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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임최소현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1회) - 청일전쟁과 남북접 봉기



전봉준이 무장에서 봉기하였을 때 해월 선생은 충청도 청산 문암리(문바윗골)에 있었다. 전봉준의 봉기 소식을 듣고 해월 선생에게는 충청도 서부와 경상도, 경기도와 강원도 각지에서 연일 어찌할 것인지를 묻는 연통이 들어왔다. 한편에서는 많은 동학 도인들은 전면적인 봉기를 우려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기회에 전국적으로 동학 조직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해월 선생은 전봉준에게 연락을 취하여 신중히 처신할 것을 요구는 한편, 사태의 흐름과 관의 동태와 추이를 살피면서 전 동학 도인들에게 조직의 상황을 점검하고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4월 말, 서울에서 한 노인이 말을 타고 해월 선생을 찾아왔다. 키가 구부정하고 누구 하나 경계심을 자아낼 여지가 없는 상노인인 김 노인은 해월 선생과 밤을 새다시피 이야기를 나누고, 이튿날 새벽에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김 노인은 왕비의 외척 민씨가의 집안에서 청지기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는 딸 하나만 두고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6촌 동생으로부터 맞아들인 양자가 마침 동학도였다. 뒤늦게 얻은 아들의 영향으로 그 역시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입이 무거웠고, 맡은 일에 충직했기 때문에 민씨 집안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또한 그의 외동딸이 궁궐을 드나들며 민비와 민씨 집안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김 노인은 한양 정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소상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해월 선생은 밤을 지새운 탓에 초췌하고 굳은 표정으로 아침밥도 잘 드시지 못했다. 해월 선생 곁을 지키던 손병희는 무슨 일인지 고 싶은 것을 참고 기다렸다. 드디어 해월 선생이 입을 열었다.

올 것이 왔구나.”

무슨 일인지요?”

조정에서 청국 군대에 원조를 요청했다는군. 이제 관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자인한 셈이지.”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군요.”

청나라 군대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왜 나라일세. 왜 나라는 근래 우리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 않나, 사사건건 우리 나랏일에 간섭하고 자기네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지.”

해월 선생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자국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청국군보다도 더 빨리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에 진을 쳤다. 해월 선생은 이 급박한 사실을 전봉준에게도 알렸다.

전봉준은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한 정보를 듣고 빠른 결정을 내렸다.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동학군들이 아닌가? 더 이상 외국 군대들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권을 훼손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 전주성 안팎에서 대치하며 서로 큰 피해를 입히는 공방전을 벌이던 정부군과의 싸움을 멈추고 전라감사 김학진을 상대로 화약을 추진하였다. 김학진 역시 조정에서 청군을 불러들이기로 한 조치에 몹시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전봉준의 사려 깊은 제안을 접한 김학진은 감격하였다.

공의 우국충정을 내 반드시 기억할 것이오.”

한양의 조정에 전달할 사항들을 정리하고, 김학진과 몇 차례 문안 조율을 하여 최종 요구 조건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초토사 홍계훈이 화약의 조건은 물론, 그 자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며 동학도들의 토멸을 주장하였다. 김학진은 청군과 일본군의 동향을 말하며 결국 설득에 성공하였다. 김학진은 동학군의 요구조건을 조정에 품하여 승인을 얻겠다고 약조하였다. 또한 이후 동학도의 행동 방향으로 전봉준은 일단 전주성을 다시 관군에게 넘겨주고 해산하여 각기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겠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대신 관군은 해산하는 농민군을 추격하여 체포하지 않을 것과 이후 동학도와 관의 협의할 기관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도와 농민군들이 행정에 참여하도록 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학진은 자신이 관할하는 전라도 지역에 대해서는 이를 직접 약조하고,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역시 조정에 품하겠다는 말로 대신하였다.

전주성에서 철수한 동학군은 그러나 곧바로 흩어지지 않고 각기 핵심 근거지로 돌아가 가능한 군세를 유지하면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관 협치의 행정을 시행해 나갔다.

전봉준은 전주 감영 내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각지를 순행하며 집강소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는지 확인하였다. 동학군들은 엄격한 규율과 함께, 차별 없는 자치 활동으로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농민들을 위하고 탐관오리들을 제거하는 개혁으로 더욱 큰 지지를 얻게 된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동학군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삼남을 중심으로 계속 확대되어 나갔다.

