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절 저녁 한복차림의 최씨는 동네 부인들과 함께 달마중을 하러 망월산에 올랐다. 온 고을의 부인들이란 부인들은 다 모여 산을 올랐다. 그런데 달이 떠오를 자리에서, 붉고 커다란 불덩이 같은 해가 덩실 떠올랐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최씨의 발을 잡아끄는 것처럼 발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앞으로 자꾸 걸음이 떼어졌다. 붉은 해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자 해는 최씨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들었다. 최씨는 엉겁결에 치마폭을 벌려 그 해를 받아냈다. 그 길로 태기가 있더니, 이듬해 5월 손병희가 태어났다. 상에 귀태가 흐르면서도 기골이 번듯한 것이 천상 대장부 감이었다. 모두들 태몽이 신통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네가 서자만 아니었어도 장원급제는 따 논 당상일 것을···. 이게 다 모두 어미의 업보로세….”
최씨 부인은 속에 있는 말을 내뱉었다. 손병희가 늘 입막음을 하는 그 말이건만, 오늘따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만 것이다.
그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묵묵히 식사를 마친 손병희가 상을 물리고 다시 어머니 앞으로 나와 앉았다.
“어머니, 동학에서는 반상적서의 구별도 하지 않고, 남녀의 층하도 두지 않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귀한 사람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어머니 잘못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저를 태어나게 해 주셨으니 은혜롭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손병희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주름진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살며시 닦아드렸다. 주름진 어머니의 입가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문밖에서 모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곽씨도 하염없는 눈물을 닦아 내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손병희가 자기 남편으로 낙점된 그날의 이야기다. 연전에 아버지는 중매쟁이의 말을 설듣고, 손병희를 찾아갔더란다.
열다섯 살 소년 손병희는 기골이 장대해서 청년 장수 태가 났고, 무엇보다 눈빛이 훌륭했다. 두 말 없이 사윗감으로 삼기로 하고 몇 마디 더 주고받던 중에 그가 서자라는 말을 듣고는, ‘아이쿠!’ 하는 소리도 못 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순간 양반을 희롱한 죄로 관아에 고변이라도 할 작정이었으나 입살에 오르는 건 오히려 자신이 될 것이 분명하여, 헛기침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마을을 빠져 나오려는데 손병희는 불쑥 길목을 막고 나섰다.
“저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놀란 결에 뒷걸음을 치려다 외면하고 서서 헛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자네가 사윗감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제가 서자이기 때문에 혼인이 꺼려진다는 것 아닙니까?”
“자네에겐 미안하게 됐네.”
“그럼 죄송하지만 어르신은 이대로 못가십니다. 단지 서출이란 이유로 혼인을 반대하시는 거라면 죽으면 죽었지, 어른을 못 보내드립니다. 그 우러러 받드는 공자님도 서자 출신인데, 그럼 어르신은 공자도 부정하고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곧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그길로 다시 손병희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되돌아간 아버지는 장래의 사윗감과 사돈어른과 혼인을 약조하고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손병희는 취해 쓰러진 장인어른을 들쳐 업고 시오리 길을 걸어 곽씨 집으로 갔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그날로 억지 장가를 든 셈이라고 두고두고 입살에 올랐다.
그날 밤 한방에 든 손병희를 마주하여 곽씨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저희 친정에서도 말이 많았음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저희 집에 아직도 섭섭한 마음이 남은 건 아닌지요?”
손병희는 아내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부족한 나와 혼인을 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처갓집 울타리 기둥에 열 번이라도 절을 할 판국에 무슨 다른 심사가 있겠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일랑 털어 버리시오.”
곽씨는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남편의 너른 품을 더욱 세차게 파고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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