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구중궁궐 창덕궁의 일부 모습
대표들의 낯빛이 바뀌었다. 손병희는 낮에 비몽사몽간에 눈앞에 나타났던 장면이 이렇게 펼쳐지는 게 더욱 놀라웠다. 누군가 괘서를 붙인 후에 쫓기고 있었는데, 손병희 도력으로 무사히 빠져나갔음을 직감하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그는 이번 상소문의 대표로 이름을 올린 박광호 등 다른 대표들을 독려하여 서둘러 짐을 싸서 서울을 빠져나가야 했다.
조정에서는 이제까지 혹세무민하는 서학의 요설(妖說)에 싸잡힌 무지몽매한 집단이며 유리걸식하는 비적떼라고만 치부하던 동학도들이 엄정한 위의를 갖추고 정연한 이치를 펴는 것에 내심 놀랐다. 그들은 질서정연하였고, 나라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비판하고 걱정하는데다가, 최근에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치는 외세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그들의 비판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그들이 집권층을 위협할 수도 있을 만큼 조직력과 논리를 갖추고 있음에 주목하고 경악하였다. 전국 각처의 유생들은 각지에서 동학의 세력이 날로 늘어가고,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먹고 입는 것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그들의 풍속의 괴이함을 들어 하루 속히 동학을 척결해야 된다고 상소하였지만, 화급을 다투는 일은 그 밖에도 많았다.
성균관 유생 이건중이 무뢰배 동학을 토척할 것을 상소하였고, 사간원 대사간 윤길영이 소두 박광호와 그 무리를 잡아들여 엄히 다스려 죄상을 밝히고 난도의 싹을 끊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임금은 동학도들을 잡아들여 엄중 문초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다행히 동학도인 대표들이 한양을 빠져나간 이후의 일이었다.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의 성패는 모호했다. 이번에야말로 임금의 윤허가 있기를 기대한 축은 실패로 보았고, 어차피 하루 이틀 사이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본 축은 얻은 것이 많다고 보았다. 얻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잃은 것은 즉각적이었다. 많은 도인들이 고향집으로 내려갔으나, 이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체포령이 내려져 관에서 이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도소가 설치된 보은 장내리로 모여들었다.
손병희는 일행들과 헤어져 청원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고 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그의 문후를 받고나서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무탈한 것을 보니 다행이네만, 조정에서 체포령이 내렸다는데….”
문간 밖에선 손병희의 부인 곽씨가 안타까움과 그리움, 설움에 겨운 눈물범벅으로 있다가 밥상을 보았다는 기척을 했다.
손병희 마루로 나가 밥 먹기 전 극진히 식고(食告: 밥 먹기 전 기도)를 올리고 곽씨에게도 인사를 했다.
“부인, 잘 먹겠습니다.”
곽씨 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일이건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마치 정담(情談)을 들은 양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밥을 차려 내놓는 일은 응당 아낙의 소임이련만, 동학에 입도한 이후로 남편은 항상 밥상 앞에서 묵상을 하고, 또 부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동학을 하면 사람이 저렇게 달라지나?’ 어머니 최씨에게도 달라진 아들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가슴에 울분을 쌓아 두고 한량패들과 어울리기를 몇 해던가?’ 자기 아들이지만 마음에 품은 뜻이 어미로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건 알기에, 그 뜻을 펼칠 길이 없는 신분의 제약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위악을 떨며 온 고을을 횡행할 때도, 최 씨는 걱정보다 안타까움에 가슴이 미어졌었다. 당사자는 최씨 앞에서 어떤 괴로움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담을 넘어오는 소식으로 손병희의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던 손병희가 어느 날 동학에 입도하였다 하더니, 그날로 사람이 달라졌다. 최씨는 손병희의 태몽을 떠올렸다. (다음호에 계속)
2015/05/16 - [소설/임최소현]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4)-임최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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