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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김현옥

작품 [님, 모심] -11회 해월, 다시 일어서다(김현옥)

 

 

해월, 다시 일어서다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다시 용담으로 갔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 스승님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먼 길을 떠나 용담은 인적이 끊겨 있었다. 언제 귀환할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관의 지목이 들끓고, 가정리 일대 최씨 문중과 수운 스승님의 부친인 근암공의 제자들이 수운의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질색을 하는 바람에 기약 없이 용담을 떠난 것이라 했다.

금등골로 돌아온 해월은 다시 일상적인 삶과 수련을 병행하며 공부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7월 어느 날 묵상에 잠겼다가 스승을 생각하자, 경주 서면 박대여(朴大汝) 집이 눈앞에 환히 보였다. 급히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과연 그곳에 수운 스승님이 와 계셨다. 전라도 남원 땅에서 겨울을 지내고 여름이 되어서야 경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내가 여기 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

수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깊은 묵념 중에 스승님을 생각했더니 문득 이곳이 보였습니다.”

나는 스승에게 천어를 들은 것과 등잔 기름이 마르지 않았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대는 큰 조화를 받은 것이니 기뻐할 일일세.”

스승님의 인정을 받으니 내 마음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런데 스승님은 잠시 뭔가를 깊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그대가 들은 천어는 그날 그 시각 내가 남원에서 수덕문(修德文)을 지을 때 읊은 구절일세.”

? 하오면.”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면 그때 제가 들은 것은 천어가 아니었습니까?”

스승님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문득 깨달음이 왔다.

제발 찬물에 목욕하는 것만은 그만 두세요. 건강 해치십니다.’ 얼음물을 깨고 목욕하는 것을 알고 내게 채근하던 아내의 말이 바로 수운 스승님의 말씀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님께 크게 절하였다. 스승님은 그 자리에서 공손히 마주 절하여 내 절을 받으셨다.

 

스승님과 한울님이 둘이 아니요, 스승님 말씀이 한울님 말씀과 둘이 아니며, 나와 스승님이 또한 둘이 아닌 것을.’ 천어에 마음을 빼앗겼던 지난날의 장면이 한순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천어에 대해 깨달은 바를 수운 스승님에게 말했다.

수운 스승님은 잠시 묵념을 하다가 말씀하셨다.

그대의 경지가 한 고비를 넘어섰도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리라. 그대는 영덕과 영해와 내륙 지역을 순회하며 포덕에 힘쓰라.”

 

친구에게 벼 100석을 빌려 노자로 삼고, 7월 하순부터 포덕에 나섰다. 내가 순회하고 포덕하자 가는 곳마다 도인이 늘어났다.

용담에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차고 넘치자 이번에는 경주 관아에서 스승님을 잡아들였다. 사술로 민심을 현혹한다는 죄목을 붙였다. 최자원과 백사길, 강원보 등이 수많은 도인을 이끌고 와 항의하자, 이레 만에 내보내주었다. 스승님은 한동안 제자들의 왕래를 금하게 하더니 다시 용담을 떠나 흥해 손봉조 가에 처소를 정하였다. 나는 스승님의 명에 따라 용담을 오가며 스승님의 가족들을 보살피는 한편으로 용담으로 찾아오는 도인들의 공부를 돕는 일도 도맡았다.

 

 

그해 섣달 그믐께 스승님은 경상도 일대 각 지역을 맡아 도학을 전수하는 접주를 임명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들지 못하였다. 오히려 스승님의 명을 받아 포덕에 힘쓰느라 다른 겨를이 없었다.

계해년(1863) 7, 스승님은 내게 뜻밖에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이라는 중책을 맡기셨다. 북도중주인의 뜻을 물었어나 훗날 알게 되리라 하시고 연이어, 해월(海月)이라는 호까지 내려 주셨다. 그리고 이제부터 도의 일을 신중히 하고, 더욱 더 스승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라 하셨다.

말씀이 엄하고 예사롭지 않아 그 뜻을 다시 여쭙자 스승님은 노기를 띤 것 같은 얼굴로 묵념에 들었다가, 다시 편안한 얼굴로 돌아와 말씀하셨다.

경신년(1860) 4월에, 한울님은 나를 만나 성공하였다 하셨네. 나는 그대를 만나 성공하였네. 이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대의 운수일세.”

나는 수운 스승님께 큰절을 올렸다. 그날 스승님은 자리를 함께한 도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앞으로는 누구든 검곡을 거쳐 용담에 찾도록 하라.”

