리를 알아보아달라고 부탁했다.
동학에 입도한 친척오라비 권명하가
나이 차이는 조금 나겠지만 아주 인품이 훌륭한 분이
가족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데 어떻겠냐고 묻기에
어서 영월을 떴으면 좋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미가 서둘러 윤진사집을 떠나며 개가를 궁리하면서부터
연화는 더욱 말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입술을 내밀고 볼이 부어 있었다.
갑술년(1874) 봄 단양으로 와서 새 아버지를 처음 만난 날,
얼굴에 수염이 시꺼먼 새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릎을 땅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연화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주었다.
“아가...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뜻밖에도 연화는 열한 살 큰애기답지 않게 그만 ‘으아앙-’ 하고
어린 아기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어미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는 오랜만에 떠나간 아비의 눈빛을 다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9 년 전의 일이다.
이곳 단양 도솔봉 아래 사는 날부터 연화는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아갔다. 어린 동생들, 솔봉이와 윤이도 생겨났다. 이젠 스무 살의 과년한 처녀가 된 연화는 11살, 14살 터울의 솔봉과 윤에겐 어머니 같은 누이요 언니가 되었다.
김 씨도 연화와 둘이 살 때엔 이런 행복이 다시 오리라 생각지 못했다. 새로 만난 남편은 한없이 어질고 부지런했으며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점잖았다. 남편에게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묻고 말씀을 듣는 표정들은 더 없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층 평화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손님 뒤치다꺼리가 많아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양식이 부족할 때는 물론이고 넉넉히 있을 때에도 남편은 가족이 먹는 것은 죽을 끓이라고 했다. 농사짓는 이들도 제대로 못 먹는데 양곡을 얻어먹는 처지에 쌀밥을 먹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먹는 것뿐일까. 입는 옷도 항상 무명일 뿐, 간혹 찾아오는 제자들이 비단이나 가는 모시로 만든 좋은 옷을 가져와 권해도 모두 물리치고 입지 않았다.
정해(1827)생이니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48세였고 지금은 57세가 되었다. 그러나 김씨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남편이 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니 남편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낮에 조금 멀리 떨어진 제자들 거처에서 머물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그리고는 새벽 동트기 전에 집을 떠났다. 남편은 항상 하루가 바뀌는 해시와 자시(밤 11시~1시) 사이에 청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남편이 동학 선생이라는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해월 최시형이라는 것을 오라비로부터 듣기는 했으나 그때만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북도중주인을 북접주인(北接主人)이라고 간단히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도를 전수 받던 당시 남편이 살던 곳이 최제우가 살던 용담의 북쪽에 있었고, 또 최제우가 해월에게 북쪽으로 세를 뻗치라고 그리 이름 붙인 것이라고 했다.
김 씨가 처음 그 주문 외우는 모습이 낯설어 놀라는 표정을 지었을 때 최시형은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내 나이 35세에 동학을 세운 수운 스승님을 만났지요. 주문은 그 가르침의 고갱이라오. ‘지극한 한울기운 지금 여기 크게 내리소서. 내 가슴속 한울님 모시니 조화가 자리 잡고, 영원토록 잊지 않으니 만사가 다 깨달아지리다.’ 이런 뜻이라오. 지금은 낯설어도 차차 이해가 될 것이오. 스승의 가르침은 내 차차 전해 드리리다.”
그 뒤로 더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말과 행동거지가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모든 존재가 안에 한울을 모시고 있다며 아내인 김 씨와 연화 그리고 솔봉과 윤, 그를 찾아오는 제자들도 나이나 신분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그윽한 공경심으로 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집에 기르는 가축은 물론이고 풀 한 포기, 나무 하나까지 마치 귀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대하였다. ‘하늘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사람인가 하여 김씨는 남편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깊은 감사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 날, 김 씨가 연화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김연국이 해월을 모시고 목천에서 돌아왔다. 목천에서 도인들이 경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공주에서도 경전을 만든다고 하니 해월은 포덕 하랴 경전 판각에 관여하랴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했다.
연국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왔다. 연화는 남정네가 부엌에 들어오면 못쓴다고 바가지로 물을 떠 주며 연국을 떼밀어 밖으로 보냈다. 둘이는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언제부터인가 남다른 눈빛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 둘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건 김 씨 부인이었다. 처음 단양에 왔던 날 그때도 연국은 남편 곁에 있었다.
2. (평생제자 김연국을 만나게 되는 사연)
공주 사람 이필제가 있었다. 해월보다 두 살 많은 그는 자기 말로 일찍이 수운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몰락해 가는 양반 세상, 조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각 고을마다 탐관오리의 횡포는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이미 3~40년 전 사람 정약용이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어 백성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지 않았던가. 관속들의 수탈은 도무지 끝이 없었다. 죽은 사람, 갓난아기, 동네를 떠난 이웃, 거동을 못하는 늙은이에게까지도 세금을 매겨댔다.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가 떠난 다음에 방에 들어온 남자는 자기의 양물을 칼로 베었더란다. 정약용은 유배 간 동네에서 실제 일어났다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고통 속에 죽지 못해 사는 백성들의 참상을 시로 썼다. 그러나 조정이나 고관대작들은 백성의 고초를 생각하기는커녕 매관매직으로 곡간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돈을 받고 벼슬을 내주는데, 수시로 갈아치우면 수시로 돈이 들어왔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자들은 언제 자리가 뒤집힐지 모르니 빠른 시간 안에 본전 이상을 챙겨야 했다. 파는 놈이나 사는 놈이나 눈이 벌겋게 되었다.
그 통에 죽어나는 것이 백성이라, 걸핏하면 끌려가 매타작을 받고 가진 것을 빼앗겼다. 가는 곳마다 수령들의 탐학은 입에 단내가 나게 했고 발길 닿는 곳마다 백성들의 참상은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이놈의 세상, 누구라도 나서서 확 뒤집지 않으면 안 되리라.’ 하는 마음들이 밤마다 마을 골목과 들판을 떠돌고, 낮에는 골짜기 바람을 타고 널리 퍼져 나갔다.
이필제는 공주, 천안, 진천을 다니며 사람을 모았다. 그러나 밀고자가 있어서 진천 관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간신히 몸을 피한 이필제는 학정에 시달리다 악에 바친 사람들이 넘쳐나는 진주, 남해 인근에서도 사람들을 모았으나 역시 밀고자가 있어 진주 관아 공격도 실패했다. 든든한 조직,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는 최시형을 떠올렸다. 착실하게 포덕을 하여 신망이 높다고 했다. 믿을 수 있는 조직은 그가 갖고 있다! 그는 영양 일월산 아래 살고 있는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냈다.
