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며칠 후, 손병희는 이웃마을 친구 서우순 집에 들렀다.
“이리 오너라.”
문을 열어준 것은 여종 말순이었다. 그런데 말순의 행동거지가 영 달라져 있었다. 땟국물 질질 흐르고 다 떨어진 치마저고리 대신 말쑥한 여염집 처자 행색을 하고 있고, 말씨도 굽신거림 대신 어딘가 모르게 당당하고 품위가 생겨 있었다.
“말순아, 이리 와 아버지 친구에게 인사 여쭙거라.”
말순이 손병희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러자 서우순은 어리둥절해 하는 손병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 정월부터 말순이는 종이 아니라 내 양딸이네. 이 세상 누구나 타고날 때부터 존귀한 존재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죄 없이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늙은이 젊은이, 남자 여자 차별하고 억압하는, 말도 안 되는 이런 짓거리들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네.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 자체 하나하나 의미 없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네. 쌀 한 톨, 풀 한 포기, 이슬 하나 우리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들이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늘님으로 공경해야 하네.”
손병희의 가슴에 서우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머리는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자네 어찌 이리 변할 수가 있나? 언제부터 그런 천지개벽할 생각을 갖게 됐나?”
서우순은 만면에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순이에게 물러가라고 하였다.
“나 동학에 입도했네. 동학의 가르침을 처음 펴신 분은 경상도 지역의 내로라하는 유학자의 아드님인데 그분은 동학을 가르치면서 데리고 있던 두 여종 중 한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으셨네. 사람에게 귀천은 없고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씀하시던 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지. 그리고 지금은 그 수제자이신 해월 최시형 선생님이 동학을 이끄시는데, 그분은 수운 선생이 우리 모두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하신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을 이어 누구나 하늘님처럼 대접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강조하고 계시네.”
처음에는 무심히 듣고 있던 손병희는 가슴에 천둥 치는 것과 같은 울림을 받았다. ‘사람의 귀천은 없고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이 봉사 눈 뜬 것 모양으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동학은 삼재팔난이나 면하자는 거라고 들었네만….”
“삼재팔난뿐이겠나. 요즘 우리나라엔 도가 땅바닥에 떨어져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고 어버이가 어버이 노릇을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 못한 지가 참으로 오래 됐네. 우리 동학은 첫째가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고 하늘 모시기를 부모와 같이 하는 것이네. 이처럼 정성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접해야 비로소 태평성세가 온다고 말씀하셨네. 다시 말하면, 포덕천하(布德天下)를 이룬 뒤 광제창생(廣濟創生), 보국안민(輔國安民)하여 백성이 스스로 주인 되는 지상천국을 열어보자는 것이네.”
“…! 거 참, 듣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하네. 지난번 천민이 조카님이 동학은 삼재팔난을 면하려고 하는 거라고 하길래 싫은 소리를 잔뜩 해서 쫓아 버렸는데, 조카님은 어디서 어떻게 동학을 듣고 다니길래 이런 좋은 말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을까?”
“손천민 대접주님이 자네 속을 떠본 모양일세 그려.”
“손천민 대접주?”
“이 근방에서는 손천민 접주만한 분이 안 계실 걸….”
“아무튼 내 당장이라도 동학에 들겠네. 어쩌면 되는가?”
역시 화통한 손병희였다.
손병희는 서우순이 이르는 말대로 그날부터 어육주초(魚肉酒草)를 끊었다. 다가올 입도식을 위해 사흘간 목욕재계를 하고 예물로 비단 한필을 마련하였다.
1882년 10월 5일 손천민, 최종묵, 최동석, 김상일 등이 서우순 집에 모여 손병희의 입도식을 지켜보고 축하하였다. 전도인은 김상일로 정하고 서우순이 입도식을 이끌었다.
그 후 손병희는 건달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과 도박을 일체 멀리하고 집에 칩거한 채 경전을 읽고 주문을 정성껏 외우며 정진하였다. 인물이 인물이었던지라 손병희의 동학 입도 소식은 청주 일대에 삽시간에 큰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얼마나 가랴 하는 뒷말이 무성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손병희의 근기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덩달아 동학의 성가도 드높아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주변 사람들이 손병희에게 해월 선생님을 만나 뵈올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고개를 저었다.
“내 도 닦기에 급급한데, 선생님을 뵈올 겨를이 지금은 없습니다.”
그렇게 꼬박 수련에 전념한 손병희는 입도한 지 만 2년이 지나서야 교주 해월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해월 선생은 각처를 순행하며 교도들을 지도하는 한편, 장맛비에 냇물 불어나듯 늘어나는 도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가르치는 제도를 만드는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충남 천안군 목천 김은경 집에 판각소를 차리고 수운 스승님이 남기신 경전을 인쇄 간행하여 보급하는 일에도 힘쓰고 있었다. 손병희는 손천민 등과 더불어 해월 최시형 선생을 처음으로 뵙고 큰절을 올리며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다음호에 계속)
2015/06/06 - [소설/임최소현]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5회) - 상놈으로 태어난 죄
'소설 > 임최소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8회) - 동학세상의 감동과 경이로움 (0) | 2015.06.27 |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7회) - 도(道)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2) | 2015.06.20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5회) - 상놈으로 태어난 죄 (1) | 2015.06.06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4회) - 임최소현 (0) | 2015.05.30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3회) - 임최소현 (0) | 2015.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