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선생은 깡마른 체격에 흰 무명옷을 입은 보통 중늙은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맑고 형형하게 빛나서, 한눈에 도인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듣던 대로 방 한쪽 귀퉁이에는 언제든 일할 수 있는 모습으로 노끈 더미와 재료가 쌓여 있었다.
그때 마침 손병희는 평소 입지 못하던 비단 옷에 한껏 격식을 갖추느라 성장을 하고 있었다. 외양과 체면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스승을 뵙는 자리이니 예를 갖춘 것이기도 했다. 명주 바지저고리에 명주 중의를 입고, 통영 새 갓을 머리에 썼는데 호박풍잠에 은동곳을 꽂아 한껏 멋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해월을 모시고 있던 도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내 혀를 찼다. 검소와 근면을 강조하는 해월의 가르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낡은 무명옷 차림으로 새로운 제자들을 맞이한 해월은,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도(道)는 사치한 데 있는 게 아니니 항상 몸가짐을 검소하게 꾸미시게나. 그대는 이미 무극대도의 길로 들어섰으니 눈앞의 허영과 사치 대신에 정성을 다해 도통할 일에 집중하시구려.”
손병희는 당황하여 무릎을 꿇고 정중하고 간절하게 청하였다.
“어떻게 하면 도를 통하겠습니까?”
“······.”
해월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손병희는 머리를 땅에 찧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애끊는 목소리로 호소하였다.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저를 보낸 뜻이 있을 것인데, 세상은 아무 이유 없이 저를 핍박하고, 타고난 신분에 따라 이리저리 맘대로 옭아매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제멋대로 살아온 무지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도를 접하고 공부하면부터 한 줄기 광명을 본 듯하여, 죽기로 매달려 왔습니다. 이제 마음으로 헤아려 보는 이치로는 보국안민하고 포덕광제하는 뜻을 알 것도 같으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무도하고 불의한 자들이 뭇 사람의 위에 올라타고 앉아, 쉼 없이 일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을 당연한 법도로 여기는 이 세상이 언제쯤 물러가며, 새로운 세상은 언제쯤 오겠습니까? 오직 주문을 외는 것으로 심신을 단련하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껍질을 깨고 나와 먼저 새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길은 없는지 진실로 알고 싶습니다. 제 안에 들어앉아 있는, 이 바윗덩어리 같이 단단한 아집과 무지를 깨뜨리고 반드시 도를 얻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저를 깨치고, 나아가 저처럼 아집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도를 전하여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마침내 이 낡아 빠진 세상을 새 세상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부디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손병희의 질문 아닌 질문,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듣는 내내 해월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격식 있는 차림새에다 몸집만으로도 군계일학인 거구의 손병희가 마치 배고픈 어린애처럼 간절하게 매달리며 도를 청하고 있었다.
해월은 한여름의 폭풍우 같이 거친 손병희의 언변 깊숙이 도사린 한없는 여림과 질박한 근기를 보았다. 눈에 보이는 저 화려한 치장조차도 그 진심을 가리진 못하였다. 해월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우리 도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지만 도의 참 경지에 이르도록 정진하는 사람은 드무네. 자네가 열심히 수련하고 하늘님의 마음을 회복한다면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 자네로 말미암아 열릴 것이네.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동학의 큰 도를 몸으로 깨치고 세상에 나가 널리 전하시게. 무릇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따로 없고, 하늘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사람이 없는 법일세. 도를 통하는 길이 멀고 높고 신이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세. 이 말을 생각으로 헤아리기는 쉬우나 몸으로 깨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오래 수련하고 탐구하여 터득하는 일을 주로 하시게나. 그대 안에 이미 신령이 있고, 정성으로 시종하면 밖으로 기운 화함이 있으리니 그때라야 비로소 마음에 거낌이 없게 되고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도 깨닫게 될 걸세.”
손병희는 해월 선생의 말씀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해월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말씀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해월은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도(道)는 언(言)과 행(行)이 한결같아야 하네. 행으로서 말하고, 말로서 행에 이르되 그 행이 새로운 습(習)이 되어야 하네. 그대의 뼛속 깊이 박힌 구습을 타파하자면 3년 동안 매일 짚신을 두 켤레씩 삼고,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한 시도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워 보시게나. 도는 말로 하는 게 아니네. 도통의 길은 그대에게 있으니, 얼마나 쉬지 않고 정성어린 실천을 하느냐에 달려있네.”
‘도(道)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마지막 한마디 말이 손병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2년 전 자기가 한 말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말씀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날아갈 듯하였다. 3년이라 하였다. 어찌 길다 하랴. 가야 할 길이 정해진 손병희의 마음은 동학의 진수를 처음 전해 듣던 그날보다 훨씬 더 밝고 넓게 열리는 듯하였다. 마음 한구석의 초조함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해월을 만나고 온 손병희는 이튿날부터 닭이 울기 전에 맑은 샘물을 길어와 청수를 모시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그 이후 식사와 짚신 삼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주문 공부로 일관했다. 무서운 기세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한 켤레 씩, 매일 두 켤레 짚신을 삼았다. 먼저 마디가 세지 않은 짚을 골라 물을 뿜어 촉촉이 젖어들게 한다. 그 짚으로 새끼를 꼰 다음, 새끼 두 줄씩 양발 엄지에 걸고 신발 바닥을 촘촘히 만든다. 그리고 양쪽으로 총을 만들고 뒤로는 새끼 두 줄을 뽑아 올린 후 가는 새끼로 총을 엮어 올리면 짚신은 완성이다.
장날이면 모두 열 컬레의 짚신을 들고 나가, 손병희는 묵묵히 앉아서 짚신을 팔았다. 야무진 이음새와 튼실함 때문에 짚신은 내놓기 무섭게 금방 팔렸다. 그러는 사이에 손병희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저 사는 사람이 주는 대로 물건이든 엽전이든 받아 쥐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내밀 뿐이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과묵하게 변모한 손병희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말이 사라진 대신 범접치 못할 위엄마저 느껴지는 그였다.
어느 날인가, 눈이 하얗게 쌓인 새벽, 살얼음 섞인 샘물을 길어 집으로 오면서 하얀 옷을 입은 소나무 숲을 보았다. 소나무들이 흰옷 입고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는 새삼스레 소나무 숲을 쳐다보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갔다. 손병희는 그 자리에 서서 꿩이 날아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새의 궤적 너머 하늘, 하늘 아래 소나무, 내가 걸어온 발자국…. 푸른 하늘과 푸른 소나무와 하얀 눈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 허물어짐 속으로 손병희는 자기 자신의 육신마저 가뭇하게 지워져 아득해짐을 느꼈다. 순간 오직 하늘님만 으로 가득 차오른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내안의 하늘님, 그리고 밖의 하늘님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 진정한 도를 향한 하나의 고비를 넘는 순간이었다. ( 다음호에 계속 )
2015/06/13 - [소설/임최소현] -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6회) - 상놈으로 태어난 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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