최시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동학이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한울마음을 품고 세상만물을 한울처럼 대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많아져야 후천개벽이 되니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포덕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폭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스승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필제는 두 번째 사람을 보냈다. ‘좋은 세상 만들자고 동학을 세운 우리의 수운 스승님은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셨다. 신원 운동을 하는 것이 제자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간곡한 뜻을 전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세 번째 사람을 보내 거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영해부사 이정은 삼척부사로 있을 때에도 탐관오리였고 영해부사로 와서도 생일날에 떡국 한 그릇에 30금씩 거두어들인 무자비한 놈이다. 동학 도인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어쩌겠는가.’ 역시 해월은 요지부동이었다. 네 번째 사람을 보냈다. ‘제세안민. 우리가 탐관오리들을 벌주면 조정은 매관매직의 농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이전과는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래야 개벽의 새 하늘이 엽전만큼씩이라도 열리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사람을 보냈다. ‘이미 많은 동학도가 가담의 뜻을 밝혔다. 3월 10일 수운 스승께서 참형당한 날에 맞춰서 영해 관아를 점거하고 부사를 징치하겠다. 어찌 하겠는가?’ 이필제는 해월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흔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을 전하는 도인들은 해월과도 안면이 있고, 해월로부터 도를 받은 도인들도 있어 제의를 언제까지고 물리칠 수만은 없었다.
해월은 마침내 고개를 끄떡였다. 거사일 전에 집을 떠나 영해 병풍바위 앞에서 천제를 지내고 결사 도록에 서명했으며 식량 지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미 많은 동학도들이 참여하고 있으니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 있었던 것이다. 거사일 직전. 해월의 양자인 준과 매부 임익서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5, 600명의 동학도들은 밤이 깊어지자 관아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한 뒤 부사를 죽이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이필제는 드디어 뜻을 이루고 관아 돈 150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필제는 비로소 세력을 움직이는 귀한 경험을 얻었다. 이필제에게 이번 거사의 실제목표는 수운의 신원보다는 성공의 신화를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것이었다.
이필제는 조령을 다음 목표로 그다음 문경, 괴산, 연풍, 충주 그렇게 여세를 몰아 조선반도를 휩쓸 생각으로 영해를 떠났다. 그러나 관리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필제는 영해부사의 처단을 거사의 성공이라 여기며 자신감에 넘쳤지만 해월에게 불어 닥친 후폭풍은 참담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추격해 온 관군에 양아들 준이를 포함한 수백 명의 동학도들이 잡혀 끔찍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대구에서 참형당한 수운 스승님의 주검을 경주까지 모시고 올 때 힘썼던 매부 임익서도 희생되었다. 아내 손 씨와 두 딸의 행방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스승이 돌아가신 후 7년간 공을 들여 보석처럼 가꾸었던 동학도 백여 명이 처형되었고, 수백 명이 유배를 갔다. 마음속에 한울을 모셔 개벽 세상을 가져올 동학도들이 초토화되어 버렸을 뿐 아니라, 동학도는 이후로도 계속 끊임없는 지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아, 이 일을… 이 일을….
관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해월은 깊은 절망을 안고 소백산 골짜기를 탔다. 굶주림에 지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비몽사몽간에 높은 절벽에 서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품었으나,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은 뜻을 펼치고 멀리까지 도를 펴라는 스승님의 말씀이 마지막 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스승의 인도가 있었던가, 한울님의 감응이 있었던가. 영월 직곡리 박용걸의 집에 겨우 의탁하게 되어, 몸을 추스르며 49일 기도를 드렸다.
수운 스승이 살아 계실 때 49일 기도를 여러 차례 했지만 이렇게 치열하게 기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통곡이 터져나왔다. 자기의 과오로 희생된 도인들을 생각하며, 어린 나이에 참수를 앞두고 공포에 떨었을 아들 준이를 생각하며, 보석 같은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하며 가슴을 쳤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는 아내와 딸들을 생각하며 여인들이 겪을 고생을 생각하니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자기가 겪는 시련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희생이 반복되게 하지 않으리라. 처절하게 처절하게 주문을 외우며 하늘의 가르침을 간구했다. 자기안의 하늘이, 자기안의 지혜가 커지기를, 커지기를…. 기도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기도가 끝난 뒤 해월은 제자들에게 우묵눌(愚黙訥) 세 글자로 무저항 정신을 설했다. 우(愚), 우직하게 겸손하게…. 우공이 집 앞의 산을 옮긴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지만 꾸준히 안으로 정진하여 내공을 다져서 공을 이루는 데로 나아가자. 黙(묵), 잠잠하게 마음속으로…. 묵묵히 낮고 깊어져서 고요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자. 訥(눌), 말을 적게, 입을 무겁게…. 말을 앞세우지 말아서 허언과 장담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태산 같은 도인들이 되자.
해를 넘겨 49일 기도가 끝나는 정월 초 닷샛날, 해월은 기도소를 마련하였던 영월 피골(稷洞) 도인 박용걸의 집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잘못 지도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제례를 올렸다.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은 피해자나 가해자나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지옥과 폭력의 유혹을 없애는 것이고 가슴속에 한울을 키우는 일이다. 그것이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장 빠르고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엄청난 희생을 겪고서야 크게 깨우치게 되었다.
이필제가 어설프게 영해 관아를 친 여파는 참으로 커서 관가에서는 동학도를 극히 무도한 폭도들이라고 낙인을 찍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도(邪道)의 무리로 업수이 여기며 하찮은 무지렁이로 한 수 접어서 대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기찰과 닦달이 뒤따른 건 불문가지. 관은 동학의 뿌리를 없애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저 멀리 강원도 인제에 피신해 살던 수운의 큰 아들 세정이 체포되었다. 그는 양양 옥에서 취조를 당하다 매질 끝에 사망했고(1872.5) 동학도인들은 관속의 추적을 피해 지경을 넘어 이주하거나 화전민 무리에 섞여들어야 해야 했다.
바로 그즈음에 해월이 인제 도인 김병내 집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기거하던 김 도인의 조카 김연순, 김연국 형제가 해월을 흠모하여 입도하였는데 그때 김연국(용진)의 나이가 16세였다.
해월이 김병내의 집을 떠날 때 김연국이 배웅을 나왔다. 한참을 지나 해월이 그만 돌아가라 해도 연국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리 길을 따라오던 김연국은 잠시 쉬는 틈에 해월에게 자기를 수행제자로 받아 주십사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어찌 나를 따르겠다는 것이냐?”
“저희 형제는 2년 전 부모를 잃고 지금 숙부 집에 얹혀살고 있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행하시는 것이 제가 그간 보고 듣고 겪지 못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물에서 물을 얻어먹을 때나 개떡을 나누어 먹을 때도 제게 먼저 주셨습니다.”
