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청혼
구례 구만촌에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양또치 집 옆에 아담한 초가집을 짓고 조삼도 가족들이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양계환과 조두환은 자주 구례에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날도 양계환은 광양 월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올라와 구례 구만촌 가까이에서 내렸다. 늦여름 무더위도 가시고 가을 하늘이 파란 것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섬진강 가에는 빨래하는 아낙들이 있었다. 강가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 앞서 가는 두 여인이 있었다. 머리에는 빨래한 것을 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걸음이 빠른 양계환이 그들을 지나쳤다. 계환은 부끄러워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여인들인지 궁금하였다. 고샅으로 들어섰을 때 양계환은 걸음을 멈추고 먼발치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여인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모녀지간인 듯싶었다. 처녀는 단정하고 고왔다. 속으로 구례엔 미인들이 많구나 했다. 아버지도 첩을 여기서 얻었다. 지금 그 첩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지만.
먼발치에서 한번 봤을 뿐인데도 머릿속에서 처녀의 고운 자태가 떠나질 않았다. 그날 이후로 양계환은 부쩍 더 구만촌을 찾았다. 올 때마다 빨래터에서 그 처자를 볼 수 있을까 마음 졸였지만 그날 이후론 처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 처자가 들어간 고샅길 주변도 몇 번이나 가 봤지만 처자 얼굴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양계환이 하루는 양또치에게 그 고샅에 큰 집 처자가 어떠냐고 물었다.
“아, 임정연 어르신 댁 서엽이 아씨 말인가요?”
“서엽이….”
“근디 서엽이 아가씨를 왜 물어요?”
“아니 그냥, 그 처자가 좀 궁금해서요.”
양또치는 허허 웃었다.
“아따, 우리 도련님! 그 처자를 어찌 또 보고 맘에 품었는갑소. 아, 글먼 지가 다리라도 놔 드리까?”
양계환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 답했다.
“야.”
“그 집이라면 나도 잘 앙깨 도련님 댁에서 허락만 허먼 집사람을 중매쟁이로 보내도 되꺼요마는….”
그 말을 들은 양계환은 마음이 바빠졌다. 바로 월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께서는 마침 안방에 계셨다.
“어무니, 지도 인자 장개나 가 볼라요.”
“야가 갑자기 자다가 봉창 뚜드는갑네! 뜽금 없이 뭔 장개다냐? 차근차근허니 이약을 해 봐.”
“어무니, 구례에 지 맘에 쏙 드는 처자가 있당깨요. 어무니가 어찌 쫌 해보이다!”
“그래, 어떤 처자가 우리 아들 맘을 훔쳤을꼬?”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지금껏 혼인 이야기를 할 때는 아무 반응이 없더니만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어 반가웠다. 어머니는 서둘러서 구례 임정연 댁으로 청혼을 넣었다.
구례 임정연의 집에서는 갑작스런 청혼을 받고 놀랐다.
임정연이 아내에게 말을 붙였다.
“여보. 이 청혼을 어찌하면 좋겠소? 양또치 마누라 이야기로는 그 집이 광양에서 큰 부자라 합디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아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집이 부자인 거야 이 근동 사람은 다 알지이다. 하지만 난 시아부지 자리 땜세 싫구만요. 그 아버지란 양반이 여그서 귀동이 어매를 첩으로 데려간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이다. 우리가 다 아는디.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면 온갖 첩을 들여서 우리 서엽이 애간장을 태울 것인디 그런 자리로는 돈이 억만금이래도 보내기 싫구만요.”
“그럼 이 일을 어찌 헌다 ~ ”
“어쩌긴 뭘 어째요? 제가 중매쟁이를 불러 잘 말헐 것인께 그것은 걱정 마소.”
구례 임정연의 집에서 며칠 후 거절의 답이 왔다. 이유는 궁합이 안 맞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절의 표현일 뿐이었다. 양계환과 그의 어머니는 크게 상심했다.
양계환은 한동안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만 뒹굴거렸다. 여러 날이 되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아들을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봉강의 친구들까지 집으로 불러 들였다. 친구들하고 술이라도 먹으라고 어머니는 아들 친구들이 올 때마다 술상을 잘 차려 주었다. 자주 친구들을 만나고 시간이 흐르자 구례 처자는 조금씩 잊혀졌다. 대신 석훈이와 만나기만 하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두 사람은 나라 돌아가는 꼴은 엉망이고 유학 경전 공부도 세상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유석훈이 양계환에게 동학을 소개했다. 구례에서 동학 공부하는 날이라고 같이 가자고 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모두 믿기는 것은 아니나, 친구의 말이 간절하여 두말하지 않고 그 길로 바로 따라 나섰다.
그런데, 놀라웠다. 동학 공부하는 집이 임서엽의 집이었다.
‘애써 잊었던 임서엽 처자를 볼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인연인가? 하지만 나와 혼인은 할 수 없는 여자다. 이 집에선 이미 나하고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 집 사람들은 내가 청혼했던 광양 월포의 양 도령인지 모른다.’
계환은 다시 속이 쓰렸다. 임서엽이와 인연이 아닌 줄 알면서도 두근거리는 맘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계환의 착잡한 속내를 알길 없는 석훈은 찾아드는 청년들과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청년들은 속속 모여들었다. 남원 사람 류태홍이 먼저 인사를 청했다.
“안녕하시오. 난 류태홍이요. 예전부터 만나고 싶었소. 요즘 나라 꼴이 말이 아니지라. 다들 어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궁리가 많지라. 나도 그러요만….”
유석훈이 말을 걸었다.
“그리 말씀 허시는 걸 봉깨, 그쪽은 뭔가 질을 찾으셨는갑소~이!”
빙긋이 웃으며 류태홍이 대답했다.
“그러지라. 지가 길을 제대로 찾았지라. 혹 들으셨는가 모르겄는디 우리가 살 길은 동학이요. 동학은 사람이면 누구나 살 길을 알려 주지라. 요새 관것덜이랑 왜놈, 양놈, 되놈 등살에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인디 우리는 최제우 대선생이 알려주는 우리 교, 동학으로 똘똘 뭉치기만 하면 살 길이 환히 보이요. 그런게 그대들도 동학에 들어오시요.”
옆에서 눈을 크게 뜨고 듣던 양계환이 물었다.
“긍깨 동학에만 들어가면 저 관것들한테도, 왜놈, 되놈, 양놈들한테도 안 당하고 살 무슨 수가 생긴단 말이요?”
“그러지라. 우리 도학 우리 학문인 동학으로 똘똘 뭉쳐 양반 상민 가리지 않고, 부자 가난한 사람 가리지 않고 서로서로 도와 잘 살 방도가 있소.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 돕고 살면 우리 힘으로 잘 살 수 있지라. 동학이 궁금하면 다음 공부 모임에도 꼭 오시오.”
다음 주 목요일(6월 18일)에 4장 개벽운수 편이 연재됩니다.
2015/05/29 - [소설/유이혜경] - 섬진강은 흐른다(6) 2장 광양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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