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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임최소현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9회) - 수심정기(守心正氣)의 경지



손병희도 장내리 도소에 들어와 해월 선생을 뵈었다. 그리고 광화문 복합상소 때 일들을 낱낱이 고했다. 덧붙여 자신이 광화문 복합상소 중에 경험했던 신비한 체험에 대해서도 여쭈었다.

제가 체험했던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귀신이라도 되었던 것일까요? 외국 공사관이나 교회당 진짜 괘서가 걸렸던 게 사실이라면 제가 경험했던 일도 사실이라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해월 선생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하늘님 기운의 조화이네. 내 몸에 탁기가 쌓이면 지혜의 눈을 가리게 되고, 내 기운을 맑고 밝은 경지에 들게 하면 하늘님의 신령한 기운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자유자재할 수 있네. 그 경지를 곧 수심정기(守心正氣)의 경지라 하지. 무릇 우리 도를 닦는 이라면 수심정기의 경지를 체험하고 행할 수 있어야 하네. 수심정기의 지극한 경지에서 신력이나 무불통지의 신묘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 그것은 모두 한울님의 능력이요, 한울님이 하시는 일이니.”

그렇다면 제가 신통력을 길러도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손병희가 기쁨에 차서 되물었다. 해월 선생은 금세 다시 정색하고, 이내 매서운 눈빛으로 손병희를 쳐다보았다.

옛 성인들은 신통력을 경계했다네. 신통력 자랑하지 않고입 밖에도 내지 않았을 뿐더러 혹시나 신통력 생긴 걸 누가 알까봐 경계했다네.”

손병희는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통력은 수련과 공부의 초기에 일어나는 일이니, 그것에 빠져 그에 의존하게 된다면 높고 깊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필연코 재앙이 따르게 마련일세. 원래 인간은 조금만 능력이 생기면 자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법. 일시적으로 얻은 능력으로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네. 자네도 직접 보고 겪지 않았나. 함께 수도하는 몇몇 도인들이 자기로부터 나오는 신통력이 마치 도의 최고 경지인 양 생각하고 주장을 앞세우다가 마침내 교문을 따로 세워 나가는 것을. 그들의 말로가 어떠하던가? 아직 그 끝에 당도하지 못하여 지금도 그것이 최고인 양 좇아가는 이들도 금방 절벽 앞에 선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할 걸세.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그때부터 거짓으로 기적을 만들어 내는 단계로 나아갈 테지. 도를 이루려는 자는 신통과 이적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은 천고의 진리일세. 일찍이 수운 선생께 나아가 공부하던 당시에 밤마다 선녀가 환한 빛에 싸여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나라 음악인 듯한 음악이 용담 골짜기를 가득 채우기도 했네. 그러나 수운 스승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에게 일절 그것들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수심정기하라, 준엄히 말씀하셨네.”

해월 선생은 신통력에 주의를 빼앗기고 자만하면 마귀와 같은 삶 속으로 떨어지니 거듭 수심정기에만 힘쓸 것을 강조해 말씀하셨다. 손병희는 해월 선생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그는 매일 아침 청수를 모시고 수련하며 수심정기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몸을 바르고 청결하게 하고, 매 순간 겸손한 태도로 마음을 맑고 밝게 유지하도록 애썼다. 그리고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해월 선생을 보필하였다.

보은 장내리에는 수 만 명의 도인들이 모여 서양 세력과 일본 세력을 배척한다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내걸었다. 또 조정을 향해 네 가지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교조 수운 최제우 대선생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 둘째 동학 도인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는 것, 셋째 외국의 세력은 물러가라는 것, 넷째 외국 상품을 배격하고 목면을 입으며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것 등이었다.