결기가 서린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잠시 고개를 돌렸던 해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국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오던 길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선생님, 어찌….”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숙부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십 리 길을 되돌아갔던 해월이었다. ‘나도 사내 몫을 할 수 있다’며 이필제를 따라 나섰던 열일곱 살 양아들 준이를 비참하게 죽음의 길로 이끌었던 아비 해월은 그렇게 자기를 아비처럼 따르는 연국을 얻었다.
다음 해 갈래사 적조암에서 49일기도를 마쳤을 때 주지 철수좌 스님은 소백산맥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도솔봉 아래 절골이 한동안 평온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이라며 주선해 주었다. 해를 넘긴 몇 달 뒤 철수좌 스님은 입적하셨는데 임종 후 장사를 지내고 지목이 뜸해지자 해월은 다시 기도와 설법과 포접으로 연일 바쁜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많은 희생이 있었으니 다시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바쁘게 돌아치는 해월을 보필하며, 제자들은 3년이나 부인 손 씨와 딸들의 행방을 찾았으나 종적을 알 수 없다며 철수좌 스님 말대로 단양 도솔봉 아래 거처를 정하고 새로운 사람을 얻으셔야 한다고 강력히 재가를 권했다. 영월의 김 씨 부인을 만나게 된 사연이다.
그 무렵 연국의 숙부 김병내도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으므로 도솔봉 아래 송두둑에서는 여러 도인들이 어울려 살게 되었다. 해월의 제자들과 교인들의 사는 방식은 대개 이러했다.
해월의 거처를 더 안쪽으로 정하고 인근에 몇 채를 얻어 몇 가구가 살았다. 해월을 찾아 무수한 손님들이 들락거리는데 그들은 일단 될 수 있으면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인근 교도들의 거처에 묵고 날이 어두워 인적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해월의 집을 찾았다. 밤새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다시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섰다.
길에서 얻은, 아들과 다름없는 김연국은 그 후로 해월이 살아 있는 동안은 거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을해년(1875) 솔봉이 태어나고 3년 뒤인 무인년(1878) 윤이 태어나자 연화 연국과 더불어 넷은 모두 오누이처럼 지내게 되었다. 연국은 늘 출타가 잦은 해월을 따라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함께 있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사이좋은 4남매인 줄 알았다. 해월이 집에 머무는 날은 아이들은 한데 얼려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러 다녔다. 물가에서 놀고 논 위 얼음판에서 놀았다. 그런데 11살로 단양을 찾았던 연화가 점점 나이가 차고 처녀티가 나면서 청춘남녀에게는 다른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국은 스물이 넘어서도 선생님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며 장가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어오는 중신도 화를 내며 뿌리치곤 했다. 재작년 그러니까 연화가 18세가 되자 연화의 혼처를 알아보아야 했는데 해월은 웬일인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 김 씨는 해월과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연화의 혼처에 무관심한 것 같던 해월이 어느 날 불쑥 물었다.
“연국이 사윗감으로 어떻소?”
“사람이야 그만이지만 꺼려집니다.”
“둘이는 서로 좋아하는 눈치 아닙니까?”
“그러니 빨리 연화의 혼처를 알아보자니까요. 나는 연화가 조용히 농사나 짓는 남편을 만나 오순도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국이야 늘상 당신을 모시고 다녀야 하고 언제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서….”
“그럼 그만두지요.”
이렇게 또 한 해가 갔다.
묘적재 넘어 풍기 총각을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연화 역시 심히 도리질을 쳤다. 그러다가 이렇게 연화는 20살이 되어 농익은 꽃이 되어 버리고 말았고 김 씨는 바느질을 하다가도, 윤이 머리를 땋아주다가도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쫒기는 나날들(1884~)
빗소리는 새벽에 그쳤다. 마당으로 나갔던 윤이 소리를 질렀다.
“엄니, 엄니, 언니, 이것 보우. 어마… 돌나물 찌끄레기 던졌던 데에 돌나물이 파랗게 자라났어요. 아이구우 신기해라.”
다른 것도 이리 되려나? 생명이란 것이 모두 이렇게 기특한 것일까? 윤이는 쪼그려 앉아 조그만 손바닥을 펴 돌나물 위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아이의 콧방울이 발름거렸다.
“성님, 이번엔 어디어디 다녀왔수? 무슨 일이 있었수? 뭘 봤수?”
연국이가 돌아오면 덕기와 윤은 양쪽 팔에 매달려 쉴 새 없이 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해월과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 졸라대었다. 그러면 연국은 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엿가락 같은 것을 꺼내어 조금씩이라도 두 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떤 때는 너무나 맛있는 약과를 쪼개주며 같이 마냥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 연국은 통 얼굴을 펴지 않았다. 해월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완연했다.
목천과 공주에서 경전을 찍어내고 49일 기도 대신 시행하는 인등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교인들은 날로 늘어갔다. 도인들의 무리를 지어 왕래하는 일이 잦아지자 밤을 기다리고 새벽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단양 관아에서 송두둑을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해월은 제자들의 출입을 금했다.
그런 어느 날 연국이 김 씨에게 새삼 큰절을 했다.
“제가 벌써 스물여덟이 되었습니다. 연화는 스물하나가 되었지요. 둘 다 못 미더울 나이는 아닙니다만 제 형편이 못 미더우실 겁니다. 그러나 연화가 이미 다른 남정네가 눈에 들지 않듯이 저도 다른 처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남이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생스러워도 우리 두 사람 세파를 헤쳐 나가겠습니다.”
해월도 이전과는 달리 아내를 설득해서 연국과 연화의 혼인을 서둘렀다. 둘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김 씨만 마음을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평소와 다른 남편의 결연한 태도에 마침내 김 씨 부인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들이 저리 좋아하는 것을…. 해월은 다음날 아침이라도 혼례를 올리자고 했다. 예물이 필요하랴, 혼수가 필요하랴. 햇볕은 화창했고 높은 하늘에서는 새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근방에 사는 연국의 형 연순과 숙부가 참석했다. 소문을 내지 않고 급히 치르는 조촐한 혼인이었다. 청수를 떠 놓고 둘이는 부부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벌써 맺어졌어야 할 인연이었다.
며칠 뒤 개울 너머에 화승총을 멘 사냥꾼 차림의 두 사내가 이쪽을 쳐다보며 뭔가 쑥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도솔봉 쪽을 향해 올라가는 듯싶더니 해질 무렵 그중 하나가 집 뒤의 삿갓봉 쪽에서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의 손에는 토끼도 꿩도 들려 있지 않았다.