 

그날 이후 나는 용담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지난 8, 보름을 앞두고 늦은 밤에 용담에 당도하여 문안을 여쭈었다. 스승님은 좌우를 물리고 나와 독대하여 대좌하였다. 스승님은 심고로써 나와 스승님의 기운이 둘이 아님을 보이시고 스승님의 조화가 나에게 이르렀음을 일러 주신 후에 도운이 모두 나에게 임하였으니 힘써 지켜 나가라 하셨다. 그 시각 이후로 정좌하여 묵상에 잠긴 채 밤을 지새웠다. 나 또한 스승님과 마주 앉아 묵묵히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었다. 신새벽 닭 우는 소리에 문득 스승님의 기척이 있어 눈을 떴다. 스승님은 우리 도가 유불선 세 도를 겸하여 나온 이치를 말씀하시고, 경신년 이후 스승님이 지나온 내력을 낱낱이 말씀해 주셨다. 이미 알고 있던 행적은 물론이고, 누구도 알지 못하던 은적암 이야기며 지극한 한울님의 기운을 받던 정경까지도 일일이 일러 주셨다. 그러는 사이에 훤히 날이 밝아 왔다. 스승님은 책상 아래에서 수심정기(守心正氣)’ 넉 자가 쓰인 종이를 꺼내 전해 주셨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어 수명(受命)’ 두 글자를 써서 주었다. 그 도저한 과정이 모두 나에게는 꿈인 듯 생시인 듯 아득하였다.

 

그리고 스승님은 다시 한식경에 걸쳐 묵상에 드셨다가 문득 시 한 수를 지어 쓰셨다.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용담수류사해원 검악인재일편심)’

스승님의 말씀이 뒤따랐다.

이 시는 그대의 장래를 위하여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비결이다. 앞으로 더욱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라. 그대 장래의 일이니 길이 지켜서 바꾸지 마라.”

 

 

11월에 스승님은 내게 그동안 필사로만 배포하던 당신의 글들을 인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그 글들을 필요로 하는 이도 많아졌거니와 필사하는 사이에 빠진 글자도 생기고 혹 잘못된 글자도 섞이게 되어 수운 스승의 본뜻이 잘못 전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염려하던 스승님은 경전을 보급하도록 당부했다. 나는 몇 명의 도인들과 의논하여 판각할 일정을 잡기로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용담정에서 뜻밖에도 수운 스승이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경전 간행도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스승님은 한양으로 압송되다가 철종 잉금이 승하하자 다시 대구의 경상 감영에 갇혔다. 변복을 하고 겨우 스승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내가 감옥 포졸로 변장한 뒤 찾아가니 스승 혼자 독방에 갇혀 있었다. 희미한 등잔 불빛 속에 스승님은 온몸이 피범벅으로 얼룩졌지만,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를 알아본 스승님에게 말없이 목례하였다. 스승님은 담뱃대를 내밀었다. 옥 밖에서 나와 열어 보니 등명수상무혐극 주사고형역유여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시 한 구와 고비원주(高飛遠走)’라고 써진 종이쪽지가 나왔다.

 

스승의 말씀대로 북쪽 일월산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원통하게도 수운 스승님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속된 관의 지목 때문에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수운 스승님의 가족을 보살폈다. 그러면서 동학을 재건해 나갔다. 그러다 이필제가 스승님의 신원을 위한다며 거사를 도모하여 아들과 매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도인이 죽었다. 그리고 부인 손 씨가 관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고 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흩어진 도인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가슴을 졸이고 있을까? 가족과 도인들에게 생각이 미치니 가슴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수운 스승은, 도의 앞날이 이처럼 험난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나에게 도통을 전수한 것일까?

 

눈을 감고 떠올려 보는 지난 40여 년이 한순간 같았다. 앞으로의 삶 또한 한순간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루를 10, 100년처럼 살 수는 없을까? 수운 스승님은 도의 깨우침으로 후천개벽 5만년을 준비했다. 스승님은 도를 깨우친 뒤 4년 만에 돌아가셨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순간마다 도인으로, 한울님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지몽매하게 사느냐, 깨달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었다. 더는 두렵지 않았다. 수염을 흔드는 바람이 한울님의 입김이요 생명 기운이었다. 바람은 우주 허공의 모든 생명을 쓰다듬다가 자신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들숨과 날숨이 파도처럼 경계 없이 안팎을 넘나들었다. 어느 순간 몸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는 존재만이 남았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이곳과 저곳, 너와 나의 경계도 사라졌다. 햇빛처럼 텅 빈 자유, 환한 기쁨만 가득 찼다. 주변 풍광이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변해 선명했다.

 

 

해월이 움직이는 기척에 강수는 눈을 떴다. 옆에 있는 해월을 바라보니, 눈빛이 달라져 보였다. 눈빛이 또렷하고 고요해졌다. 두려움이나 슬픈 빛은 보이지 않았다. 호수 속인 듯 평온하고 깊었다. 강수의 마음속에 한 차례 전율이 일었다. 강수 마음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차분해졌다.

가세!”

해월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목소리가 힘 있고 밝았다.

?”

박용걸 집으로 가세나.”

해월이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박용걸 집으로요?”

그렇다네. 박용걸 집으로 가서 일어날 궁리를 해 보세나.”

해월이 앞장서서 걸었다.

선생님!”

강수는 자신도 모르게 해월을 불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절했다.

 

앞으로 선생님을 제 형님으로 모시고 언제든지 따라다니며 돕겠습니다.”

어서 일어나게나. 고맙네. 나도 강 접장을 동생으로 여기고 의지하겠네. 우리 함께 동학을 되살리세나.”

해월이 다가와 강수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