그러나 농민들의 평화와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6월 하순 무렵, 김노인은 사색이 되어 해월 선생을 재차 방문하였다. 해월 선생은 이번엔 곁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았다. 김노인은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일군 부대가 새벽에 궁궐의 수비병을 제압하고 경복궁을 무단히 점거하여 전하를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원군을 납치하다시피 입궐하게 하여 자기들에게 동조하는 인사들로 내각을 조직하게 하고, 아산에 와 있는 청병을 소탕하기 위해 출병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청국에게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아산현 앞바다에서 청국의 함선에 공격을 가하여 수천 명의 청국군을 수장시켰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해월 선생은 충격을 받은 듯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

우리 땅에서 기어이. 피 터지고 죽어나는 것은 우리 땅, 우리 백성들뿐이겠구나.”

선생이 예상한대로 우리나라 땅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아산, 성환에서 싸움을 시작하여, 평양전투에서 청군 본대를 대파한 후,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남의 나라 군대가 일으킨 청일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우리 조선 백성들뿐이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임금을 볼모로 잡은 일본군은 이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식량과 전쟁 물자들을 조선 백성으로부터 탈취해 갔다. 조선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함께 이제는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신음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서쪽 바다를 장악하고, 청군 군대를 국경 밖으로 밀어내고 만주지역까지 점령해 들어간 일본군은 본토에서 후비보병으로 특별 부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다시피 한 동학군 토벌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추가 병력이 인천에 상륙하여 남하를 시작했고, 부산포에도 곧 일본군이 상륙한다는 소식이었다.

곧 이 소식이 해월 선생 쪽에 전해졌고, 해월 선생과 모여든 제자들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지난봄의 거사에 잠잠했던 경상도 쪽에서도 도인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더니 경복궁 점령 소식에 분개한 경상도지역 도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기포가 일어나 유림들과 크게 부딪치고 있습니다. 호서와 호남 지역에서도 동학도와 유림이나 민보군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크고 작은 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관군을 앞세워 동학을 진압한다고 공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흩어졌던 동학도인들이 속속 다시 모여 대오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근래 대체로는 동학도가 정부와 화해하여 평화를 찾아가고 있는데도 일본군이 저리 나오는 것은 이 기회에 우리 동학의 기세를 꺾어 놓고 조선을 집어 삼키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봄 거사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관군이 우리 동학도의 세력을 얕보았기 때문이고, 언제나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군들이 속전속결로 호남 지역을 석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국 각지에서 정예 관군이 사방에서 압박하여 들어오고, 게다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실질적인 지휘를 한다면,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계속 최시형 선생 곁을 지켜온 손병희가 말했다.

그 말씀도 이해가 갑니다만, 더 이상 동학 도인들이 물러날 데가 없습니다. 일본 군대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면 쉬이 물러가겠습니까? 결국에는 우리 도인들을 일일이 찾아내 도륙하려 들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호남 동학군과 함께 모든 지역의 동학군들이 호응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저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도인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해월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가 우리를 물어 죽이고자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들은 이미 미친 짐승입니다. 말로서 교화하고 귀환하기를 바라기는 이미 늦었지요.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모두 함께 싸우기로 합시다.”

해월이 낮은 음성으로 힘주어 이야기하자, 좌중이 일시에 숙연해졌다. 월은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호서와 경상, 강원, 경기 일대의 동학군 전체를 통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모든 도인들도 총기포하여 보국안민의 대열에 동참하라는 통유문을 각 접에 하달하였다. 소식을 듣기 위해 각처에서 보은으로 몰려들었던 도인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의 봇짐 속에는 접주와 육임 임명장이 수북히 들어 있었다.

손병희는 5개의 큰 포를 중심으로 하여 북접군을 편제하고, 오색 깃발로 구분하였다. 푸른 깃발은 선봉 부대인 정병수 포이고, 검은 깃발은 좌익 이용구 포, 흰 깃발은 우익 이종훈 포였다. 또 전규석 포는 붉은 깃발로 후군을 맡았고, 통령 손병희는 중군을 거느리고 황색 깃발아래 포진하였다.

손병희 휘하에 편제된 동학군만 1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손병희는 각 요충지마다 동학군을 주둔하게 하는 한편 전봉준 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정예부대를 편제하여 청산으로 집결케 하였다. 청산을 출발하여 전봉준을 만나기로 한 논산으로 향하는 길에 오색 깃발 나부끼며 끝을 모르는 동학군의 대오가 길을 가득 메웠다.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일본군들과 관군들의 횡포에 신음하고 반발하던 농민들 다수가 늠름한 대오에 속속 합류하였다.

청산을 출발한 손병희 부대는 영동 심천과 진산을 거쳐 음력 1016일 논산으로 당도하였다. 전봉준 역시 직속부대 4천 명을 이끌고 1014일 전라도 삼례에서 출발하여 여산 강경을 거쳐 은진 논산으로 북상해서 논산에 당도하였다. 전봉준은 손병희가 이끄는 대군을 보고 감격하였다. 군세도 군세려니와 해월 스승님이 드디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 더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