송두둑은 해월이 입도 후 가장 오래, 가장 평화롭게 살았던 곳이었다. 꺼져 가는 동학의 불꽃을 살려낼 수 있었던 고마운 동네였다. 그러나 수상한 눈길이 잦아진 이상, 이제는 더 이상 미련을 둘 곳이 못 되었다. 해월은 바로 보따리를 챙겨 송두둑의 집을 사위가 된 연국에게 부탁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혼자 집을 떠났다. 전라도 익산의 사자암으로 들어간 해월은 수 개월간 암자에 머물며 관가의 경계를 피했다. 초겨울에는 손병희 등과 충청도 공주의 가섭사에서 기도를 하며 이제는 손수 일일이 챙길 수 없게 커져 버린 각처의 도인들을 지도하고 연락 체제에 대해 궁리해 보았다. 송두둑 가족의 피신에 대해서는 얼마 전 제자들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염려 없으리라.
3.
김 씨는 며칠 전부터 말린 나물이며 곡식이며 옷가지들을 챙기느라 부산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해월이 보낸 제자들을 따라 아이들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남자들은 등짐을 지고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보름을 앞둔 달빛에 의지해서 산길을 걸었다. 지난 10년간 김 씨는 송두둑에서 두 아이를 낳았고, 몸은 고돼도 마음은 아주 평온한 삶을 살았다. 남편이 충주, 청풍, 괴산, 연풍, 진천, 목천, 청주, 공주를 다니며 포덕을 하며 보람된 나날을 보낸 곳도 송두둑이었다.
남편은 스승으로부터 위 아래로 나뉘어 있는 수직의 세상을 옆으로 터진 수평의 세상으로 바꾸라는 숙제를 받았다. 서로의 가슴에서 한울을 발견하고, 이 땅 위의 모든 존재가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아 벅찬 기쁨을 안고 살게 되는 세상을 만들라는 과제다. 성심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남편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날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풍족하지 않아도 감사한 날들이었다. 데리고 온 자식 연화를 자기자식처럼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었으며 어린 솔봉과 윤에게 한 번도 큰소리를 내어 꾸짖거나 매를 든 적이 없었다. 밖에서 돌아올 땐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은 윤을 위해 솔나리며 쑥부쟁이 꽃도 따다 주었고 조그만 채송화를 뿌리째 얻어다 주기도 했다.
올 봄에 윤은 채송화며 쇠비름을 뜯어서 나누어 심어보고 그것도 죽지 않고 뿌리를 내려 살아 나더라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심지어 채송화는 잘라 심은 다음 날에도 꽃이 피더라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기가 확인한 생명의 경이로움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제 작년에 뿌려 꽤 퍼졌던 돌나물도, 채송화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해가 뜨면 인적이 드문 양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밀개떡으로 요기를 하고는 인적을 피해가며 300리 가까운 거리를 걸어 도착한 곳은 상주 화서 봉촌리 앞재. 집은 초가 3칸으로 작았지만 우선 지붕이 있고 부엌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등짐을 내려놓은 박 씨는 손 씨 부인이 있는 보은이 여기서 서쪽으로 60리라고 말해 주었다.
날이 밝은 뒤에 보니 근처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바로 뒤에는 꽤 높은 원통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었다. 김 씨는 부지런히 집 안팎을 손보았다. 덕기는 동네친구를 찾아본다고 뛰어나갔는데 언젠가부터 꼬마 윤이 보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으로 손에 걸레를 쥐고 집을 한 바퀴 돌던 김 씨는 그만 그 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다. 윤이는 뒤뜰 양지 바른 곳의 돌무더기들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는 어느 틈에 챙겨왔는지 주머니 이쪽저쪽에서 뿌리와 씨앗들을 꺼내어 여기저기 심고 뿌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게 뭐냐?”
“응. 돌나물 뿌리들하구 채송화 씨앗이야요.”
“엄니, 눈이 와요!”
아침에 모래판에 글공부를 하러 나오던 윤이 소리쳤다. 세 살 위 덕기는 공부를 하며 가끔 꾀를 부리기도 했지만 윤은 글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곳 상주 앞재에 도착한 뒤 바로 마당 한 귀퉁이 감나무 밑에 굵은 나뭇가지를 잘라 폭이 두 자, 길이가 한 자 되게 네모를 만들고 그 안에 고운 흙을 고르게 펴 담아 공부 판을 만들어 주었다.
단양 송두둑에 살 때 남편은 틈 나는 대로 연국이와 연화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김 씨는 어깨너머로 쉽게 한글을 깨우쳤다. 한문은 숫자 말고는 여간해서 배우기 어려웠지만 한글은 그 원리가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하여 기본 글자의 소리만 익히면 금방 엮어서 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김 씨는 호롱불 밑에 헌옷을 기우며 생각했다.
‘참으로 세종이라는 임금은 어진 분이 틀림없을 것인데, 요즘의 임금이란 분은 도무지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도통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반네들 횡포가 끝이 없고 관가의 패악질이 이리도 심한데 어찌 우리 남편같이 어질고 또 어진 사람이 관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 말인가. 20년 전에는 남편의 하늘 같은 스승도 대구에서 참형을 당했다 하지 않던가. 어찌되었든 백성들이 깨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백성들이 글이라도 읽고 서로의 생각을 글로 멀리 널리 전하여 각자의 지혜를 모을 수 있게 된다면 이 어두운 세상도 언젠가는 밝게 되리라. 개벽 세상이 꼭 오리라.’
김 씨가 상주로 이사 와서 아이들의 글공부를 다잡았던 이유였다.
4.
해가 바뀌어 봄(1885)이 되었다. 충청 감사 심상훈이 단양 군수 최희진에게 전임 군수가 작년에 바보처럼 놓친 해월 가족을 찾으라고 닦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단양을 떠나 상주로 떠나오기를 잘 했다 싶었지만 이제 상주도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해월은 상주 앞재의 집을 사위 김연국에 부탁하고 자신은 보은 장내리로 청주, 진천으로 돌아다니며 도인들을 지도했다.
어느 날 손병희의 고향을 들러 가는 길에 청주 북이면 금암리의 교도 서택순의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리는데 등에 아기를 업고 일을 하는 듯 여인은 연신 베를 짜면서도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댓돌 위의 짚신이 다 낡은 걸 보니 야무지게 짚신을 삼아 주는 이도 없는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점심상을 물린 뒤에도 베 짜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집 며느리의 삶이 얼마나 고될지 마음이 아파왔다.
해월이 물었다.
“베를 짜는 이가 누군가?”
“며늘앱니다.”
“며느리가 베를 짜는가, 한울님이 베를 짜는가?”
“네?”
서택순과 그 옆의 제자들은 한참만에야 스승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목화를 심고, 목화를 따고, 목화 안에 들어 있는 씨앗들을 빼어내고, 실을 자아내고,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는 이 모든 수고로운 일들을 해 내는 사람들이 모두 한울님이라는 것을…. 바느질뿐인가? 농작물을 심고 김을 매어주고 거둬들여 갈무리하는 일, 다듬어서 삶고 데쳐 음식을 만드는 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하는 그들이 다 한울님인 것을….