은 장내리는 나날이 몰려드는 도인들로 그야말로 장맛비에 골짜기 물이 불어나듯, 7년 대한 마른 들판에 들불이 옮겨 붙듯 하였다. 엄정한 질서와 규율로 많은 사람들의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나, 장내리 일대 민가와 초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었다. 긴급히 각 접에 통문을 하달하여 아직 출발하지 않는 접은 각 지역에 그대로 머물게 하고, 오는 도중에 있는 무리들은 가급적 돌아가 다음 연락을 기다리도록 했다. 그러나 관에 쫓겨 떠돌던 도인들은 그러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들이 몰려든 곳은 금구 원평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전라도 지역 도인 중심으로 역시 수만 명의 도인이 모여 보은으로 향하려다 대도소의 통문을 받고 머물고 있었다. 그곳의 열기는 보은을 뛰어 넘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격앙되어 있었다. 보은과 금구 사이에는 공사 간의 파발이 끊임없이 오가며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18933월 아직은 쌀쌀했지만, 바람은 한결 보드라웠다. 사람들의 마음도 민들레 꽃씨처럼 한껏 부풀어 보은 장내리와 금구 원평 들판은 하나의 축제의 장이 되어 갔다. 각 접별로 패를 지어 포 이름을 적은 깃발을 들고 모여든 이들이 다수였으나, 이 기회에 동학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동학에 가담하고자 하는 이들도 너, 나 구별 없이 모여 들었다. 재기가 있으나 뜻을 얻지 못해 우울하게 지내던 이들탐관오리들이 횡행하는 것을 분통히 여겨 목숨을 던져서라도 의를 세우려 하는 이들, 오랑캐들이 우리의 이익을 통째로 빼앗는 것을 통절히 여겨 오던 이들탐학한 오리에게 침탈되고 학대받았으나 어디에도 호소할 바가 없는 이들무력으로 협박받고 억누름을 당하여도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이들양반의 매에 죽기로 예정되어 있던 이들영읍의 속리로서 직언하다 쫓겨난 이들유무상자의 동학 풍속에 감읍한 이들, 입도한 그날부터 반상의 구별없이 맞절하는 풍속에 감읍한 이들. 사연도 제각각 한이 없고, 생각하는 양도 다 달랐으나, 한결같은 것은 동학이 그리는 세상에 희망을 걸고 기쁨에 넘치는 그것이었다.

선무사 어윤중은 수차례의 담판을 하며 동학을 이끄는 이들과 평범한 도인 무리들을 세세히 살펴 몇 차례의 장계를 올렸다. 어윤중의 최종 결론은 이것이었다.

비록 무기를 지니지 않은 듯 하지만 성에 깃발을 꽂고 망을 보고 살피는 것은 자못 전쟁하는 진영의 기상이 있습니다부서가 서로 이미 정해져 행동거지가 어긋남이 없어 글을 하는 사람이 오면 글로써 접대하고무술을 하는 사람이 오면 무술로써 접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방법이 있으니함부로 무력을 사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저희들의 이 집회는 조그마한 무기도 가지지 않았으니이는 바로 민회(民會)입니다일찍이 여러 나라에도 민회가 있다고 들었고조정의 정령(政令)이 백성과 나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래의 일입니다어찌 저희들을 도적의 무리[匪類]라고 지적합니까?’ 하고 하소연합니다.”

어윤중은 끝내 쓰지를 않았지만, 행간의 뜻은 간절하였다. ‘동학의 무리들이 자유로이 모여 공부하게 하고, 그들의 뜻을 펴게 하소서.’

그러나 조정의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각자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케 하라. 이 명령을 듣지 않으면 반역의 죄로써 처리하겠다는 것을 엄히 공포하라.’

마침내 해월은 도인들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면서 깊이 절망했다. ‘이제 이 보은에 모인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나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밀물이 닥쳐올 것이다.’ 막아야 하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디서 첫 번째 파도가 시작될 것인가일 뿐. 어쩌면 그것도 이미 충분히 예견된 건지도 모른다. 고부접주 전봉준은 끊임없이 자신의 계획을 전해 오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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