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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임최소현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0회) - 농민반란의 서막

1894110, 마침내 큰 물결 하나가 밀어 닥쳤다. 고부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너무 많아 기록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치부와 수탈 행위들, 전운사 조필영의 세미의 이중 징수, 부당한 운송비용 부과를 바로 잡고자 일어섰다 하였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올라가 전주성을 거쳐 서울로 올라간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고부성 점령은 고부의 동학 도인들과 농민들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전봉준 등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첨하고 인민을 침탈한 이속을 징계할 것,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향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고부에서의 봉기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고부 지역 동학도와 농민들의 결합은 순조로웠다. 잠재된 농민들의 역량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박한 고부 농민들은 군령을 넘어서는 것을 주저했다. 게다가 도망간 조병갑의 후임으로 박원명 신임 군수가 부임하여 지금부터는 여러분과 지방의 시정을 의논하려하니 민군 중에서 이부(吏部) 이하 중요한 자를 선발하라.”는 방을 내붙이고 해산을 종용하자 농민들은 현저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사태의 수습을 위해 들어온 안핵사 이용태가 꺼진 불씨에 불을 지폈다. 그는 800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이미 소요가 잠잠해진 고부의 마을마다 농가마다 들쑤셨다. 동학도와 봉기 농민들을 찾아 두들겨 패는 것은 물론이요,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민심은 사납게 들끓었다.

전봉준은 오래전부터 구상한 대로 동학군을 이끌고 무장의 손화중에게 갔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손화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손화중은 전봉준의 든든한 후원자이지 호남 일대 동학 조직의 핵심 매듭이었다. 10년도 전에 입도한 손화중은 전봉준보다 나이는 어렸으나 동학 교단 내에서 그가 직접 관할하는 조직도 방대할뿐더러, 인근의 대접주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도 바로 손화중이었다. 손화중은 관내에는 물론이고 호남 일대 전체 동학의 조직에 기포의 뜻을 전하고 호응할 것을 요청했다. 이미 언질을 하여 둔 터라 모이는 날짜와 장소를 통지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정해진 사람들이 사방으로 통문을 품고 떠나갔다.

321일 무장 공음치면 당산 마을에는 4000여 명의 동학도들이 모여들었다. 고부봉기는 거의 전봉준 단독의 일이었으나 무장에 모인 동학도들은 각 포별로 제법 정연한 대열을 이루고 모여 온 동학도들 중심의 농민군이었다. 기포한 동학군은 기포의 뜻을 밝힌 포고문을 공포하고 즉각 고부와 흥덕을 점령하고, 325일 백산으로 집결하였다. 뒤늦게 합류한 각 포의 동학도들이 속속 모여들자,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의 대접주들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관령에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 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그리고 비서로 송희옥과 정백현으로 핵심 지도부를 구성하고, 각 포별로 지휘자를 임명하였다. 8,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백산은 쩌렁쩌렁한 함성으로 일시에 거대한 사람의 산으로 변하였다. 식량을 조달하고 군기를 제작하였으며, 군령을 공포하고 모든 농민군들이 기포의 뜻을 간결하게 알 수 있도록 행동강령을 간략히 제시하여 암송하게 하였다.

전격적인 동학농민군의 기포에 놀란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병 700명을 주축으로 보부상대 1천여 명으로 토벌군을 편성하여 동학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이들에게 놀라 쫓기는 척하며 황토현 일대로 유인, 한밤중의 기습전으로 토벌군을 여지없이 격파해 버렸다. 46일 밤에 시작된 황토현에서의 싸움은 다음날 날이 밝으며 끝이 났다. 관군과 향병의 시체가 산을 이룬 황토현은 또다시 농민군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동학군은 전라도 남부 일대를 휩쓸며 고을마다 점령, 군기고를 열어 무기를 보강하는 한편, 군량 이외의 곡식은 풀어 농민들을 구휼하였다. 또한 뒤늦게 합류한 동학의 포들도 독려하여 동학군 편제를 강화하고, 흩어지고 모이기를 거듭하며 420일 장성 황룡천 부근으로 집결했다. 22일에는 서울에서 급파된 홍계훈 휘하의 경병 선발대를 상대로 일전을 벌였다. 지방군과 향병 중심의 군대가 아닌 정예병의 우세한 무기와 싸움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이방언 대접주가 준비한 장태가 위력을 발휘하여 경병마저 격파해 버렸다. 전봉준은 마침내 북상을 명령하였고, 전주까지 이르는 길에는 환영 나온 농민군 인파뿐, 그들의 앞길을 막는 관군은 아무도 없었다. 427일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