윤이네가 떠나고 단양 송두둑에 여전히 남아 있던 많은 도인이 체포되었다고 했다. 상주 앞재도 안심할 수 없다. 해월은 이번에는 더 멀리 450리나 떨어진 경상도 포항 근처 불냇으로 가족을 이사시켰다. 역시 밤길을 이용했다. 다행히 잡혀갔던 제자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목이 가라앉자 가족들은 두 달 만에, 추석이 지나 다시 상주 앞재로 돌아왔다. 그러나 살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린 산채나물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부엌에 걸어 두었던 솥이며 이부자리도 관에서 모두 실어갔다고 했다.
왕복 900리의 이삿길에 어린 것들과 김 씨는 모두 지쳐 버렸다. 제자들도 너나 없이 도피 생활을 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엄동설한이 시작되는 때에 제자들이 가 보니 온 식구가 여름옷을 입고 떨고 있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듣고 제자 이치흥이 무명 서너 필을 가져다주었다. 겨울옷을 지을 솜이 있을 리 없으니 덕기, 윤이까지 모두 산과 들로 나가 억새풀과 갈대에서 풀솜을 훑어 왔다. 풀솜을 넣어 윤이와 덕기의 옷을 짓고 해월의 옷을 지었다. 김 씨의 옷을 지을 때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윤이는 어머니 옷에 넣을 솜이 제일 적다며 저수지 가로 가서 억새풀 씨를 소쿠리에 꼭꼭 눌러 담느라 얼굴과 손이 모두 빨갛게 얼어 돌아왔다.
설이 지나면 아홉 살이 된다지만 윤이는 아직 어린아이 아닌가.
“아이고. 우리 꼬마애기씨가 이렇게 큰일을 했네.”
“꼬마애기씨라고? 내가 작년에 여기 처음 이사 왔을 때 뒤뜰에 검은 돌덩이가 여간 들기 힘들지 않았거든? 그런데 이번에 들어 올리는데 쑤욱 들려지던 걸. 그러니까 나 이제 꼬마애기씨 아녀요. 나, 크고 있다구. 맞지?”
“여보. 우리 윤이는 참 남다른 아이에요.”
밤에 자리에 누운 김 씨는 호롱 밑에 짚신을 삼기 위해 왕골을 다듬는 해월에게 말했다.
“그럼, 속이 깊은 아이지요.”
해월은 집에 머물고 있는 시간이 적어도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무인(1878)생 아닙니까. 계집애가 호랑이 띠면 팔자가 사납다고 하지 않아요?”
“강하면 좋지요.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그랬대두 금방 털고 일어나겠지요.”
해월은 그저 평안한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감사한 일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언제 주무십니까? 난 당신 주무시는 거 한 번도 못 봤네요. 그리고 일은 왜 그렇게 하세요? 좀 쉬엄쉬엄 하십시오.”
“하늘이 노는 것 보았소? 놀고 있으면 하늘님이 싫어하신다오. 당신은 하루 종일 일했으니 피곤할 게요.”
해월은 빠져나온 아내의 발을 만져보고는 차갑다며 이불을 끌어내려 덮어주었다.
상주 앞재에서 두 번째 설을 맞았다. 해월은 여전히 포덕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까운 뒷산에 진달래가 한창일 무렵 김 씨는 간단한 여장을 꾸려 아침 일찍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이미 먼 길을 다녀 본 아이들이라 60리 길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덕기는 이제 12살. 제법 총각 티가 나고 있었다. 어른 걸음으로야 아침 먹고 출발해도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자니 동이 트자마자 출발해야 했다.
“누구네 집에 가나요?”
“우리끼리 짐도 없이 가는 거 보니 또 이사하는 건 아니지요?”
“다시 상주 집으로 돌아올 거지요?”
“낮에 가는 거 보니 도망은 아니고만….”
이들의 재잘거림에 김 씨도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약아져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처럼 쫓기는 본새가 아닌 나들이가 반가웠는지 재잘대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힘이 드는지 말이 없어졌다.
“덕기야. 너는 손 씨 큰어머니 생각나느냐?”
“손 씨 큰 엄니? 모르겠는 걸요.”
“그래, 애기 때 뵙고 못 보았으니 생각이 날 리가 없지. 네가 돌 지나고 반년이나 지났을 때 송두둑에 있던 우리 집에 잠깐 계셨느니라. 윤이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니 더욱이 알 리가 없고….”
해가 어느 틈에 이마를 비추고 있었다. 지는 태양이라 낮게 떠서 눈이 심하게 부시지는 않았다. 모퉁이를 돌면 또 나타나고 모퉁이를 돌면 또 나타났다. 예쁜 해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보은 장내리에 도착했다.
“이게 누구여? 야가 솔봉이? 그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뛰던 그 아가? 쿨럭, 아이고 야가 동생이구먼. 어서 오거라. 아이고 어린 것들 데리고 오느라 자네도 고생했네, 쿨럭.”
“큰 어머님께 인사드려라.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셔.”
2. 어머니, 큰어머니, 새어머니 (1886~ )
-큰어머니 손씨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라니? 아이들은 눈이 둥그레져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으로 올라선 김 씨가 손 씨에게 큰절을 하자 손 씨는 맞절을 했다. 손 씨는 수시로 쿨럭거리며 타구에 가래를 뱉는 것이 건강이 안 좋은 듯했다.
아이들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고, 오랜만에 만난 두 여인네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래, 어린 것들 데리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저야 힘들기는 해도 아이들이랑 사느라고 적적할 틈도 없지요. 형님은 혼자 얼마나 적적하시겠어요? 몸도 불편하신데. 제가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게 자네 팔자고 그게 또 내 팔자라면 어쩌겠나. 나는 정말 신미(1871)년 그 난리 통에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다네.”
손 씨는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세요. 따님들이랑 양자로 들인 아들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일찍이 수운 그 어른이 돌아가시며 애들 아버지한테 멀리, 그저 멀리 가서 몸 보존해야 한다구 하시지 않았다던가. 박 씨 사모님이랑 그 집 자제분들은 멀리 강원도로 도피하고 우리는 영양 일월산 자락 대치라는 곳에서 아주 조용히 살고 있었다네. 애들 아버지는 가끔 강원도로 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아 뵙구 양양이며 여기저기를 조심스럽게 다니며 포덕을 계속하셨지. 그런데 경오(1870)년에 이필제란 자가 애들 아버지를 계속 흔들어댔어.
“왜요?”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니 출세한 양반들, 관리들은 백성 등쳐먹느라 바쁘구, 그래서 세상을 혼내주고 싶었던 모양일세. 못돼 먹은 관리들을 혼내고 스승님 명예를 회복시키자고 하두 졸라대니까 인근의 도인들에게 연통하여 합세하게 하고, 미리 가서 천제를 지내고 뭐 양식 준비나 돕겠다고 집을 나서신 게 그해 삼월 초였네. 초열흘 수운 선생님 제삿날 일을 벌인다고 했으니 수백 명이 모이는 일에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좀 많았겠나. 일이 터지고 애들 아버지는 무사히 피하긴 했는데 나랑 딸들이 잡혔지 뭔가.”
손 씨는 다시 눈을 아래로 깔고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어떻게?”
“우리 시누이 남편이랑, 우리 준이…. 코 밑에 거무스레 수염이 나기 시작한다고 으쓱하던 우리 준이랑 그렇게 수백 명이 영해관아로 가서 수령 목을 베구 나서 13일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틀 뒤에 관군이 들이닥쳐 잡아갔구, 나중에 잡힌 우리들도 모두 옥에 갇혔다네.”
“여자들까지도요?”
“그럼. 이필제랑 애들 아버지 숨은 데를 대라고 모진 고문들을 당하고, 준이는 옥에서 고문 끝에 효수를 당했다네.”
손 씨는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았다.
“아이고 저런….”
“나랑 함께 영양 옥에 갇힌 우리 큰 딸 민이도, 작은 딸 난이도 아버지 가신 데를 대라고 해서 모진 매를 맞았지.”
“여자들도 때렸어요?”
“그럼. 그놈들이 패는데 남녀노소가 있다던가? 나도 엄청 맞았는걸. 괴수 놈의 마누라가 남편 간 데를 모르겠냐면서…….”
“세상에나….”
“그놈들은 무조건 먼저 사람을 패놓고 일을 시작하더라고. 그런데 옥졸 중에 우리 스물한 살 된 큰 딸 민이한테 잘해 주는 이가 있더란 말이지. 김성도라고. 민이는 제 어미가 맞는 꼴을 보고 있다가 차마 그냥 있을 수 없었는지 김성도에게 우리를 봐 달라고. 여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내 보내주면 뭐든지 다 하겠노라고 사정을 했다네.”
“그랬군요. 그래서 바로 나오셨어요?”
“뭘. 그 아까운 사람들이 모두 죽어 나간다는 소식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지. 딸들이 옆에 없었다면 아마 미치구야 말았을 거야. 휴우…. 우리는 속으로 시천주 주문을 외우며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운 세상으로, 양반 상놈 없고 짓밟고 짓밟히지 않는 세상으로 가시라고 빌고 또 빌었다네.”
“얼마나 힘드셨을까.”
“우리가 보름에 잡혀 들어갔는데 김성도가 수령에게도 말을 했던지 다음 달 그믐이 지나구서 그 애비를 잡자면 옥졸 옆에 붙잡아 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던지 우리를 옥에서 내보내더군. 그 길로 민이는 김성도의 색시가 되고 말았어. 아이가 참하니까 누구랑 살아도 살기는 살겠지마는, 그렇게 창졸간에 아버지도 없이 어거지 시집을 보내게 되었네.”
“나와서 어찌 하셨어요?”
“양자라고 해도 정들여 키운 내 아들 준이 주검도 수습 못해 주고, 시누이 남편도 난리 통에 죽었다는 소식이고, 나는 둘째 난이랑 이집 저집 여기 저기 걸식하며 6년을 생사를 모르는 애들 아버지를 찾아 다녔다네.”
“그러셨군요.”
손 씨의 기구한 과거를 들으며 김 씨 또한 연화와 둘이 살았던 깜깜했던 세월이 생각나 눈물을 훔쳤다.
“그러다가 단양 송두둑에서 애들 아버지를 만나게 된 거라네.”
“참, 그런데 어떻게 송두둑을 찾아오셨어요?”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 5년을 헤매고 다녔는데 6년째에 접어들면서 신기한 꿈을 꾸게 되더라니까. 하늘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고생 많이 하셨다며 자기를 따라 오라잖겠어? 북쪽으로 서쪽으로 이렇게 저렇게 가자고 하더라고. 잠에서 깼는데, 그 장면이 너무도 생생한 거라. 그래서 그 선동이 한 말대로 길을 나섰더니 뭐 헤맬 것도 없이 바로 그리 닿게 되지 뭔가. 나랑 난이는 그저 기가 막혔지. 그렇게 쉽게 가르쳐줄 걸 어쩌자고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골탕 먹였냐 말야.”
김 씨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히 말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찾아 오셨는데 새 사람을 맞아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을 보고 얼마나 놀라셨어요.”
말하는 김 씨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손 씨 역시 한 동안 말을 잊고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는 김 씨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가마니처럼 거친 손바닥으로 김 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네 잘못이 아니네. 처음엔 너무 기가 막혔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원통하고 분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럽고. 가슴이 쿵 하고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그녀는 멈췄다가 잠시 후에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지. 6년을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했겠는가. 애들 아버지가 살아만 계시기를.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두 여인 모두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내 나이 열일곱, 그이가 열아홉에 만나 일 터지기 전까지 27년인가를 같이 살았네. 자네도 알다시피 하늘 아래 다시없는 사람 아닌가. 여기저기 피난 다니느라 배불리 호강하고 살지 않았어도 민이, 난이, 준이랑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네. 청수 떠놓고 기도하면 마음도 한없이 평화롭고…. 끊임없이 드나드는 도인손님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힘든지 몰랐지. 그런데 내 복이 거기까지였던가 보이. 내가 애들 아버지랑 헤어지게 된 것도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네. 지금은 그저 이렇게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기만 하다네.”
그녀는 수시로 기침을 터트렸다.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쌔액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씨는 가만가만 손씨의 등을 쓰다듬었다.
“둘째 따님은요?”
“둘째는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꼭 찾아 드린다고 나를 부축하고 다녔다네. 그래서 그렇게 나이를 먹게 되었지만 둘째 난이 덕에 나도 단양까지 갈 수 있었으니 참 고맙지. 어찌 되었든 난이는 스물네 살이나 먹었어도 제 아버지를 만나서 제 아버지 인연으로 다 늦게 이천 앵산의 신택우 도인 자제 신현경이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 아니었나. 이제는 시댁에서 애들 낳고 잘 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 온다네. 딸은 윤이보다 조금 어릴 걸.”
손 씨의 기침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큰따님 소식은요?”
“애 아버지가 송두둑에서 우릴 만나고 이태 뒤 무인년(1878) 봄에 영양 큰딸 민이한테 가 보셨다더군. 민이도 얼마나 반가웠겠나. 생사를 모르던 아버지를 8년 만에 만나게 되었으니…. 사는 모습은 옹졸해도 밥은 굶지 않는 모양이고, 각시 됨됨이가 워낙 반듯하고 의젓하니 사위도 큰소리 내지 않고 사는 모양이더라고 하대. 아이들도 반듯하게 잘 키우고 있고. 마침 수운 어른 제삿날이 다가와서 사위한테는 민이 할아버지 제사라 속이고 딸에게 일러 수운 어르신의 제사상을 차리게 했다지. 사위도 장인인데 관가에 고발할 수 있겠나. 그럴 위인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지내다 가시게 했다는군.”
15년 전 벌어졌던 이야기부터 8, 9년 전 일까지 거슬러 풀어내는 손 씨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송두둑에 찾아오셨을 때, 그 때 제가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가슴의 아린 통증을 누르며 김 씨가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아니네. 아이들이나 잘 키워 주시게. 아버지의 영을 나눈 아이들이니 귀한 사람이 될 것이야.”
보은에서 며칠을 묵고 돌아오는 길에 김 씨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모든 일이 다 계획된 일 같았다. 선동은 왜 그들 모녀가 그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은 지 6년이 지나서야 꿈에 나타나 길을 일러 주었을까? 남편과 자기가 만나기 위해 시간을 벌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사이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이었나? 가장 큰 일이라면 그것은 덕기(솔봉)와 윤의 출생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 왔지만 모든 사건과 모든 인연이 아귀처럼 서로 맞물려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한순간도, 단 하나의 일도, 한 올의 인연도 의미 없는 것이 없구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모든 것이 귀하고 귀한 그물의 코와 같구나. 그녀는 덕기와 윤을 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엄니, 왜 엄니 얼굴이 달라졌어?”
“응?”
“엄니 얼굴 표정이 큰엄니 집에 갈 때랑 올 때가 다르다구.”
“어떻게 달라졌는데?”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아.”
“그렇게 보이냐?”
“응.”
“모든 일이 생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단다. 이유를 알게 되면 넘어져도 일어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되지.”
윤이는 고개를 들어 어미의 얼굴을 한참 살펴보았다.
“아니 일어서기만 한다면 그 뒤에 넘어진 이유를 알 수 있게도 될 것이다.”
윤이는 어머니 김 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언젠가 나도 알게 되겠지.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어머니가 한 말들을 꼭꼭 눌러 담았다.
보은에서 돌아오니 해월은 아직 봄인데도 도인들에게 악질에 대한 위험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었다.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묵은 음식은 반드시 새로 끓여서 먹을 것이며, 침을 아무 곳에나 뱉지 말고 길에다 뱉을 양이면 반드시 흙으로 덮을 것. 대변을 보고는 노변이거든 땅에 묻을 것. 가신 물은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말 것.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도록 할 것. 몸을 청결히 할 것….
그로부터 동학도인들 사이에서는 ‘부엌이 깨끗해야 한울님이 지나다가 복을 주고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그해 6월 하순부터 전국에 괴질이 돌았다.1) 괴질이 번지면 마을 전체가 벌벌 떨었다. 환자가 하나 생기면 그 가족, 그 주변으로 빠르게 병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쌀뜨물 같은 설사가 어찌나 심한지 환자들은 하루 이틀 후에는 토하고 설사하다가 맥없이 죽어 버렸다. 전국에서 엄청난 사망자가 속출했는데 괴질은 추석이 지나 찬바람이 불고 나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해월이 살던 상주 앞재 40여 호는 위생을 강조했던 탓인지 희생자 없이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아들 덕기를 장가 보내고 눈 감는 김씨-
김 씨도 여름 내내 위생에 힘썼는데 특히 덕기를 위해서는 더욱 정성을 쏟았다. 보은의 황하일이 조심조심 가져와 건넨 달걀꾸러미를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고 죽 끓일 때 한 쪽에 익혔다가 덕기를 조용히 부엌 뒤로 불러내어 따로 먹인 것도 그 무렵이다. 큰댁 손 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아이들, 특히 덕기에 대해서 더욱 각별한 생각이 들던 그녀였다. 덕기는 남편이 쉰이 다 되어 처음으로 얻은 아들 아닌가. 어미의 정성 덕분인지 덕기는 가을이 되자 부쩍 자라 제 어미 키를 넘어서게 되었다.
겨울 갈무리를 시작할 때쯤, 김 씨는 덕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때가 많아졌다. 첫서리가 내릴 무렵 며칠째 온종일 많은 양의 열무 시래기를 데쳐서 새끼줄에 엮어 처마 밑에 걸어 놓느라고 바빴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김 씨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등잔불을 켜 놓고 경전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남자아이가 열세 살에 장가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덕기가 설 쇠면 이제 열 셋이에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오?”
“우리 덕기가 부쩍 큰 거 같아요. 일찍 장가를 보내면 안 될까요?”
해월은 아내의 조바심이 심상찮게 느껴졌다.
“조만간 서인주가 올 터이니 한 번 알아보리다.”
서인주(서장옥)는 청주 율봉에 사는 음선장의 첫째 사위다. 생각하는 것이 곧고 강직하여 해월이 아끼는 제자중의 한사람이었다. 서인주의 권고에 그 장인인 음선장도 이태 전에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서인주한테서 얼핏 손아래 처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던 것이다. 과연 며칠 후에 찾아온 서인주에게 물으니 15세 되는 처제가 있다며 장인에게 고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두어 달 만인 정해년(1887) 정월, 열세 살의 덕기는 제 어미의 원에 따라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음선장의 둘째딸과 혼례를 올렸다. 덕기에게야 난데없는 일일 수도 있으나 큰형님 같은 서인주와 동서지간이 되고 나니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음선장 역시 해월과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 큰 기쁨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꼬마신랑을 맞아들였다. 양반네들은 사주단자며 허혼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혼수를 준비해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신랑신부는 처가에서 살다가 일이 년 뒤 노비들을 데리고 신랑집으로 들어가 폐백을 올리니, 혼례가 실제로는 몇 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민들에게는 그런 의례는 딴 세상 일이었다.
김 씨 부인은 어린 아들 덕기를 장가보낸 뒤 평생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기뻐했다. 장가를 들어 처가에 가서 살면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관의 지목을 피해야 할 일도 없어지리라. 아버지와 사는 것도 다시 바랄나위 없으나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이제 덕기는 김 씨의 원대로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오, 천지신명이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긴장이 풀린 탓인지 김 씨는 아들 장가보내고 나서 보름 만에 덜컥 자리에 눕고 말았다.
신열이 뜨거워 윤이 열심히 찬 물수건으로 이마를 식혀 주고 해월이 열심히 죽을 쑤어 간병을 하였으나 김 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더니 20여 일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제자들이 나서서 원통봉 아래 그녀를 묻었다.
윤이는 어른스럽고 속이 깊은 아이였지만 그래도 엄마 옆에 누우면 어미가 뿌리쳐도 어미젖을 만지려 손을 스물스물 들이밀던 열 살짜리에 불과했다. 아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았다.
어미와 함께라면 깜깜한 밤길을 걸어도 좋았다. 추운 겨울에 홑거풀 옷을 입고 있어도 좋았다. 불을 때는 아궁이 옆에서 눈이 매워 눈물이 나와도 좋았다. 어미가 곁에 있으면, 어미가 엉덩이를 토닥여주면, 어미가 안아 주면 세상에 근심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어미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내쉬지를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들이쉬지도 않았다. 어미의 뺨과 손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감은 눈은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았다. 아아, 엄니, 엄니…. 나는 이제 누구를 의지해서 살라고…. 엄니, 엄니, 엄니 보고 싶으면 어딜 가야 하나, 엄니, 엄니, 어딜 가요 엄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제자들은 초상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다가오는 해월의 환갑을 준비하자며 상주를 떠나 보은 손 씨의 거처로 옮기자고 했다. 덕기도 장인 집으로 떠났고 부녀만 앞재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해월과 윤이는 보은의 손 씨 집으로 살림을 합쳤다.
손 씨와 윤은 일 년 만에 재회를 했다.
“아이고, 윤아….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네 에미도 이렇게 어린 걸 어찌 하라고 그리 급히 먼 길을 떠났단 말이냐.”
윤의 손등을 쓰다듬던 손 씨는 일 년 사이에 윤이 부쩍 큰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키가 커진 것은 물론이지만 더 달라진 것은 윤의 눈빛이었다. 아이의 눈빛이 부쩍 더 깊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윤의 성장과 반대로 손 씨의 건강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기침을 더 심하게 그리고 더 자주 해댔다. 몸도 훨씬 수척해졌다.
살림을 합쳤다고 하지만 손 씨는 병 때문에 도저히 가족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오히려 해월이 아내의 간병을 위해 꼼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손 씨의 해수병은 나날이 깊어졌는데 한 번 기침이 터지면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숨도 쉬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제자들이 여러 가지 약이라고 가져왔지만 깊어 가는 병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해월은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나 하려는 듯이 그녀의 간병에 매달렸지만 옆에서 보는 제자들의 가슴은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3월 21일, 사양하는 해월의 만류를 무릅쓰고 제자들은 환갑잔치를 치렀다. 잔치가 끝나자 해월은 600리 길 정선의 갈래사로 홀로 떠나 49일의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강화의 가르침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육임의 직제를 마련하여 각각 적합한 제자들로 하여금 일을 맡게 하였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교도들을 혼자서 모두 지도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제 새로운 교도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어도 일말의 손색이 없는 수제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동학의 조직을 더욱 확장시키고 또 심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는 다시 익산으로 전주로 삼례로 돌아다니며 포덕에 힘썼다.
새어머니 손씨(1888)
다시 봄이 돌아와 손 씨의 기침은 조금 잦아드는가 싶었지만 이제 열한 살 된 윤이에게 아버지가 수시로 집을 떠난 빈 집에서 몸이 불편한 손 씨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할 일 많은 스승이 병간호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다가 새 부인을 맞아 병석의 손 씨 부인과 어린 윤을 돌보게 하자고 의논을 모았다. 손병희가 나서서 얼마 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자기 누이가 스승님을 모실 만 하다고 하였다. 무자년(1888) 봄, 해월이 전주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삼례를 거쳐 보은으로 돌아왔을 때 해월이 극구 만류하는데도 제자들은 26살 손병희의 누이를 보은으로 데려올 궁리를 했다. 손병희는 윤을 번쩍 안아들고 말했다. 곧 새어머니가 오실 것인데 당분간은 낯설겠지만 얼마 안 가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는 윤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주었다.
윤이가 새끼를 꼬고 있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새엄니 맞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큰어머니나 네 어머니에게 모두 큰 빚을 지었다. 나야 여기저기 바쁘게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내게 또 다른 부인이란 필요치 않다. 그러나 큰어머니 병세가 위중하고 어린 너를 집에 두고 할 일 많은 애비가 걱정 없이 돌아다니기는 어렵겠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이제 열한 살이 되었어요. 도솔봉 아래 살 때보다 많이 크긴 했지요. 그렇지만 바느질에 손님들 뒤치다꺼리에 큰어머니 병수발을 저 혼자 할 수는 없어요. 새어머니가 오셔도 전 괜찮아요. 살다보면 연화 언니처럼 좋은 새아버지가 생길 수도 있고 저처럼 새어머니가 또 생길 수도 있는 일이지요 뭐.”
“이번에 오실 분은 손병희 아저씨 누이로 스물여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구나.”
“연화 언니보다 한 살 더 많네요. 젊은 분이 오래도록 아프지 말고 우리랑 함께 살면 좋지요 뭐.”
윤이는 무언가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냐?”
머뭇거리던 윤이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우리 엄니를 잊어버리실까 봐서요.”
그러더니 소리를 죽여 가며 한참을 흐느꼈다.
해월도 어린 것의 걱정을 알고 나니 목이 메어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어미가 덕기 오라비를 서둘러 장가를 보낸 걸 보면 뭔가 예감을 하고 있었던 걸까? 참 고마운 사람이었느니라. 열심히 살았지. 정말 감사한 사람이야. 덕기 오라비와 너를 낳았고 잘 키워 준 사람 아니냐. 다 꺼져 가던 동학의 포접도 단양에서 네 어미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일으켰지. 어찌 네 어미를 잊을 수 있겠느냐. 윤아, 어머니가 멀리 갔다고 생각지 말아라. 네 어미의 심령은 네 마음속에, 그리고 이 아비의 마음속에 깃들어 사느니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하시는 일이니 너무 연연해하지 마라.”
해월은 꺼칠한 손으로 윤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손병희의 누이 손 소사. 몇 년 전에 혼인을 했다가 남편이 죽는 바람에 아이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친정으로 돌아왔으나 한 번 출가했던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와 사는 것은 여러 모로 힘든 일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눈총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늙어 가면서 혼자 외롭게 살 일도 걱정이었다. 오빠의 부탁으로 해월 선생의 옷을 몇 차례 지어준 적이 있는데 해월 선생이 그 때마다 바느질 솜씨를 칭찬했다고 한다. 오빠 손병희에게는 스승의 칭찬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해월을 옆에서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 아닌가. 손병희는 누이에게 딸들과 아들은 출가했고 열한 살 영민한 딸아이가 하나 있는 자기 스승에게 개가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중을 물어보았다. 출가 전부터 해월의 됨됨이를 들어 알고 있던 손 소사는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리고 청주를 떠나 보은 행 가마에 올라탔다.
해월의 딸, 용담할매 Part 2(7회 ~ 13회) 몰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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